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87)화 (87/138)

87화

“우리도 이만 갈까요?”

술사가 아무개를 돌아보며 권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무개는 이내 그를 뒤따랐다.

“······미안해.”

“아무개 님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괜히··· 힘들게, 찾아다녔잖아.”

“그다지 사과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미안하다면, 앞으로 도망은 자제해 주세요.”

저자도가 작은 섬이라 수월했지. 다른 넓은 곳에선 훨씬 힘들 거라고, 그가 덧붙였다.

술사의 음색인 여느 때처럼 낮고 평이했다. 한데 어째서일까. 칠교 남매에게 둘러싸였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간이 쪼그라들었다. 아무개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미안··· 미안해··· 웅얼거렸다.

“옛날얘기를 하나 해드려도 될까요.”

“······? 뭔··· 데?”

“아무개 님도 눈치채셨겠지만, 칠교 남매가 취한 형상은 실체가 아니에요. 본체는 칠교 조각이죠.”

육신을 탈피한 일곱 영혼이 각각의 조각에 봉인, 종속된 형태. 그것이 칠교 남매였다.

“처음 뵈었을 때. 그분들은 놀이패에 계셨어요.”

가는 곳마다 소문이 자자한 놀이패였다. 특이하게 동물을 부려 곡예를 선보이는데, 고 짐승들이 실로 말귀를 알아듣는 양하여 신통방통하다고. 작게는 토끼부터 크게는 코끼리까지. 종류도 참 많고 많았다.

술사는 의문을 품었다.

“이상하더라고요. 놀이패가 머물던 장소는 코끼리처럼 거대한 동물을 수용할 만큼 넉넉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놀이패가 다룬 것은 금수가 아닌, 칠교 남매였다. 각자는 무력하나 함께하면 어떤 형상이든 능히 취할 수 있는, 수호령.

“여차저차해서 놀이패는 망했어요. 남매분들도 무사히 빼내 왔죠.”

“여차···저차?”

“궁금해요? 자세한 내막이 어떤지.”

술사가 입매를 휘어뜨리며 다정히 물었다. 그 낮고 온화한 음색에서 영문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묘하게 압도당하는 기분. 아무개는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더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놀이패로 팔려가기 전에는 사원의 수호령으로 지내셨대요.”

아무개는 잊혀진 사원, 수호전을 떠올렸다. 사대귀인 중 일인인 수호지신을 신격으로 모시는 전당. 이제는 내방하는 신도 한 명 없으나, 칠교 남매가 매일같이 쓸고 닦는 곳.

“현재 사현 님과 바현 님의 언행은 놀이패 시절에 형성된 거라 해요.”

봉인 당시의 외형이 고정된 탓에 사현과 바현은 몇 해가 지나도 어린아이 형상으로 남았다. 놀이패에선 그들 형제를 두고 어린놈이 버르장머리 없다며 고까워하고, 때로는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하여 형제는 ‘어른이 보기에 아이다운 행동’을 부러 연기하였다.

“성격이라 하면 타고난 심성도 중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상황과 환경이 크게 좌우하나 봐요.”

온 세상이 아이 취급하는데 홀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아니잖은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면, 쌍둥이 형제는 어른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다.

놀이패에서 벗어나고도 그때 그 시절의 언행을 되풀이하는 쌍둥이 형제. 칠교 남매는 애써 행동을 교정하려 들지 않았다. 오늘의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각자의 방법으로 삶을 버티는 거겠죠.”

그의 말은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

아무개는 사현이 반납한 베개를 베고 누웠다.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내고 나니 베개의 소중함을 여실히 깨달았다. 이 베개를 베면, 적어도 스스로가 누구인지 망각할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귀장군에 동화되어 사현을 죽일 뻔한 것과 같은 실수를 방지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베개의 가치는 충분했다.

꿈장수에게 사기당했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사나운 분노가 적잖이 누그러졌다. 진심으로 죽이려던 걸 반쯤 죽이는 정도로 완화해 줄 만큼.

그렇게 평온한 심신으로 잠을 청하던 아무개는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오늘도 그저께에 이어 동일한 꿈을 꾸게 될까?

정답은 그렇다, 였다.

“어쩌지? 나 너무 떨려.”

“으으, 긴장돼서 죽을 것 같아.”

절뚝이가 율해서라 부름받은 대전. 그 앞 너른 마당에 약관도 되지 못한 어린 술사들이 모여있었다.

“형님, 형님.”

율해원이 살갑게 다가왔다.

“소식 들으셨어요? 오늘 화왕 모란 님께서 방문하신대요!”

“네. 들었습니다.”

“어엇, 그래요?”

내가 제일 먼저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시무룩하게 중얼거린 해원이 무언가 떠올렸는지 도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오늘 화왕께서 왜 오시는지도 아세요?”

“당···.”

당연하지 않냐고, 그리 대답하려나.

하나 아무개조차 다소 부담스럽다 싶게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해원 때문일까. 율해서는 도중에 말을 바꿨다.

“···아뇨. 잘 모릅니다.”

“제가 알려드릴게요!”

해원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오대세가는 각기 다른 대신령과 가문의 이름으로 언약 맺었다. 그 중 화양 율씨가 연을 맺은 신령은 다름 아닌 꽃의 왕, 모란이었다.

오래전. 화왕은 인간에 호기심을 느끼고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우연히 접한 어느 가족에 힘을 빌려주는 대신, 구성원 중 한 명을 골라 곁에 두고 관찰했다.

