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늘은 종이를 만들 거예요.”
매일같이 오가던 공방이 아닌 낯선 곳에서. 술사는 거대한 목간통 앞에 섰다.
목간통에 한가득 담긴 액체를 막대로 젓자 희고 어렴풋한 것이 둥실 떠올랐다. 황촉규 뿌리를 짓이긴 점액에 닥 섬유를 섞은 것이다.
술사가 작은 단도로 손 끝마디를 베었다. 순식간에 맺힌 핏방울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뚝, 뚝··· 붉은 액체가 수면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묽게 번졌다.
그가 스스로 상처를 낸 순간, 아무개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술사는 극히 의연한 태도로 재차 막대를 들어 휘휘 저었다. 그의 차분함이 옮듯, 사정없이 흔들리던 아무개의 눈동자도 차츰 멎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리했겠지. 피는 고대로부터 주술적 가치가 탁월한 재료였으니.
충분히 섞였다 싶을 즈음. 술사는 사각 틀에 대나무 발을 끼워 고정한 후 목간통 깊이 담갔다. 안에서 퍼 올리듯 하며 앞뒤로 흔들자 대나무 발에 한 차례 걸러진 점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고정 틀에서 대나무 발을 빼내자 희뿌연 닥 섬유가 표면에 얇은 막처럼 덮였다. 갓 만든 젖은 상태의 한지, 습지다.
너른 단 위에 대나무 발을 뒤집어 얹은 술사가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려 습지와 발을 분리시켰다. 이후 같은 작업이 반복되었다. 세간에서 백지 부적이라 불리는, 수제 한지였다.
“···술사님······ 오래 걸려?”
“예. 아마 하루 종일 물질하고 종이를 떠야 할 거예요.”
“······나도··· 해도 돼?”
의외인 듯 술사가 돌아보았다.
“상관은 없지만, 재미없을 텐데요?”
“···괜찮아.”
재미 삼아 하려는 게 아니다. 술사님이 하루 종일 일한다는데 옆에서 멀뚱히 구경만 할 순 없잖은가. 미약하나마 한 손 보태야지.
“이리 오세요.”
그의 부름에 쪼르르 다가가자 술사가 사각 틀을 넘겨주었다. 그가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본 아무개는 주저 없이 점액에 틀을 담그고 휘휘 저었다.
최선을 다해 요리조리 흔들며 틀을 꺼낸 아무개는, 결과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술사가 만든 것과 묘하게 다른데. 구체적으로 뭐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하하, 떡졌네요.”
떡?
아무개 깨달음을 얻었다. 상하좌우 균일하게 고른 술사의 것과 달리 제 것은 닥풀 섬유가 군데군데 뭉치고 떡졌다. 무엇보다 두께가 심히 두꺼웠다. 잘 모르면서 의욕만 앞선 결과였다.
“다시 해 볼까요?”
대나무 발을 물속에 헹궈 낸 후 도로 틀에 맞춰 넣은 술사가 다시 건네주었다. 아무개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며 심호흡했다. 이게 뭐라고 이리 긴장되는지.
“같이 해 봐요.”
뒤로 성큼 다가온 술사는 아무개의 손 위로 그의 손을 겹쳤다. 두 팔이 자신을 가두듯 양옆에서 뻗어 나올 적부터 화들짝 어깨를 움츠린 아무개는, 제 손에 그의 것이 닿은 순간, 하마터면 틀을 떨어트릴 뻔했다.
“요령만 알면 금방 잘하실 거예요.”
그가 아무개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이끌었다. 네모난 틀을 목간통에 담그느라 깊이 숙인 몸이 밀착하듯 가까이 붙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온기에 머리가 혼미해졌다. 의식적으로 묻어 둔 기억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젖은 나신에 하얀 창의만 걸친······
“아시겠어요?”
그의 호흡이 귓불을 간지럽혔다. 솜털이 바짝 섰다.
“자, 다시 해 보셔요.”
도로 물러난 술사가 대나무 발을 꺼내어 습지를 옮길 때까지. 아무개는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이상해 보였던 듯 술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무개 님?”
“···술사님.”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무개는 점액에 젖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흉신이 아닐지도 몰라.
음욕의 신령이 있다면, 필시 자신일 것이다.
제정신인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때를 떠올리다니? 심지어 술사님을 상대로!?
역시 미친 걸까?
“아무개 님?”
스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아무개가 목간통에 쿵, 쿵, 머리를 처박자 술사가 축지해 왔다. 고작해야 서너 걸음도 못 될 거리를 단숨에 축지할 만큼, 그도 놀란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아무개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오물 덩어리인가 자각했다. 정신부터가 버려진 넝마를 주워다 기워 낸 것에 가깝지만, 그다지 의식 않고 지냈는데.
감히, 술사님을 상대로 어찌 이런 망측한···!
“······별일··· 아니야···.”
기필코 별일이 아니게 할 것이다.
일단은 채신머리없는 아랫도리부터 잘라 낼 심산이다. 다시는 선 채로 소피를 볼 수 없게 되더라도. 혹여나 정신을 잃고 술사님께 허튼짓하는 것보다야 낫잖은가. 불상사는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아무개가 극단적인 방안에 골몰하던 찰나. 술사가 무릎을 굽히고 나란히 앉았다.
