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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92)화 (92/138)

92화

줄기 꺾인 꽃송이마냥 축 늘어져 있던 모란이 눈 떴다.

“해원아.”

“네, 네?!”

“근래 바다보다 넓은 호수 너머 이북 지방은 심각한 가뭄이 들어 몸살을 앓고 있단다. 네 앞에 있는 미욱하고, 아둔하며, 다소 모자란 물의 군주 탓이지.”

대놓고 면박을 주는 모란의 언행에 당황한 해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지방의 영주 되는 대신령은, 그 양상에 따라 권역 또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건 알지?”

“네. 알아요.”

“현재 물의 군주님께선 실연의 아픔으로 마음에 심대한 상처를 입으셨단다. 북대륙 전체가 저이의 영향권이라 이리 사달이 나 버렸지.”

같은 연유로 모란 또한 성치 못했다. 세상의 모든 꽃을 관장하는 화왕에게 가뭄이란, 지독한 갈증과 맞닿아 있었으므로.

“대지의 군주도 마찬가지란다. 어쩌면 그가 줄곧 잠들어 있었기에, 너와 나 같은 존재들이 태동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어, 맞아. 걔가 깨어나면, 꽃님이나 너희 인간들한텐 그다지 좋지 않을 거야. 뭐랄까···.”

물의 군주가 알맞은 예를 찾지 못해 끙끙 앓자 모란이 대신 말을 이었다.

“해원이 네가 잠든 사이에. 개미 떼가 네 몸에 굴을 파고, 집을 짓고, 알을 까 놓았다 생각해 보련.”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해원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에 물의 군주가 동조했다.

“그래그래, 꽃님이네 작은 아가야. 네가 잠든 동안 온갖 기생충이 근막을 갉아먹고, 버섯이 포자를 퍼트려서 살거죽에 빼곡히 군집을 이룬 거야!”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닌다면, 끔찍하지 않겠니?”

“인간들은 대체로 벌레를 안 좋아하지? 너희가 보기에는 징그럽게 생겼잖아.”

대지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너희들, 인간종에 관심이 있든 없든 익숙해질 시간적 여유가 있었어. 나도 꽃님이도, 바람이랑 불도. 하지만 대지는 쭉 잠만 잤잖아? 깨어나 보면 모든 게 생소할걸.”

“생경함은 혐오로 이어질 공산이 크지.”

“글쎄. 걔는 감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잠들었으니까. 혐오조차 못 느낄지도? 그냥 거슬려서 떨쳐내지 않을까나. 먼지 털 듯이.”

“악의 없이?”

“응. 그런 거 없이. 무심코.”

화왕과 군주가 주거니 받거니 했다. 두 신령은 대수롭잖게 한담을 나누었으나, 그들의 대화를 접한 한낱 인간은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두 신령이 인간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러니까, 걔는 없는 셈 쳐.”

“지면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입장에선 그편이 나을 거란다.”

해원이 히끅, 딸꾹질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평생 고이 간직하겠다던 얼음 배마저 떨어트려 버렸다.

내내 벽을 짚고 있던 율해서가 바로 선 것은 그때였다.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음을 내디딘 율해서가 얼음 배를 주워 들고는 해원의 손에 도로 쥐여 주었다.

저보다 작은 해원을 숨기듯 뒤로 보낸 율해서가 한숨 쉬듯 말했다.

“겁주지 마세요.”

“응? 내가 언제 겁줬어?”

물의 군주가 티 없이 해맑게 되물었다. 그 순수하고 무구한 언행이 아무개는 도리어 섬뜩했다.

억겁의 세월을 겪어 온 군주. 하나 감히 인간의 성장에 비유하자면, 소년기를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태초 이래 단 한 차례도 깨어난 적 없는 대지의 군주는··· 그의 의식은, 과연 얼마나 성숙할는지.

애초에 의식이랄 게 존재하긴 할는지.

