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러니 목숨이 다하기 전에. 단번에 계승을 끝마쳐야 해요.”
철컥. 대나무 발에 붙은 습지를 옮긴 술사가 돌아오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아무개 님?”
그가 자신을 부르고서야, 멎은 숨을 간신히 토해 낼 수 있었다.
“놀라셨어요?”
“······어··· 조금.”
조금이 아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나 아무렇지 않은 듯 평이하게 말하는 그에게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실은 질식할 것 같다 고백하면, 필시 걱정할 테지. 다시는 이렇듯 내밀한 사정을 털어놓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싫다.
하여 아무개는 감정을 줄이고 또 줄여 극히 일부만 꺼내 보였다.
“···죽을 걸 알면서··· 왜, 제자를······ 구하는 거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새까만 눈이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요동쳤다. 빈 대나무 발을 말아쥔 채 술사가 삿갓을 고쳐 썼다.
“반대예요. 죽을 걸 알면서 후계를 찾는 게 아니라, 죽기 위해 후계를 구하는 거예요.”
“······왜?”
왜 죽으려 하는데?
고장 난 듯이 왜? 어째서? 만 되풀이하는 아무개에게 술사가 손 내밀었다. 하나 곧 팔목까지 진득이 젖은 꼴을 자각하고는 뒷짐을 졌다.
희게 질린 흉신을 마주 보고 선 술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삿갓으로 얼굴을 감춘 그가, 창백한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사라져야 하거든요.”
***
사라져야 한다니.
버석하게 메마른 어조가 최후를 입에 올렸다. 그 단조로운 음색이 아무개를 비감에 젖어 들게 했다.
이미 오래전, 술사는 결정한 것이다. 본인을 죽이겠노라고.
심적으로 지쳐 우울감에 잠긴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면, 곁에서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이해타산에 따른 합리적 선택이 죽음이라면··· 모르겠다. 어찌해야 할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감당키 힘든 현실로부터 도피하듯, 아무개는 잠을 청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형님, 형님!”
한가로이 팔베개를 하고 누운 율해서가 얼굴에 덮어논 서책을 눈 아래로 슬쩍 내렸다. 지난밤 꿈보다 훌쩍 자란 율해원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무개는 율해서의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여기는 여전하네요. 온통 풀밭이에요.”
“······그냥 풀이 아니라, 약초입니다.”
“하핫, 알아요. 형님은 예쁘기만 한 꽃보다는 실용적인 걸 선호하죠? 모란 님이 맘대로 하라셨지만, 이렇게까지 약초만 키운 아이는 처음이라고 하셨잖아요.”
화왕은 그의 정원에 아이들을 위한 터를 마련해 주고 원하는 무엇이든 자유로이 가꾸도록 했다. 갖은 꽃으로 화사하게 꾸민 해원과 달리 해서는 시퍼런 풀때기투성이였다.
“아 참, 이게 아니지. 형님, 지금 엄청난 분이 방문하셨어요!”
율해서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정자로 냅다 뛰어오른 해원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재잘거렸다.
“저랑 같이 보러 가요! 네?!”
“누구기에 이리 흥분하셨습니까.”
화왕 모란을 찾아온 빈객은 하나같이 명성 자자한 대신령이었다. 처음 며칠은 놀랐으나,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 수년간 화왕의 정원에서 침식을 해결하다 보니 격이 다른 존재들도 차츰 익숙해졌다.
그런 해원을 새삼 열광하게 할 상대란 과연 누구일까.
“형님도 분명 놀라실걸요? 세상에, 물의 군주님께서 오셨대요!”
해원이 호언장담한 대로. 율해서는 물론, 아무개조차 괄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물의 군주. 실존하는 모든 물결의 원류이자 발원. 태초의 물과 얼음의 현신. 풍화수토(風火水土) 사군주 중 수(水)를 관할하며 물에서 비롯된 생령 일체를 휘하에 거느린, 왕 중의 왕. 바다보다 넓은 호수 너머 북부를 다스리는 진정한 주인.
