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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89)화 (89/138)

89화

“해원이라 했니? 데려오려무나. 예정이 지체되었으니 이만 돌아가야겠다.”

화왕이 명에 종주의 낯이 환히 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굳어 버렸다.

“내 뜻을 꺾으려 이리 고집을 피우니. 굳이 예까지 걸음 할 까닭을 모르겠구나. 앞으로는 내 개입하지 않을 테니 너희끼리 정하여 보내렴.”

화왕이 더는 화양 율씨에 내방하지 않겠다 선언했으므로.

널리 알려진 대신령 중 인간에 가장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가 모란이었다. 그리 너그러운 신령의 심기를 거슬러 발길조차 끊게 하다니. 대대손손 지탄 받을 희대의 업적이로다.

“모, 모란 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해서. 너도 오렴.”

화왕이 계단 아래를 향해 손 내밀었다. 그 뒤로 새파랗게 질린 종주의 낯빛이 언뜻 보였다.

“모란 님, 그놈은 왜···?”

종주가 더듬더듬 되묻자 화왕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해원이를 데려간다 하였지, 해서를 데려가지 않겠다 한 적은 없지 않니?”

아무개는 좀전의 소견을 재고해야지 않을까, 궁리했다. 인간과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어쩔 수 없다고? 결국 신령은 신령일 뿐이라고?

사람 물 먹이는 솜씨가 이리 탁월한데?

“둘을 데려가는 건 처음이구나. 어서 채비하렴. 해가 지기 전에 떠나자꾸나.”

화왕이 성언했다. 꽃처럼 흐드러지게 웃으며.

***

아무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몹시 진귀한 결단을 내렸다.

사현을 따로 불러낸 것이다.

“뭐, 뭔데? 사과는 어제 다 했잖아. ······혹시 아직 뒤끝 남았어?”

단둘이 대면하자 사현은 지레 찔린 양 웅얼댔다. 아무개는 팔짱을 단단히 꼈다.

“너.”

“···! 네, 넵.”

“나한테··· 정말로 미안해?”

반사적으로 굽신거리던 사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어제는··· 다른 놈들한테, 떠밀린 거잖아.”

“······.”

“별로··· 겉치레도 상관없어. 어차피··· 나도, 사과에 진정성이··· 필요하다고는 생각 안 해.”

진정으로 사죄하고 뉘우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인데. 진심의 무게를 누가 어찌 측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중요한 건 형식이다. 얼마나 그럴듯한 자세를 보여 주는가.

“미안. 널 던진 건··· 고의는 아니었어.”

실로 통탄스럽게도, 아무개의 사과는 형식부터 글러 먹었다. 언행에서 시큰둥한 기색이 물씬 풍겨 나오니 진심이라곤 한 톨 없는, 말뿐인 사과였다.

사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끝이야?”

“······? 뭐··· 어쩌라고.”

뻔뻔하기 짝이 없다. 사현이 붕대 감긴 이마를 짚으며 깊은숨을 토해 냈다. 아무개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맘에··· 안 들어?”

“당연하지!”

기다렸다는 듯 사현이 바락바락 언성을 높였다.

“애초에 그게 사과한다는 태도야? 거만하게 팔짱이나 끼고.”

“······팔짱은··· 너 때문에 하는 건데.”

“나 때문에 팔짱을 왜 껴?”

“······죽일까 봐.”

“그래, 죽··· 뭐?”

아무개가 뭐라든 즉각 반박할 태세로 으르렁거리던 사현이 멈칫, 했다.

“자꾸··· 성가시면 굴면······ 무심코, 죽일지도 모르잖아···.”

아무개가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렸다.

차라리 치기 어린 허세라도 부렸으면 나으련만. 흉신은 진실로 염려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래서 더옥 오싹했다.

“···그래도······ 원한다면, 팔짱··· 풀어 줄게.”

“아닙니다. 계속 팔짱을 껴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현은 즉시 태도를 바꿔 납작 엎드렸다.

“잠깐. 그럼 설마··· 지금껏 팔짱 낄 때마다 살심을 억눌렀던 거야?”

“으응··· 거슬려도 참아야 하는데······ 자칫, 실수할까 봐.”

사현은 아무개가 제 앞에서 팔짱을 몇 번이나 꼈나 돌이켜보았다. 하지만 곧 정신 건강을 위해 관뒀다.

“하여간 알았어. 딱히 미안하진 않지만, 미안하다는 거지? 형식적으로라도.”

이게 무슨 사과 같지 않은 사과람. 사현이 작게 툴툴거렸다.

“솔직함이 항상 옳은 답은 아니지. 그냥 어제처럼 겉으로나마 평화롭게 묻는 편이 낫지 않아? 심중에 쌓인 앙금을 굳이 들춰 봤자 득 될 게 없는데?”

“······그럼··· 너한테도··· 기회를 줄게.”

어디 무슨 소릴 하는가 들어나 보자는 사현에게. 아무개가 제안했다.

“···내 머리를 쳐. ······피 날 때까지.”

싸늘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심리적 장벽을 대신하듯.