“지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물의 군주보다는 인간 심리를 잘 아는 모란이 아이들을 타일렀다.

“태곳적부터 내리 잠들어 있던 자가 이제 와 깨어날 가망은 거의 없으니.”

“맞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물의 군주가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설혹 대지가 말썽을 피우거든, 내가 막아 줄게. 걱정할 필요 없어!”

“너는 네 영지부터 잘 관리하지 그래?”

모란의 핀잔에 시무룩해진 물의 군주가 연못 속으로 가라앉았다. 수면 위로 얼굴만 빼꼼 내민 그가 히잉, 하고 불쌍한 소릴 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고오오? 마음이 말을 안 듣는 걸 어떡해애애?”

“어쩌다 저런 게 물의 군주씩이나 되어서는···.”

모란이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당장 시들어 버리는 듯한 형상으로 그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과히 근심하지는 말렴. 비록 저치가 미덥지 못하고, 유치하며, 미성숙하고, 우매하며, 군주의 위엄이라고는 한 올도 찾아볼 수 없지만···”

“너무해!”

“···그래도 인간을 사랑한단다.”

화왕은 나긋한 어조로 조곤조곤 구박했으나, 말미에는 온기가 감돌았다.

촤아악⎯! 기세등등해진 군주가 물살을 가르며 도로 나왔다.

“맞아, 나는 인간을 사랑해! 딱 한 명이지만.”

“그 한 명에게 거절당해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인간종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니, 길게 보면 나쁘지 않아.”

비록 지금은 힘든 시절이나,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물은 너희에게 한층 관대해지리라. 모란은 그리 다독였다. 온화한 스승 덕에 습관처럼 물어뜯기던 해원의 오른손 엄지손톱은 잇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설마하니 이런 비사(祕事)가 있을 줄이야. 아무개는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뒷면이다.

다만 훗날을 살아가는 아무개는 역사의 앞면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해원이 그러하듯, 귀에 단 몇 마디 말로 쉬이 안도할 수 없었다.

머지않아 대지의 군주가 눈을 뜬다. 그리하여 온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쇠락해 가던 국운의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트린다. 이후 이백여 년에 걸친 기나긴 난세가 이어진다.

그러나 물의 군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

황금빛 물결치는 논으로 백지 부적이 날아들었다. 차르르륵⎯ 두꺼운 서책을 펼치듯 경쾌한 울림을 흩뿌리며 벼를 베어 내고 둑으로 옮겼다. 얄팍한 종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금세 볏단이 차곡차곡 쌓였다. 절단면이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술사는 도움을 청한 주민들을 대신하여 벼 베기를 해 주었다. 무릎이 불편하거나 등 굽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으로, 낫으로 일일이 베었다간 하루 온종일 걸릴 논 마지기를 반각도 안 되어 끝내 버렸다.

“술사님, 새참 드시러 오세요!”

머리에 광주리를 인 새댁이 외치자 술사는 아무개를 돌아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가자, 술사님···.”

“한창 수확철이라 사람이 많이 모일 거예요. 괜찮아요?”

아무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 없는 흉신을 물끄러미 보던 술사가 이내 새댁을 뒤따랐다.

오늘 아침. 눈에 띄게 침울해진 아무개에게 술사가 휴식을 권했다. 하지만 아무개는 꿋꿋이 따라나섰다.

술사는 알고 있으려나. 아무개가 이리 침통한 까닭이 그 자신임을.

······당연히 알 테지.

그깟 종이 좀 망쳤다고 시무룩해진 거라 오해할 적에는 손수 반지를 건네주며 기운을 북돋아 주려던 그가. 지금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잖은가.

때때로 침묵은 무언의 답이 되곤 한다. 그의 묵언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이쿠, 술사님 오셨습니까?”

아름드리나무 그늘 아래 놓인 평상. 이미 한잔 걸친 농부들의 면면이 불콰했다.

새참의 다른 이름이 술참이라던가.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고됨도 덜하고 일손도 빨라지니 일석이조였다.