그를 표현하는 수식어구가 무수히 뇌리를 스치었다.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개념이 부지불식간에 실체화하듯, 아득하기까지 했다.
“같이 보러 가실 거죠?”
해원이 팔을 잡아끌자 엉거주춤하던 율해서는 얼결에 따라나섰다.
그들의 좌우 양쪽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이 발화했다. 화왕의 정원은 꽃의 고향으로 세상 모든 화초가 살아 숨 쉬는 땅이다. 지평선 너머 시선이 닿는 어디든, 온통 꽃으로 만발했다.
너른 꽃밭을 가로질러 형제가 다다른 곳은, 연못가에 지어진 누각이었다. 등나무꽃이 만개한 연못 위 난간에 모란이 기대어 있었다.
그에게서 비롯된 연보랏빛 옷자락이 꽃잎처럼 층층이 쌓여 풍성하게 늘어졌다. 나비와 벌, 새가 당연한 듯 왕의 곁을 맴돌았다.
찬연한 햇빛 아래 등나무꽃이 흐드러진 연못과, 꽃보다 수려한 미인. 단지 바라볼 뿐인데도 까닭 모를 죄책감에 참회를 올려야 할 듯한 정경이다. 하나 이리 아름다운 풍경 속, 해원이 그리던 빈객은 온데간데없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건만. 그새 떠나간 걸까. 해원이 아쉬운 내색으로 돌아서려던 찰나.
“······그러지 마.”
모란이 입을 열었다.
“태곳적 기원할 당시부터 우리는 모두 연결되었지. 넌 혼자가 아니야. 네가 힘들면, 나도 괴로워.”
햇살이 비쳐 든 등나무꽃 장막은 옅은 보랏빛 그늘을 드리웠다. 색 입힌 그림자 속에 잠긴 화왕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난간에 기댄 몸이 축 처졌다.
“답답해. 갈증이 해소되질 않아···.”
분명 그 홀로 있거늘. 마치 대화라도 나누는 양 모란이 말했다. 생소하리만치 허물없는 어투가 적잖이 막역한 사이인 듯싶었다.
“···아이들? 물론. 내 정원에 있지. 이번에는 두 명이야.”
움찔, 몸을 숨긴 형제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해원이 초조해하며 오른손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아이가 있으면 좋냐고? 휘하의 권속을 뜻함은 아닐 테고. 정을 통하여 낳은 아이라면··· 나로서도 경험이 없으니 단언하기 어려우나, 정을 통한 이와 맺은 결실은 존재만으로도 퍽 사랑스럽지 않겠니. 너라면, 필시 벗과 같은 부모가 될 테지.”
네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널 키우는 꼴이 될 것 같긴 하다만.
한숨처럼 작게 덧붙인 모란이 이어 말했다.
“인사하려거든 적당한 모습을 갖추도록 해. 네 본신은 인간의 감각으로 인지하기 어려우니. ······그래. 황후 앞에 나설 때처럼.”
인사라니. 형제가 나란히 몸을 굳혔다. 벽에 바짝 붙은 그들이 더 깊은 그림자 속으로 웅크릴 무렵.
연못이 높이 치솟았다.
“······!”
촤아악⎯! 잔잔히 고인 물결이 홀연히 솟구쳐올랐다. 알알이 흩어진 물방울이 몽글몽글 엉겨들고 어지러이 산란하던 물 덩어리가 차츰 뚜렷한 형태를 띠었다. 동그란 머리에 길쭉한 팔다리를 달고서.
곧게 뻗은 팔 끝이 다섯 가닥으로 갈라졌다. 다섯 갈래로 조각난 물 덩이가 누각 뒤편, 아이들이 숨은 곳을 향해 흐물거렸다. 손이라도 흔드는 듯이.
“안녀엉⎯”
바깥의 소리가 수중에서 왜곡되듯, 먹먹하게 울렸다. 어려 모로 괴이한 형상이었다. 율해서의 전신이 긴장으로 굳었다.
