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84)화 (84/138)

84화

아무개는 자신이 간과한 부분을 술사로 인해 자각했다.

확실히 이상하다. 역귀가 작정하고 백정 소년만 피해간 것도 아닐진대. 마을 전체가 몰살당하고 혼자 살아남다니?

“그래서 천벌이라 한 겁니까! 하늘이 굽어살피신 게지요. 제가 복수를 끝마칠 때까지 비천한 생을 이어가도록 허락해 주신 거라 믿습니다!”

확신에 찬 소년이 광기 어린 열변을 토해냈다. 실상은 어떠한지 모르나, 적어도 소년은 진정 그리 믿는 듯싶었다.

길게 말했더니 목이 말랐다. 소년은 술사가 내어준 숭늉 그릇을 들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하면, 제가 괜한 짓을 한 게 아니네요?”

술사가 뜬금없는 소릴 했다. 그릇을 내려놓고 보니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휜 술사가 미소했다.

“복수가 끝나지 않았잖아요.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죠.”

소년은 뒤늦게 떠올렸다. 자신이 눈 뜨자마자 그에게 했던 말을.

천한 백정을 살려 주다니, 괜한 짓을 하셨다고.

“······말리지 않으십니까?”

“제가요? 어째서?”

그야··· 소년이 더듬더듬 말을 잇지 못하자 술사가 대신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무의미한 짓 그만두고 자기 인생을 챙기는 게 나아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의 연쇄를 나을 뿐··· 아, 이건 해당 사항 없으려나요? 어차피 모두 죽었으니.”

하여간 이런저런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복수를 부정하지 않아요.”

그건 참으로 의외였다. 술사의 행보를 익히 아는 아무개로선 더욱 그러했다.

“죄의 무게를 공정하게 재고 합당하게 벌한다면야, 복수를 금할 수도 있겠죠. 개인의 사적인 보복은 혼란을 야기하니까요.”

하지만 이 세상이 그런 곳이던가요?

아니잖아요.

“언제 어느 시대든 사람이 만든 이상, 완벽한 형벌이란 없겠죠. 그래도 차차 나아지리라는 희망에 기대어 감내하는 건데. 오늘날 같은 난세에 희망을 품기는 가혹하죠. 미래에 대한 어떤 보장도 없이 무작정 인내를 강요하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러므로 나는 복수를 부정하지 않는다.

술사가 선언했다. 빈 그릇을 쥔 소년의 손이 떨렸다. 그의 심상에 보이지 않는 파문이 일었다.

“다만, 정도는 지켜 줬으면 해요. 복수랍시고 너무 과하게 일을 벌이면,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나서야만 하니까요.”

세상은 고만고만하게 견디고 버티는 다수로 굴러간다. 하나 다친 줄 알면서도 상처를 동여매지도 않고 그저 참기만을 요구하면, 결국 감당할 수 없이 곪은 상처가 썩어 버리기 마련이니.

“혹시 제가 복수를 말려 주길 바라셨다면, 말씀하세요. 반대 의견도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는···”

“아닙니다.”

술사가 다정히 제안했으나 소년은 거부했다.

“······감사합니다.”

다음날. 비가 그치자 술사는 떠났다. 소년은 다시 마을 주민들의 시체를 들추었다. 그러다 역겨운 얼굴을 발견하면 도끼로 내리쳤다.

까앙⎯! 도자기가 깨지고 부서지는 맑은 소리가 시신의 계곡에 울려 퍼졌다. 몇 날 며칠 침식도 마다하고 인산(人山)을 헤매며 도끼질하던 소년의 몸이 무너졌다.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

악곡의 흥겨운 가락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새로운 악몽의 시작이다.

꿈장수의 베개를 베고 잔 며칠간 아무개의 꿈에 간섭 못 한 게 어지간히도 억울했던 모양이다. 원혼들이 작정한 듯 줄기차게 흉몽을 풀어냈다.

“팔척장신에 머리에는 뿔이 돋았고, 시뻘건 홍안에 눈이 넷, 팔이 여덟이니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양하더라······ 여덟 팔이 서로 다른 무기를 휘두르니 가히 이겨낼 도리가 없다지?”

아무개는 어느 사내의 안에서 깨어났다. 두 기둥 사이에 무릎 꿇은 그는 양팔에 수갑을 차고 이어진 사슬이 좌우 기둥과 연결되어 온전히 앉을 수도, 일어설 수도 없는 불안정한 자세였다.

“팔이 여덟이면, 뭐야. 혼자서 검도 쓰고, 칼도 쓰고, 활도 쏘고, 채찍도 휘두르고, 창으로 찌르고, 철퇴도 날리고··· 암기까지 던질 수 있겠군, 그래.”

머리채가 잡혔다. 목이 꺾여 올라가자 투구를 쓴 낯선 얼굴이 바짝 들이닥쳤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투구의 사내가 지껄였다.

