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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86)화 (86/138)

86화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 기울었다. 서둘러 가지를 부둥켜안자 줄기가 흔들리고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추락의 위험은 넘겼으나, 위치가 발각됐다.

“여기 계셨네요.”

나무둥치에 다가선 술사가 굵직한 줄기를 손등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서 내려오세요, 서방님.”

미치겠다, 정말.

가지에 엉거주춤 매달려 있던 아무개는 결국 포기했다.

줄기를 박차고 그 반동으로 몸을 회전시켜 가지 위에 선 아무개는 단 두 번의 도약으로 지면에 안착했다. 상황이 이리되고도 막상 술사의 표정을 확인할 자신은 없어 고개가 축 처졌다. 그렇게 어물어물 발끝만 들여다보던 때였다.

“서방님··· 이라고?”

소리를 듣고 온 다홍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다다다 쏘아붙였다.

“지금 술사 나리가 흉신을 서방님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런 거예요?!”

성량이 어찌나 대단한지. 온 숲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서방님! 을 부르짖은 술사 덕에 칠교 남매가 서둘러 모였다. 순식간에 일곱 명에게 둘러싸인 술사가 태연히 말했다.

“네에. 제가 아무개 님을 서방님이라 불렀어요.”

“왜···? 어째서···?”

“그야 정말로 서방님이셨으니까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고, 다홍이 불경스럽게 표정으로 반문했다. 술사는 두 손 모아 볼을 감싸고 수줍게 웃어 보였다.

“저희는 혼례를 올린 사이랍니다. 제가 신부 역이었죠.”

칠교 남매는 하나같이 얼이 빠졌다. 아무개라고 다를 바 없었다.

······저기, 술사님?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지금 할 소린 아니지 않아···?

“마땅한 사정이 있었겠죠. 두 분 문제는 더 캐묻지 않겠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죠. 지금은 사현의 일부터 마무리 지읍시다.”

충격에서 벗어난 나진은 흐름이 삼천포로 빠지려는 걸 적절히 막았다. 그러나 아무개는 좀 더 캐물어 줬으면 했다. 물론 어련히 알아서 할 거지만, 해명할 기회는 정도는 줘야지!

“사현. 아무개 씨께 드릴 말이 있죠?”

나진의 독촉에 사현이 몸을 배배 꼬았다. 녀석이 기어들어 가듯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술사의 폭탄 발언에 그저 황망해하던 아무개의 머리가 일순 차게 식었다.

왜 저놈이 사과하지? 반대여야 하잖아.

사현의 이마에 감긴 붕대를 보니 더욱 납득되질 않았다. 무슨 속셈이지?

“더 크게. 똑바로. 무엇을, 어떻게, 왜, 잘못했는지 소상히 말씀드리세요.”

나진이 훈련원 교감처럼 지시했다. 사현은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똑바로 서서 크게 외쳤다.

“제가 베개를 몰래 숨겼습니다! 베개가 없으면 악몽을 꾸신다기에 못된 맘으로 심술을 부렸습니다! 감정이 좋지 않던 찰나, 바현이가 저를 배신하고 그쪽 편을 들기에 그만 울컥해서···!”

너였구나, 범인.

“아침에는 정말로 악몽을 꾸는지 확인하러 갔던 겁니다! 죄송합니다!”

일순, 암흑을 닮은 흉신의 눈에 싸늘한 예기가 스치었다. 아무개는 불쑥 치미는 충동을 참으며 팔짱을 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죄상을 고백한 직후 사현은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고개 숙였다. 덕분에 이를 보지 못했다.

“술사님께 들었습니다. 아무개 씨는 잠에서 깬 직후, 악몽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과격해지신다죠?”

나진이 확인 차 묻는 말에 아무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마주 본 다홍 라홍이 동시에 한숨 쉬었다.

“이 바보 같은 자식. 머리 깨진 건 자업자득이었네요. 진작에 사람 구실하도록 만들었어야 하는데.”

“모자란 놈을 방치하여 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아무개 나리께는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어요.”

사현은 이미 허리가 기역 자가 되도록 굽히는 중이었으나, 다홍은 택도 없다며 뒤통수를 꾸욱 꾹 눌러 댔다. 한데 사현은 싫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감내했다.

기분이 묘했다. 악의적으로 베개를 숨긴 건 사현이나, 피를 본 건 아무개 탓이다. 쌍방의 과실이 분명한데 상대 측에서 먼저 저자세로 나오자 아무개도 절로 허물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니··· 나도 잘못했으니까.”

“나리께서 무얼 잘못하셨나요? 남의 방에 몰래 들어온 도둑놈을 응징했을 뿐인데.”

“···좀, 더······ 살살할 수도···? 피도 많이 났고···.”

“그거야말로 요 머저리 탓이죠. 나리께서 다소 과하게 대응한 건 악몽 탓이잖아요? 그 악몽을 꾸게 한 게 누구죠? 베개를 숨겨서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또 누구죠? 모두 다 자업자득이란 겁니다.”