“아직 의기소침하긴 일러요. 누구나 처음은 어설픈 법이잖아요.”
그는 아무개가 좌절하는 자초지종을 알지 못했다. 종이를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욕망을 품은 자신에게 환멸 난 것을.
목간통에 고개를 묻고 도통 들 생각을 않은 아무개 곁에서. 술사가 고민하듯 침음했다.
“흐음. 어찌해야 아무개 님께서 기운을 차리실까요.”
“······그냥 내버려 둬···.”
이런 오물을 신경 쓰느라 낭비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가만두면 어련히 알아서 꺼지겠지. 쓰레기 터로.
음울한 기운을 짊어지고 웅크려 앉은 아무개를 가만 보던 술사가 소매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그가 이내 소매에서 무언갈 꺼냈다.
“아무개 님. 손 주세요.”
주인이 손, 하면 앞발을 내미는 강아지처럼. 아무개는 보지도 않고 한 손을 내밀었다. 손안에 차가운 금속성이 느껴졌다.
“선물이에요.”
선물?
그제야 아무개가 고개를 돌렸다. 우울한 낯으로 손바닥을 확인한 아무개가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술사가 준 것은, 다름 아닌 반지였다.
“이리 허름한 곳에서 주고 싶진 않았는데. 너무 기운이 없어 보여서요.”
아무개는 부릅뜬 눈으로 반지를 노려보았다. 가락지라 함은 모름지기 혼례의 대표 격인 패물 아니던가.
“안쪽에 술식을 새겼어요. 원기를 억누를 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거예요.”
하고 많은 것 중에 하필 가락지를 선물한 의도가 무얼까. 고심하느라 술사의 부연을 뒤늦게 접했다.
“그것만 있으면, 공방에 언제든 오셔도 돼요. 제가 만든 결계 종류는 모두 통과할 수 있도록 했어요.”
서둘러 안쪽 면을 보니 깨알처럼 작은 술식이 만다라화인 양 기하학적인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직접 착용하는 장신구 형태를 생각해 봤는데, 역시 반지가 활용성이 좋잖아요? 손에 낄 수 있고, 끈으로 엮어 목에 걸 수도 있고. 귀걸이도 나쁘지 않지만, 아무래도 귀를 새로 뚫어야 하니까요.”
일전에 그는 공방의 결계를 해지하며 아무개를 위한 방도를 찾아보겠다 하였다. 이 반지는 그가 고안한 해결책이었다.
“맘에 안 들어요?”
그의 물음에 아무개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기뻤다. 술사님께 받은 선물인데 좋지 않을 리가. 다만 시원하게 들이켠 김칫국을 잘못 삼킨 탓에 알싸한 눈물이 따끔따끔 나올 것 같았다.
좌우간에 선물은 선물이니까. 아무개는 손자국이라도 남을까 조심조심 가락지를 꼈다. 왼손 검지 끝마디에 고리가 걸려든 찰나.
시야가 환해졌다.
“······어?”
아무개는 무심코 눈을 깜빡였다.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다 나온 듯, 오감이 한층 또렷했다.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안쪽 면에 새겨진 술식 한 줄이 희게 물들고, 노상 거치적거리던 원혼들이 일제히 수그러들었다. 안개 낀 듯 어렴풋하던 머릿속이 맑게 갰다.
세상이 이리 선명했던가.
“어때요, 쓸 만한가요?”
반지에 못 박힌 시선을 들어 술사를 보았다.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원기를 억누를 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거라고?
작은 보탬 정도가 아닌데? 이 정도면 흡사 봉인에 준하는 구속이잖은가.
“답답하면 말씀하세요. 좀 더 풀어드릴게요.”
말인즉슨, 능히 봉인할 수 있음에도 다소 느슨히 터놓았다는 뜻이다. 아무개와 원기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임을 알기에. 어느 한쪽을 억압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한쪽도 영향을 받고 만다.
“······괜찮아··· 고마워···.”
덕분에 지긋지긋한 원혼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껴 볼 수 있었다. 뭇사람들이 평범하게 누리는 일상의 감각을 편린이나마 엿보았다.
그만큼 본신의 권능도 약화되었지만.
무어, 흉신의 권능이라 봐야 힘 좀 쓰는 걸 제외하고 좋을 게 하나 없으니. 차라리 이편이 나을 테지.
아무개는 가락지를 검지에 마저 밀어 넣었다. 살짝 헐렁한 듯하던 고리가 딱 맞게 조여들었다.
“아무 데나 끼셔도 돼요. 저절로 둘레가 조절되게 했거든요. 사소한 부가 기능이죠.”
옷자락을 털고 일어나며 술사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으나, 심히 대수로운 일이었다.
직접 물리력을 가하지 않고도 형태가 변형되다니. 이 작은 반지에 얼마나 심유하고도 고등한 술법이 집약되었을런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신기해.”
반지 낀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무개가 낮게 탄성했다.