사현이 기함하며 뒷걸음칠 쳤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됐거든?!”

“······이거··· 드문 기회인데.”

흉신은 적의와 살의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자신을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시키는 걸로 모자라, 상대를 사지 멀쩡하게 내버려 두겠다는데. 참으로 흔치 않은 일이다.

“어휴, 됐네요! 나도 참. 이런 어린애를 데리고 뭐 하는 거람.”

사현이 혀를 내둘렀다.

“이봐, 흉신. 혼자서 도처에 산재한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없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야.”

“······.”

“뭐, 너는 인간도 아니다만··· 우리처럼 인간에서 비롯된 듯하니.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술사님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너무 애쓰지 마. 철없는 애새끼 흉내에 심취해서 선을 넘은 건 나고, 내가 잘못했어. 넌 정당하게 방어한 거야.”

작고 앳된 아이의 얼굴에서 불현듯 세월이 느껴졌다. 이 순간, 아무개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사현이 반세기에 달하는 세월 동안 풍진 속세를 겪어 온 어른이란 것을.

“나도 참 못났네. 이리 서투른 아이가 먼저 나서게 하다니.”

사현이 씁쓸히 자책했다. 어른의 얼굴을 한 꼬마를 가만 보던 아무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바현이··· 너보다 형이라며?”

“엉? 같은 날에 태어났지만, 바현이 반 시진 먼저 귀빠졌지. 그건 왜?”

“······바현은 날··· 형님이라 불러.”

네 형이 날 형님이라고 부른다.

이 한마디가 내포한 심유한 서열정리의 뜻을 사현이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잉, 그게 어때서요?!”

허공에서 바현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목만 대롱대롱 떠다니는 모습에 사현이 질겁하고 비명을 질렀다.

“야, 야, 야, 인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비이이밀!”

여전히 목만 둥둥 띄운 바현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나는 앞으로도 무개 형님을 형님이라고 부를 거예요오.”

바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된통 당하고 어린이 흉내를 그만둔 사현과 달리 바현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거··· 도깨비 감투?”

“히히, 정답!”

감투를 벗어던지자 바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드러났다.

“저희 수호전에는 유서 깊은 법기가 여럿 있어요. 옛날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 공양받은 게 많거든요.”

“나진 누님께 이르기 전에 당장 갖다 놔!”

“쪽팔리니까 괜히 화내는 것 좀 봐.”

사현이 으름장을 놓자 바현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나 곧 악동다운 사악한 미소가 입꼬리에 걸렸다.

두 손을 허리에 척 올린 바현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가장했다. 곧이어 낮게 깐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봐, 흉신. 혼자서 도처에 산재한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없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야.’”

“으아아아아악!”

자기가 한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사현이 수치심에 비명을 질렀다. 훗, 하고 짧게 웃은 바현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참 못났군. 이리 서투른 아이가 먼저 나서게 하다니.’”

사현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터질 듯 붉게 익었다. 쌍둥이 동생을 수치사 직전까지 몰아넣은 바현은 태연히 돌아서서 아무개에게 다가갔다. 부담스러우리만큼 반짝이는 눈길이 형님, 형님 하고 불렀다.

“형님은 제가 온 걸 진작 눈치채셨죠? 그래서 놀라지 않으셨던 거죠?”

“······어···.”

“와아, 어떻게 아셨어요? 저 바보 멍청이 나잇값 못하는 아저씨 사현이는 전혀 모르던데!”

면전에 대고 메롱 해도 모르더라며 바현이 낄낄댔다. 그 결과 수치와 분노를 폭발시킨 사현에게 목조르기 당했다.

“···숨, 소리.”

도깨비 감투는 모습을 감출 뿐. 소리는 숨기지는 못하니까.

아무개의 설명에 바현은 목을 졸리면서도 박수를 쳤다.

“역시 형님은 멋져, 최고야!”

“형님은 무슨? 네 나이를 생각해라, 이 자식아!”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멋있고 잘생기면 다 형님인 법이지.”

사현의 타박에도 바현은 아랑곳 않았다. 되레 뻔뻔히 응수하고는 사현의 발을 콱 밟았다. 악! 힘이 풀린 틈을 타 바현이 재빨리 벗어났다.

“······잘, 생겼···다고?”

한편 아무개는 생전 처음 들어 본 소리에 미심쩍은 기색을 내비쳤다. 바현이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엇, 별로예요? 그럼 곱다고 해드릴까요?”

겉치레 말이었나.

아무개가 내심 결론을 내렸으나, 바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잘생긴 게 좋아요, 곱상한 게 좋아요? 무개 형님은 이목구비가 섬세하게 생겨서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형님이 좋은 쪽으로 하세요.”

겉치레 아니었어?

“······그런 말··· 처음 듣는데.”

“당연하죠!”

불신으로 가득 찬 아무개에게 바현이 부연했다.

“형님은 온몸으로 꺼져, 오지 마, 접근 금지! 라고 외치잖아요. 그리 음산한 기운을 뿜어 대는데. 어떤 낯짝인지 냅다 들여다볼 간 큰 작자가 몇이나 되겠어요?”

어라?

묘하게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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