“······그··· 래도··· 어린애한테, 너무··· 심했고···?”

이게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개가 상상한 그림은 이렇지 않았다. 어째서 칠교 남매가 저를 두둔하고, 자신은 스스로 나서서 과오를 밝히려는지. 서로 역할이 바뀌지 않았나?

둘이 번갈아 가며 사현을 나무라고 아무개의 역성을 들어주던 다홍 라홍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서로의 얼굴을 거울처럼 마주 보았다.

“어린애···?”

“어린애라고?”

쌍둥이 자매가 목에서 우드득, 뼈 소리가 나도록 격하게 사현을 돌아봤다.

“이 아저씨가 아직도 나이를 숨겼어요?!”

“우리 중에 나진 언니 다음가는 연장자면서! 지금껏 아무개 나리께 어린애인 척한 거야?”

“더러워!”

“징그러워!”

다홍 라홍이 교대로 비난을 퍼부었다. 사현이 꼼짝 않고 허리 숙인 채로 웅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실은 제 나이가 서른···”

“사현아. 우리 재작년에 마흔 넘겼다.”

“···그래? 그럼 마흔둘입니다.”

바현이 정정하고 사현이 접수했다.

아무개는 드물게 당혹했다. 보기와 달리 나이가 제법이리라 짐작은 했지만, 설마 사십 대일 줄이야.

“나리, 이제 아시겠죠?”

“어린애한테 너무 심했던 건, 아무개 나리가 아니라 요 바보천치 아저씨예요.”

만천하에 낱낱이 밝혀진 진상은 가히 충격과 공포였다. 아무개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술사가 작게 웃음 지었다.

“어때요, 아무개 님. 사현 님의 사과를 받아 주실 건가요?”

“······나는, 그게··· 나도 잘못이 있고···.”

상황에 휩쓸린 아무개가 두서없이 어물거렸다. 하나 다홍 라홍은 손을 내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아휴, 아무개 나리는 잘못 없다니까 그러네.”

“이게 다~ 나잇값 못하는 마흔두 살 아저씨 탓이에요.”

“···아니, 나도··· 잘못했다니까?”

이쯤 되자 아무개도 슬슬 속이 치밀었다. 잘못했다잖아. 왜 자꾸 아니라는데? 기어코 잘못을 인정받겠다는 강박마저 들었다.

아무개가 신경질적으로 잘못을 피력하자 술사가 하하 웃었다.

“네, 네. 아무개 님이 잘못하셨대요. 사현 님, 사과를 받아 주시겠어요?”

“무, 물론입니···”

“아니, 아저씨가 뭘 잘했다고 사과를 받니 마니 해요!”

술사가 중재하고 사현이 수용했다. 다홍이 끝끝내 토를 달았으나, 술사는 아무개를 향해 빙글 돌아섰다.

“아무개 님은 어때요? 사현 님의 사과를 받아 주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무개에게 술사가 이어 말했다.

“싫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어?”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받아 줄 필요는 없죠. 사현 님도 마찬가지예요. 사과 한 번 안 받는다고 무슨 일 나겠어요?”

그때. 직각으로 허릴 숙인 데다 아직도 다홍에게 머리를 짓눌리던 사현이 술사의 눈에 들어왔다. 술사가 짧게 침음했다.

“정정. 아무개 님이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면, 사현 님은 평생 저대로 있겠네요. 대단한 일은 아니죠?”

······대단한 일이 아니야? 평생 허리도 못 펴고 사죄하는 자세로 사는 게?

생글생글 웃으며 덧붙이는 술사에게 미묘한 거리감을 느낀 아무개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받을게. 사과.”

아무개가 대강 중얼거리자 사현이 즉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두 팔을 높이 들어 만세 하던 녀석이 이내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에고고, 허리야. 아주 뚝 부러지는 줄 알았네!”

행동거지부터 추임새까지 연륜이 담뿍 묻어났다. 아무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현이 하는 양을 주시했다.

“······머리는··· 괜찮아?”

“물론입죠. 이래 봬도 수호령이라고요?”

사현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랑스레 떠들었으나,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는 싸한 침묵에 도로 주눅 들었다.

“베개는 홍의당에 얌전히 돌려다 놨습니다아···.”

“어휴.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아저씨!”

한껏 으름장을 놓은 다홍이 콧방귀 끼며 돌아섰다. 앞장선 다홍에게 라홍이 따라붙고 뒤이어 칠교 남매가 줄줄이 자리를 떴다.

예상외로 사태가 싱겁게 끝났다. 얼떨떨해하던 아무개는 곧 냉정히 판단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 사현이 저지른 잘못 덕에 무마할 수 있었다.

만약 오늘 아침 걸려든 게 사현이 아닌 다른 녀석이라면? 혹은··· 진심으로 사현을 죽이려 했던 걸 들켰다면.

상황은 분명 달라졌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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