“고생 많으셨지요? 여기, 저희 아버님께서 잡은 뱀으로 담근 술이에요. 술사님도 한잔하시겠어요?”

새댁이 서글서글하게 권하자 주변에서 기함하며 말렸다.

“아이고, 아가. 술사 나리는 약주 안 드신다. 아니, 못 드신다!”

“네가 시집오고 얼마 안 돼서 몰랐구나. 괜찮다. 앞으로 조심하려무나.”

어르신들 만류에 놀란 새댁이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술사가 미처 운을 떼기도 전에 종결돼 버린 셈이다. 기겁하는 꼴로 보아 저들도 술사가 취하면 어찌 되는지 익히 아는 듯싶었다.

“저는 술이 약해서 무리지만, 아무개 님은요?”

뱀술이라. 더덕, 도라지 등 약초로도 담금주를 만들지만, 개중 뱀으로 담근 사주(蛇酒)는 정력에 좋다는 소문 탓에 예로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술독에 둥둥 떠다니는 뱀에서 시선을 거둔 아무개가 술사의 옷소매를 곁눈질했다. 손목에 팔찌처럼 감겨 있던 검은 뱀이 움찔, 하더니 슬금슬금 기어들어 갔다.

“······나도 됐어.”

아무개도 거절하자 새댁은 뱀술 대신 국수를 한 그릇씩 건네주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으며 아무개가 운을 뗐다.

“술사님··· 나, 생각났어. 뱀 이름.”

“뱀? 아, 이분 말씀이신가요.”

그가 소매를 걷어 올리자 팔등에 문신처럼 스며든 뱀이 머리를 흠칫, 떨었다.

“아무개 님이 지어 주기로 하셨죠. 어떤 이름인가요?”

“······담금.”

주제넘게 까불면, 저기 술독에서 푹 우러난 녀석처럼 담가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어감이 좋네요. 혹 따로 뜻이 있나요?”

뜻이야 분명하다만, 유감으로 가득하여 술사에겐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무개가 고개를 가로젓자 술사가 짧게 침음했다. 웃음기가 맺힐 듯 말 듯 미묘한 그의 입꼬리는 마치 ‘네 어떤 심산인지 다 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럼 같이 지어 볼까요?”

그리하여 담금은 클 담(譚)에 밝을 금(昑) 자를 써 크게 밝히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모름지기 생은 이름자를 따른다 하였거늘. 술사가 개입치 않았다면, 최후의 이무기는 사악한 흉신의 음모로 술독에 담기어 생을 마감할 뻔했다.

“저어기 동수네 둘째가 조만간 시집간다지?”

그들이 이름 뜻을 정하느라 골몰하는 사이. 평상에 모여 앉은 주민들의 화두가 옮겨 갔다.

“그 애가 이쁘장하니 곱잖나. 종이 거래하러 온 머시기 상단 도령이 한눈에 반했다더만.”

“우리 고엽이도 얼른 장가를 들어야 할 텐데 말여.”

거진 중장년으로 슬하에 결혼 적령기의 자녀를 둔 탓일까. 혼례로 이어지는 대화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무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저들 중 누군가 술사님께 한 식구가 되어 보자며 농을 빙자한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하고.

한데 웬걸, 지레짐작이 무색하게도 헛소리하는 놈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개가 국수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도.

심히 괴이쩍었다. 술사님처럼 번듯한 성품에 청수하고 재력 넘치고 능력마저 좋은 남자를 가만 놔두다니!

물론 실지로 ‘자네, 우리 딸이랑 만나 보겠나?’ 라던가 ‘부디 내 사위가 되어 주게!’ 따위의 제안을 했다간, 어디 감히⎯ 하며 발칙한 혀를 뽑아다 목에 걸고 교수형에 처할 테지만. 막상 아무도 나서지 않자 눈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이놈들 눈은 죄다 장식인가? 어찌 술사님을 탐내지 않고 배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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