“꼴이 그게 뭐니? 애들이 무서워하잖아. 대충할 생각 말고 좀 더 성의 있게 만들어.”
“예에이이⎯”
모란이 타박하자 여전히 웅웅 울리는 소리로 답한 물 덩이가 한층 정교한 모양을 빚어냈다.
둥실 떠다니는 물방울 사이로 선명한 이목구비가 맺혔다. 물 위에 선 남성체가 보란 듯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이러면 돼?”
“나쁘진 않네.”
모란이 무심히 평한 그는 사람의 모양을 했으나, 아무개에게는 다소 낯선 형태였다. 바다보다 넓은 호수 너머 이북에 기거하는 색목인의 형상인 탓이다.
“안녕, 꽃님이네 아가들!”
모란에게 합격점을 받은 형상으로. 물의 군주가 환히 웃으며 형제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해맑은 모습에 경계가 풀린 해원이 빼꼼 고개를 내밀어 꾸벅했다.
반면 율해서는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 감각을 공유하는 아무개 역시 마찬가지.
저건··· 대체, 뭐지?
전신을 옥죄는 위압감. 사지육신은 물론, 영혼마저 뭉개질 것만 같다. 빛조차 드나들 수 없는 까마득한 심해에 빠져 한없이 가라앉는 공포.
물의 군주가 이리 오라 손짓하자 해원이 쪼르르 뛰쳐나갔다. 아무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녀석은 어떻게 멀쩡할 수 있지? 뼈가 으스러질 듯한 이 압도적인 위력 속에서?
“조심해. 해서는 예민하니까.”
“응?”
모란의 당부에 고개를 갸웃한 군주가 율해서를 돌아봤다. 그가 앗, 하고 뒤늦은 탄성을 토해 냈다.
“그렇구나. 큰 애는 감이 좋네.”
별안간 전신을 짜부라트리던 압박이 사라졌다. 탈력감이 육신을 지배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나, 율해서는 벽을 짚고서라도 몸을 지탱했다. 꼴사나운 모습은 이미 넘치도록 보여 주었으니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양.
알고는 있었지만, 이 녀석. 고집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아무개는 새삼 감탄했다. 상대는 모든 신령 위에 있는 신령, 사군주였다. 한낱 인간 나부랭이가 그 존재에 압도당한 나머지 거품 물고 기절한다 해도 십분 이해할 터. 하나 율해서는 오기로 버텨 냈다.
반면 주의력이 닷 살 먹은 아이만도 못한 물의 군주는 이미 다른 데 정신이 팔렸다. 연못 위에 웅크려 앉은 그가 얼음으로 작은 배를 만들어 냈다. 해원이 눈을 반짝이며 희고 투명한 얼음 배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할··· 참, 얼음이니까 금방 녹으려나요.”
“안 녹게 할 수 있어.”
“와아, 참말이세요?”
그리하여 물의 군주는 영원토록 녹지 않는 얼음 배를 선사하셨다. 나비 쫓는 고양이처럼, 몽실몽실 떠다니는 물방울을 구슬 치듯 톡톡 튕기는 손짓이 군주답지 않게 참으로 산만했다.
손이 시린 듯 옷소매로 얼음 배를 감싸 쥐고 방방 뛰던 해원이 돌연 아쉬운 내색을 했다.
“군주님은 정말 대단해요! 우리 다환의 군주님도 깨어나시면 좋을 텐데.”
다환의 주인이자 대지의 군주 되는 다화련은 혼돈으로 가득한 태초부터 만물이 생동하는 지금까지 줄곧 잠들어 있었다.
다환인들은 이 점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타지방에선 사군주와 관련된 일화도 더러 있는 데다 그들로부터 유래된 안부가 통상적인 인사말로 사용된다 하는데. 다환에선 그러질 못하니 말이다.
“아닐걸? 걔가 깨면 별로 안 좋을걸?”
하나 물의 군주는 해원의 바람을 일거에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