“나머지 팔 여섯 개는 어디 두고 오셨나, 귀장군 나리?”

귀장군이라니.

한때 난세를 평정할 호웅이라 일컬어지던, 원산의 백운. 그가 이 꿈의 주인이었나.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장령.”

차분한 목소리가 만류하자 귀장군의 머리채를 쥔 장령이 고개를 뒤로 했다. 그 틈으로 깡마른 몸에 창백한 안색의 인영이 보였다. 유약한 백면서생의 형상을 한 이가 포박당한 귀장군을 흘깃했다.

“그의 위명이 아무리 대단했던들 결국 한낱 패배자에 불과합니다. 장령께서 이리 관심을 기울일 위인이 못 되지요. 하루빨리 수급을 취하여 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 쓰시길 권합니다.”

“······군사(軍師)의 간언은 언제나 옳지. 대단하신 귀장군을 이리 무릎 꿇린 것도 다 자네의 계책이 성공한 덕이잖은가.”

백면서생은 장령의 군사로 상당한 신임을 받는 듯했다. 슬슬 이번 악몽의 향방이 가늠됐다. 조만간 귀장군의 최후를 함께 맞이할 모양이다.

“하지만 말일세.”

손아귀에 쥔 귀장군의 머리채를 흔들며 장령이 비웃었다.

“군사도 알지 않나. 내 그간 이 작자에게 얼마나 수모를 당해 왔는지.”

“과거의 경험은 길흉화복을 떠나 오늘날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습니까. 노여움을 가라앉히시지요.”

“하하하! 노여움이라, 내가 분노한 것 같나? 치욕을 잊지 못해 적장에게 분풀이나 해 대는 걸로 보이냔 말이야!”

어깨를 젖히며 호탕하게 대소하던 장령이 돌연 정색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가 귀장군의 머리를 팽개치듯 내던졌다.

“이는 무의미한 분풀이가 아닐세. 승전회를 달구어 줄 여흥이지. 여봐라!”

장령이 아랫것들을 부르며 나섰다. 탁, 탁, 타다닥⎯ 그의 행보를 따라 장지문이 차례대로 열렸다.

“제가 옳았습니다, 장군.”

장령이 멀어지고. 남겨진 군사가 귀장군에게 나직이 말했다.

“일신의 무위가 아무리 뛰어난들 단기필마로 적을 무찌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간언드렸지요. 장군이란 직책은 훌륭한 무용보다 지휘하는 머리를 요하는 자리입니다.”

장령이 떠민 그대로. 기괴하리만치 목이 꺾인 귀장군의 눈동자가 군사를 직시했다.

“그래서. 새로 갈아탄 주인이 저런 머저리냐?”

“그 머저리가 장군을 이겼습니다. 저의 계책에 충실히 따라서.”

“비겁하고 교묘한 사기꾼의 충실한 개가 되어 얻는 승리라니, 우습군.”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낸 귀장군이 거칠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난 너 같은 종자랑은 안 맞아. 수작질이 아니꼬워도 머리는 더럽게 좋으니 어떻게든 같이 가 볼까 했는데··· 기껏 수복해서 간신히 살 만해진 땅에 주민까지 미끼로 넘기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개소리였어.”

“헛된 희생이 아닙니다. 그때 제 계획대로 했더라면, 지금쯤 장군께선 다환을 이분할 패자가···,”

“지랄하지 마, 새끼야.”

귀장군은 단호히 잘라냈다.

“내가 언제 다환 통일이라도 한댔냐? 황제 하고 싶다고 징징댄 적 있냐고. 호웅이고 패자고 나발이고, 그딴 추잡한 짓거리까지 해 가면서 이길 생각 없다고 했지.”

궁지에 몰리고도 거침없이 욕지거리하던 귀장군은 이내 자조하듯 웃어제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차피 패배자의 입방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실 테죠, 군사 나리?”

귀장군이 이죽거렸다. 장령에게 분을 다스리라 간언하던 군사는, 정작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도록 주먹 쥐었다.

“······됐습니다. 제 목적은 오직, 제가 옳았음을 당신께 증명하고자 함이었으니.”

타악-! 마지막 문이 열리고, 승전 연회의 악곡이 한층 선명하게 다가왔다. 장지문이 일렬로 열려 깊은 심처에서도 바깥 전경이 보였다.

“귀장군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 있지? 당장 내오거라!”

장령의 명에 따라 함을 든 종복이 줄지어 왔다. 개미 떼처럼 조르르 내전에 들어선 그들은 귀장군 앞에 함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장령이 흡족해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함을 열어라. 귀장군께 보여드려야지.”

“장령, 그것은···!”

군사가 급히 만류했으나, 이미 늦었다. 노복은 무릎을 꿇은 귀장군도 볼 수 있게끔 정면에서 함을 열었다.

