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산중에 자리한 화양 율씨 종가는 까마득한 층계로 이어졌다. 율해서는 천천히 계단을 내디뎠다.
“헉, 허억···.”
“아이고, 죽겠다.”
느긋하게 내리막을 걷는 율해서와 달리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이들은 진이 빠져 거친 숨을 헐떡였다.
“헉, 허억··· 화양 율씨, 시조는··· 흐억, 뭔, 생각으로······ 이런, 산골짜기에··· 집을, 지었다냐.”
“술사··· 나리들은, 허억··· 풍진 속세와, 연을 끊고··· 자여어헌과아, 교감으을··· 흐어어야한디야.”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래, 후읍!”
숨넘어갈 듯 헉헉대면서도 불평불만을 그치지 않는 젊은이들을 유유히 앞질러가던 노인이 혀를 찼다.
“에잉, 쯧. 하여간 요즘 것들은. 나 때는 말이야, 여기 계단도 없었으이.”
세상 좋아진 줄 알라며 호통치는 노인을 뒤로하고. 율해서는 묵묵히 하산했다.
너른 옥계 좌우로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살랑살랑 바람결을 따라 춤추던 목련이 꽃잎을 실어 보냈다. 계단 곳곳에 하얀 꽃잎이 낙화했다.
계단을 오르는 행렬은 오로지 정상을 바라볼 뿐, 발밑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관심 속에 짓밟힌 꽃잎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축제는 대단히 호화로웠다. 형형색색 꽃으로 장식한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즐비했다. 아이들은 화관을 쓰고, 여인은 꽃으로 머리를 장식했다. 정다운 연인이 서로의 손에 꽃반지를 끼워 주었다.
어지간한 왕국의 수도 못지않은 거대한 도시. 모두들 웃음꽃 피우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율해서만 홀로 무표정했다.
인근 찻집에서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은 율해서는 가만히 시간을 죽였다. 하는 일이라곤 반 시진마다 화전과 다과, 차를 새로 주문하는 것뿐이었다. 차 외에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다탁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괴고서 창밖을 물끄러미 관조하던 율해서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거짓말··· 해 버렸네.”
무슨 소리지? 아무개는 율해서의 혼잣말과 그가 처한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설마. 꼭 오라던 율해원에게, 그러겠다 답한 거?
짐작이 맞다면,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본부인이 건넨 전낭은 의도가 명확했다.
율해서는 화왕이 간택을 마칠 때까지 돌아와선 안 된다. 그 자리는 율해원의 몫이므로.
화왕이 친히 택하여 가르치는 제자. 모두들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영광스러운 위치에, 율해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한데 무대에 올라서 보기도 전에 짓밟혔다. 당연한 기회조차 박탈당한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그까짓 사소한 거짓말 따위를 신경 쓸 때냐고.
“와아아아⎯!”
온 거리가 들썩였다. 율해서는 턱을 괸 그대로 눈동자만 흘깃했다.
가마가 푸른 창공을 비상했다.
꽃봉오리 같은 가마에 알알이 맺힌 주렴이 이슬처럼 반짝였다. 반투명한 휘장이 길게 늘어져 하늘거렸다. 화왕 모란의 가마다.
이날 화양 율씨 종가는 방문객을 극도로 제한한다. 출입을 허가한 입장권은 천문학적인 금액에 수량도 한정적이다. 자연히 화왕의 실물을 감상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땅의 사람들이 몰려든 까닭은 바로 이 광경을 보고자 함이다. 그 주인처럼 아름다운 가마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자태를.
거리를 빼곡히 메운 인파가 가마의 자취를 따라 움직였다. 찻집에 머물던 다른 손님도, 심지어 점원조차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가 행렬에 끼어들었다.
텅 빈 가게에 율해서 홀로 남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머물렀다. 불그스름한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이쯤이면 화왕도 떠났으리라. 몇 시진을 죽치고 있던 율해서가 마침내 일어섰다.
소란한 축제의 복판을 고요히 거닐어 산 초입에 다다랐다. 율해서는 종가와 이어지는 첫 계단에 발을 올렸다. 아침나절 뭇사람들이 힘겹게 등반한 길을 한 칸씩 올랐다.
방문객이 많았던 탓일까. 발에 채여 짓무른 목련 꽃잎이 점점이 눌어붙었다. 검버섯이 핀 살갗처럼 얼룩덜룩한 계단을 주홍빛 노을이 물들였다.
계단을 한참을 오른 끝에 멀리 대문 처마가 보였다. 율해서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정문까지 스무 칸 남짓할 무렵. 산마루에서 불어든 바람이 율해서를 스치었다. 실바람을 타고 온 꽃 내음이 지친 몸을 그윽하게 감싸 안았다.
향에 취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코끝으로 숨을 들이켜는 것만으로 전신이 노곤해지는 듯했다. 아무개는 꽃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지만, 이런 향을 지닌 꽃이라면 사당 앞뜰에 심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 정문 내에서 소란이 일었다. 율해서는 개의치 않고 무심히 계단을 밟았다. 그렇게 열 칸 정도 남은 찰나.