냅다 들이켠 김칫국의 매운맛에 괴로웠는데. 찬찬히 곱씹을수록 반지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이 작은 반지가 술사의 모든 결계를 무력화시킨다지 않는가.
곳간, 금고, 혹은 은신처까지. 그가 타의 접근을 불허한 모든 곳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즉, 이 반지는 일종의 만능열쇠였다.
너무 대단한 걸 받아 버렸다. 손에 얇은 반지가 아니라 천금을 달아놓은 듯했다. 차라리 망상처럼, 평범한 혼수품이었더라면 외려 마음 편하겠다 싶을 만큼.
내가 뭐라고. 이걸 받을 자격이 있을까.
“습지의 물을 빼고 건조하기까지 시간이 걸려요. 그동안 공방에서 작업을 마저 하고 농사일을 거들어드리면, 끝이에요.”
착, 착, 착. 그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습지를 찍어 냈다.
“일정이 마무리되면 다시 떠날 거예요.”
홀린 듯이 반지를 응시하던 아무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떠난다고?
“아무개 님은 어쩌실래요? 여기 남으시겠어요, 아니면···”
“나는!”
그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버럭 고함을 지른 아무개는, 저가 저질러놓고 제풀에 놀라 눈을 댕그랗게 떴다.
“······술사님이랑, 같이··· 갈 거야.”
언제 언성을 높였냐는 듯. 도로 움츠러든 아무개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네에. 마음이 바뀌거든 편히 말씀하세요.”
어인 상념이 그리 많은지. 이랬다저랬다 바쁘기 짝이 없는 아무개를 술사는 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집착에 가까운 고집을 너그러이 받아 주는 미소에 안도하며. 수십 수백 번 곱씹은 의문을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술사님.”
“네에.”
“술사님은 어째서······ 줄곧, 떠돌아다니는 거야?”
세간에선 유랑술사의 방랑벽을 두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게 얼마나 가당찮은 소리인지 아무개는 알았다.
“어떤 대단한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을 갖고, 천하 만민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며··· ? 그냥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눈에 띈 사람에게···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 뿐이라고.”
과거의 그는 분명 그리 말했다.
“······정말로··· 제자를 찾으려고, 그래···?”
한때 낭설이 돌았더랬다. 유랑술사가 여일한 까닭은, 우수한 재목을 찾아 제자로 들이기 위함이라고.
“엄밀히 말해 제자는 아니에요. 제힘을 물려받을··· 일종의 후계자를 찾고 있어요. 뭐, 아무리 걸출한 원석이라도 세공하고 다듬어야 그럭저럭 쓸 만해질 테니. 반쯤 제자라 해도 무방하겠죠?”
소문이 사실이었어?!
유언비어로 치부되어 금세 사그라든 담론이었다. 그럴 법했다. 사대귀인 유랑술사가 제자를 구한다 공표하면 온 땅의 인재가 제 발로 굴러들어올진대. 번거롭게 직접 나설 까닭이 없잖은가?
“그··· 제자 조건이, 까다로워?”
그렇지 않고서야 제자 좀 들이겠다고 이백 년씩이나 떠돌아다닐 까닭이 없잖은가. 아무리 난세였다 하나, 이 넓은 땅에 그리 인재가 없을까.
아무개가 순수한 궁금증 더하자 술사가 하하, 웃었다.
“글쎄요. 많은 걸 바라진 않은 듯한데. 제 착각일까요?”
술사는 몇 가지 조건을 나열했다. 능력은 적당히, 자질보다는 인성을 눈여겨보며, 집안 사정이나 배경도 고려한다는 등.
“집안이··· 좋아야 해?”
“아뇨. 평범할수록 좋아요. 특정 파벌의 이익 여하에 휘둘리지 않게.”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라 훌륭한 인성과 적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
예상외로 무난했다. 수백 년씩 찾아 헤맬 만큼 까다로운 조건은 결코 아니다. 아무개가 그리 피력하자 술사가 부연했다.
“능력을 덜 보는 거지, 아예 안 볼 수는 없어서 그래요.”
철컥. 착, 차악⎯
틀을 새로 고정하고 물질한다. 두 손은 작업을 지속하며 설명을 더했다.
“잘 살펴보면, 기준에 부합하는 분이 아주 없지는 않아요. 그 수가 부족해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죠.”
“······제자를··· 몇이나 들이려고···?”
“글쎄요. 제가 찾아낸 분들 평균치로 환산하면, 십억 만 명 정도?”
“······?”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라 훌륭한 인성과 적당한 능력을 갖춘 십억 만 명이라.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빠르겠다.
“발견할 때마다··· 제자로 들이면 안 돼? 그럼 당장은 무리여도··· 언젠가는, 일억만··· 은 힘들겠지만, 일만 명 정도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하. 귀여운 발상이지만, 안타깝게도 적립식 제자는 안 돼요. 한날한시에 전원 후계자로 삼아야 하거든요.”
“······어째서?”
쏴아아⎯ 틀에서 물기를 빼내며. 술사가 답했다.
“후계로 힘을 이양하려면, 제가 죽어야 해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