잘린 머리가 들어 있었다.

“······⎯!”

머리를 알아본 귀장군이 눈을 부릅떴다. 발로 차고, 매질하고, 분뇨를 먹이며 갖은 모욕을 줘도 꿈쩍 않던 귀장군이 뚜렷하게 반응한 것이다.

장령은 크게 기뻐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다른 선물도 보여드리거라!”

여러 종복이 순서대로 함을 열었다. 제각기 다른 얼굴이 머리만 남은 채 담겨 있었다.

귀장군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팔의 힘줄이 우뚝 서고 수갑과 연결된 사슬이 팽팽히 당겼다. 까드득, 악물린 잇새로 섬뜩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항복하면··· 내 목만 넘겨주면, 수하들은 살려 준다 하지 않았나?”

군사와 장령은 상반된 형색을 했다. 군사는 눈을 질끈 감고 피하듯 고개를 돌렸으나, 장령은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설마 그 말을 참으로 믿은 겐가? 귀장군의 수하는 하나같이 제 상관한테 미친놈들인 걸 온 세상이 다 아는데! 필시 후환이 될 자들을 어찌 살려 두겠는가 말이야!”

장령은 너무 웃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자네 말이 맞았네, 맞았어. 귀장군께서는 보기와 달리 순진한 구석이 있으시군.”

귀장군의 낯이 석상처럼 굳었다. 오장육부가 끊어지듯 속이 쓰라렸다. 악다문 이가 부서져 으깨질 것만 같았다.

“흠. 슬슬 흥이 가시는군. 군사의 말대로 수급을 취해야겠어.”

장령이 검을 뽑아 들었다. 본디 귀장군이 지녔던 패검을 강탈한 것이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제 검에 목을 베이다니!”

목에 검을 겨누고서 귀장군의 핏발 선 눈을 감상하던 장령이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참, 하고 운을 뗐다.

“장군께서 이리 잡힌 줄도 모르고 존가에서 전령을 보내왔다네. 내 장군을 대신하여 친히 서신을 확인했지.”

장령이 검을 높이 들었다.

“셋째, 아니 넷째던가? 많기도 하지. 하여간 몇 번째인지 모를 부인께서 회임하셨다더군. 축하하네, 장군.”

아비를 잘못 둔 죄로 세상 구경도 못 해 보겠지만. 장령은 끝까지 조롱을 서슴지 않으며 검을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귀장군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무가에서 나고 자라 목검으로 장난감을 대신하던 나날. 혼란한 시대에 접어들고 처음으로 사람을 베어 낸 감촉. 단신으로 산채에 쳐들어가 위험에 빠진 자신을 구해 준, 삿갓을 쓴 술사. 이후 산천을 떠돌던 무리를 끌어안고 차츰 영역을 넓혀 가던······

「당신이 날 도울 방법은 딱 하나, 아이를 갖게 해 주는 것뿐이에요.」

장령이 지껄여 댄 탓일까. 그 되바라진 여자가 생각났다.

집안사람들 등쌀에 지쳐 드물게 본가로 갈 때면, 버려진 골방에 숨어 남몰래 시간을 죽이곤 했다. 한데 어느 날 와 보니 제 골방에 낯선 여자가 머물고 있더랬다. 누구냐 물으니 어처구니없게도 제 아내란다.

전장을 떠도는 동안 집안에서 온갖 헛짓거릴 해 대는 건 익히 알았다. 개중 하나가 결혼동맹이었지. 귀찮고 성가셔서 내버려 뒀더니 이젠 저도 모르는 마누라가 생겼단다.

그래도 일단은 혼인한 사이라잖나. 골방 생활이 말이나 되나. 걸음도 어기적거리는 게 불편한가 싶어 도와줄까 물으니 당차게 대꾸했다. 아이나 갖게 해 달라고.

원하는 대로 해 주려다 보니 옷에 가려진 상처를 발견했다. 명백한 타박상이었다.

본처가 아니라곤 하나, 감히 누가 귀장군의 부인을 때릴 수 있겠는가? 안 봐도 뻔했다.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하려면, 요구대로 임신이 가장 확실한 방도였으리라.

하여간 원하던 대로 됐구나. 여느 때라면 축하할 일이겠으나,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아비 없이 자식을 키우려면 힘들겠지. 심지어 그 남편이 패전의 장수라면, 끔찍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을 터.

홀몸으로 애 키우기도 버거울 텐데. 아비란 놈이 먼저 뒤지는 것도 모자라 골치 아픈 후환까지 물려줘서야 쓰나.

“이 몸이 죽어서도⎯”

목덜미를 파고드는 검날의 섬뜩함을 느끼며, 귀장군은 장령과 군사를 향해 저주하듯 맹세했다.

이 몸이 죽어서도,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