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꽃잎처럼 갈라진 옷자락이 당장 개화할 듯, 풍성히 일렁였다. 문지방을 넘어 한 발짝씩. 걸음을 디딜 때마다 연분홍빛 옷자락의 색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자목련이 백목련으로 화하듯이.
“안녕.”
목련 꽃이 말했다.
“나는 모란이라 한단다.”
일순, 율해서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아무개에게까지 느껴졌다. 그럴 법도 했다. 진작 떠났을 줄로 알았던 화왕이 여지껏 남아 있었다니.
화왕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자색 머리칼 안쪽이 눈처럼 희었다. 꽃잎 안팎이 상이한 색을 띤 자주목련처럼.
“네 이름을 물어도 되겠니?”
바람결이 왕의 소매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짙은 꽃 내음이 물씬 피어나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방심한 순간, 한껏 도취되어 꼼짝없이 사로잡힐 것만 같았다.
“······율해서입니다.”
“그래, 해서구나. 해서.”
선홍빛 입술이 이름자를 곱씹어 보듯 되뇌었다. 꽃술을 모아 빚은 눈이 유려하게 휘었다.
“해서야,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련?”
높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꽃의 왕과 어린 소년의 서로를 마주 보았다. 소년은 당혹한 듯 쉽사리 대답을 못 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열린 문 사이로 종주가 다급히 뛰쳐나왔다.
“저 애는 아직 모란 님께 선보일 만한 급이 못 됩니다. 해원이야말로 장차 우리 가문을 이끌어갈 종자(宗子)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모란을 설득하고자 급히 입을 놀리던 종주가 말끝을 흐렸다. 모란이 고개를 살풋 기울였다.
“종자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그래서?”
“······.”
“계속해 보렴. 흥미롭구나.”
실로 유쾌한 듯, 한층 짙은 미소를 머금은 모란이 독촉하였다.
화양 율씨 시조부터 전해 내려온 언약에서 알 수 있듯, 화왕은 인간에 지대한 호기심을 가졌다. 이 상황 또한 꽃의 왕에겐 유희의 여흥일 따름이었다.
“내가 해서를 데려가는 게 못마땅하니? 어째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찌 모란 님의 결정에 불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조금 성급하신 게 아닌가 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그간 눈여겨본 아이를 추천해드리려 했습니다.”
“거짓이구나.”
모란이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날 설득하고자 한다면, 좀 더 인간적인 구실을 대려무나.”
화왕은 감히 거짓을 고했노라 질책하지 않았다. 단지 구실을 요구할 따름이다. 누구든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명목이 아닌, ‘인간적인’ 구실을.
“제가 대신 고하여도 되겠습니까.”
말문을 잃은 종주를 대신해 본부인이 나섰다.
“저의 인간적인 구실이라 함은, 극히 이기적이고 파렴치하여 입에 담기조차 치욕스러울 지경입니다. 세가의 안주인 된 몸으로 자진하여 체면을 깎는 셈이니 실로 곤혹스럽지요. 그럼에도 어렵사리 결단을 내렸음을 부디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 말하는 부인의 시선은 모란이 아닌 율해서를 향했다. 지체 높고 우미한 귀부인은 체통을 지키지 못하게 된 원흉을 싸늘한 눈길로 응시했다.
“서론이 길구나. 재미는 있다만, 해서 본론이 무어니?”
“······해원을 데려가 주십시오.”
모란이 짙게 미소했다.
“더 해 보렴.”
“저 아이는 얼자임에도 종자인 해원보다 나이도 많고, 자질도 뛰어나지요.”
부인은 율해서의 재능을 인정했다.
“문중에 재인(才人)이 늘어남은 더할 나위 없는 홍복이나, 은혜가 지나치면 교만해지기 마련입니다. 위계 고하를 바로 하고 기강을 세워야 하는 종부(宗婦)로서. 오늘의 결정이 훗날 지엄한 후계에 자칫 누를 끼칠까 염려되옵니다.”
동시에 한계를 명확히 했다. 여기까지. 그 이상은 아니 된다고.
“명목상 가장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데려간다 하나, 암묵적으로 늘 후계자를 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부디 관례대로 해 주십사 청을 올립니다.”
긴 서론과 그보다 더한 본론이 끝났다. 잠시간 숙고하던 모란은 뒤늦게 율해서를 돌아보고 이런, 하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보는 데서 할 이야기는 아니구나. 자리를 옮길 것을.”
그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아무개는 내심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인간과 가까이 지낸다 한들 신령은 신령이었으니.
화왕은 뭇사람들이 그러하듯, 본능적으로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인간을 관찰해 온 그는 기존의 경험을 반추하여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대개 이러하더라고, 어림짐작했다. 그러니 대처가 다소 늦을 수밖에 없었다.
“내 누차 너희가 권한 아이들··· 후계를 받아들인 까닭은, 누구든 다를 바 없어서란다.”
사람들은 설왕설래했다. 과연 누가 간택될 것인가. 본가의 누가 우수하고, 지파의 누가 뛰어나고, 방계의 누가 걸출하고······
그 모두가 화왕에겐 도토리 키 재듯 고만고만했다. 인간이 개미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구분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 이번에는 달랐다. 인산인해의 축제 가운데서도 홀로 군계일학처럼 두드러져 왕의 흥미를 끌어낸 얼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