모란의 권능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나 메마른 사막에서도 꽃을 피우는 그 힘은 농경사회에서 중히 쓰였다. 가족은 가문이 되고, 가문은 세가로 번성하였다.

초기에는 언약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대신령에게 인간이란 한낱 먼지만도 못한 존재인 까닭에. 언약이니 가풍이니 그럴싸한 말로 둘러대지만, 결국 본질은 가족 하나를 볼모로 팔아넘겨 호의호식하는 꼴이라는 게다.

이러한 비판은 시간이 흘러 자연히 수그러들었다. 모란이 데려간 이는 매번 한 세대를 위시하는 뛰어난 술사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으로 대신령의 수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란의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이 차고 넘쳤다. 하여 화왕이 방문 일자를 고하면, 먼 방계의 인척까지 모두 모이는 행사가 열렸다.

“어서 빨리 모란 님을 뵙고 싶어요. 얼마나 아름다우실까요?”

수줍게 두 손을 마주 잡은 해원이 꿈꾸듯 몽롱한 소리로 종알거렸다.

화왕의 방문은 단지 화양 율씨 가내 행사로 그치지 않았다. 꽃의 왕 모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령’이라는 거창한 별칭의 소유자였으므로. 그의 꽃잎 한 자락이라도 보고자 화양의 백성은 물론, 타지인까지 몰려들었다. 화왕의 방문 자체가 거대한 축제로 화한 것이다.

정작 그 화왕께서 머무는 시간은 일각도 채 안 될 만큼 짧다지만.

“형님도 그렇죠? 모란 님이 어떤 분이실지 궁금하죠?”

“네, 뭐.”

힐끗. 해원의 뒤편으로 눈을 굴린 율해서가 반보 물러섰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련님도 어서 대전으로 가 보세요.”

“형님은요? 같이 안 가요?”

“저는 일이 있어 당장은 가기 힘듭니다.”

해원의 작은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알았어요. 먼저 가 있을 테니, 형님도 꼭 늦지 않게 오셔야 해요?”

“······네.”

“그럼 이따 봬요!”

해원이 손을 흔들며 총총 뛰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 보던 율해서는 한참 후에야 느릿하게 돌아섰다. 인적 드문 길. 대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올해는 참가한 아이들이 적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율해서는 나무 기둥에 몸을 숨겼다. 화양 율씨 종가는 그들의 권능을 과시하듯 온통 정원과 수목으로 가득했다.

“헛수고 말자는 게지. 어차피 화왕께서 간택할 아이는 정해져 있잖은가.”

“종자(宗子) 말이지? 이름이 율해원이라던가. 자질이 매우 뛰어나다 들었네.”

돌연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너희 은련파에는 소식이 닿지 않았나 보군. 종자보다 걸출한 인재가 나왔다네. 종주가 마구잡이로 싸지른 씨앗 중 하나가 결실을 맺은 모양이야.”

아무개는 깨달았다. 저들은 지금 율해서를 거론하고 있었다.

“음? 이상하군. 그런 소린 처음 들어보는데.”

“본부인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계시잖는가. 어느 누가 비천한 얼자 놈이 종자보다 낫다고 섣불리 입 놀리겠나.”

“그도 그렇군. 하면 올해는 그 얼자가 간택되겠어. 화왕께서는 자질이 가장 출중한 아이를 데려가시잖은가? 매번 종자가 뽑히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러하니.”

“글쎄올시다. 또 모를 일이지.”

아까부터 비꼬는 소리만 하던 이가 삐딱하게 내뱉었다.

“겉으로는 능력 순으로 공정히 가린다면서. 실은 암중으로 온갖 모략을 펼치는 건 자네도 알잖는가? 지난번에는 유력한 후보 중 하나가 돌연 몸져누운 바람에 예까지 오지도 못했지.”

오직 능력만으로 선발한다.

언뜻 공정해 뵈는 조건이나, 전제부터 허점이 있었다. 화왕이 방문한 당일 참석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인재라 한들 무용하다는 것.

모란 정도 되는 대신령이 인세에 나타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오늘의 행사는 그에게 제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

결국. 화왕의 시선이 닿는 그 시각 그 장소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마땅한 권력이 받쳐 줘야 했다.

종가 내에서 뒷담을 나누는 두 사람은 한참 기다려도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율해서가 자리를 피했다. 인적이 드문 후문을 포기하고 정문으로 나가자 수위가 막아섰다.

“어딜 가는 게냐?”

“아랫마을 축제 구경하러 갑니다.”

“곧 화왕께서 당도하실 텐데. 지금 놀러 나가겠다고?”

너른 정문은 들어오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예서 나가려는 건 율해서뿐이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 축제를 즐기겠냐? 빈털터리는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이놈은 뭔데 말을 이따위로 하지.

아무개는 삐딱한 눈길로 수위를 노려봤다. 어린 율해서의 시야에선 놈을 올려다봐야 했다. 이 당연한 눈높이조차 거슬렸다. 본래 몸으로는 맘껏 내리깔아볼 수 있을 텐데.

하나부터 열까지 별게 다 맘에 들지 않았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저 밉살맞은 주둥이를 예쁘게 찢어 줬을 텐데.

“돈은 있습니다.”

율해서가 품에서 전낭을 꺼내 보였다. 두껍고도 묵직했다.

“마님께서 주셨습니다.”

그 말에 문지기도, 아무개도 깨달았다.

율해서 본인이 원해서, 자처하여 축제 구경 가는 게 아니다. 본부인이 돈을 주고 내보낸 것이다.

······화왕의 눈에 들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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