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왜 그러세요?”
분합문 너머로 분주한 기척을 느낀 술사가 물었다. 아무개는 화들짝 놀라 무심코 얼버무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멍청아.
아무개는 고뇌에 빠져 기억을 쥐어짰다. 지난밤, 초가에 베개를 가져가 하룻밤 묵었다. 오늘 낯, 술사님이 초가에 두고 온 베개를 가지러 갔다. 사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빈손이었다. 이후 칠교 남매와 저녁을 함께했으니까. 식사 자리에 베개를 가져올 순 없으니 홍의당에 미리 놓고 왔다 했더랬다.
즉. 오늘 아무개는 베개를 본 적 없다.
“잠이 안 오세요?”
“아··· 니.”
술사가 거듭 묻기에 우선 몸을 누였다. 하나 포근한 이불도 골수까지 차오른 고민을 덮어 주진 못하였다.
술사님이 베개를 가져오던 중에 착오가 있었나? 분명히 홍의당에 두고 왔다고 했는데? 왜 베개가 없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 일단 술사님이 실수했으(리)라는 가정은 배제하고 정리하자.
사원으로 돌아온 술사님이, 사가에서 베개를 챙긴 후, 홍의당에 두고 왔다. 칠교 남매를 포함해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아무개는 온천으로 향했다. 심부름을 마치자마자 씻긴 했지만 심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던 탓이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도적 떼 사이를 누비고 다닐 적에. 턱주가리를 날리자 떡진 머리에서 우수수 떨어지던 하얀 것을 아무개는 똑똑히 보았다. 비듬이 아니다. 그건 분명 이였다. 머릿니!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고개를 털어 잡생각을 떨쳐낸 아무개는 다시금 베개를 생각했다. 의심되는 부분은 역시 온천에 있던 때다. 아무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신다 들었습니다.」
문득 나진이 제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술사님께서 임시로 억제시켰다 하셨는데, 혹 베개를 사용하는 겁니까?」
「혹여라도 베개를 잃어버렸다간, 도로 악몽을 꾸겠습니다.」
설마.
창졸간 일말의 의혹이 뇌리를 스쳤으나, 아무개는 의식적으로 보류했다.
“아무개 님. 정 잠이 안 오시거든···.”
“아, 아니야. ······이제 잘 거야.”
베개에 발이 달려 스스로 도망간 게 아니고서야, 이 섬 어딘가에는 있겠지. 괜히 술사님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전처럼 밤을 새울까 고민해 보았으나, 술사에게 들킬 것 같았다. 그도 기척에 민감한 편이니까. 그가 왜 안 자냐 묻거든 핑계 댈 거리가 궁했다.
베개가 사라진 걸 알면, 술사는 당장 일어나 찾으러 갈 터였다. 공방에서 온종일 작업했을 텐데. 제 일로 괜한 노고를 늘리긴 싫었다. 내일 일찍 일어나 몰래 찾아봐야지.
용단을 내린 후 아무개는 눈 감았다. 태어난 이래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거늘. 고작 요 며칠간 편히 잤다고 그새 익숙해져 버렸나. 삽시에 졸음이 쏟아졌다.
흐릿한 의식 너머로 비명과 울음, 비탄과 절규가 아득히 몰려왔다. 다가올 악몽을 예고하듯이.
***
꿈속 하늘은 어둡고 흐린 가운데 궂은 비가 내렸다. 아무개가 깃든 육신은 쏟아지는 폭우를 피하지 않았다.
쏴아아아······
빗발이 지면을 두드릴 때마다 동그란 홈이 패였다. 허물어진 흙무더기가 빗물에 쓸려가고, 그 아래로 손이 드러났다.
번쩍, 번개가 쳤다.
묽은 황토에 파묻힌 눈알이 푸른 번갯불을 담아 유리알처럼 빛났다. 스윽, 슥. 질척한 흙을 발로 문질러 치우자 코와 입술, 턱이 땅 거죽 위로 두드러졌다.
쭈그려 앉아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목구비를 유심히 살핀 후.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린다.
우르릉⎯ 천둥이 뒤늦게 울린다. 파묻힌 얼굴 위로 손에 쥔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콰직! 와드득···
도끼에 찍힌 미간은 두 갈래로 조각났다. 부서진 이목구비 파편이 사방팔방 비산했다. 지독히 잔인한 광경을 눈에 담으며 아무개는 짐작했다.
도자역 환자였군.
힘이 좋고 도끼 쓰는 모양이 제법인 걸로 보아 평소 몸 쓰는 일을 하는 듯싶었다. 나이는 열일고여덟 즈음 됐으려나.
아무개가 미루어 짐작하는 사이. 소년은 도자역 시신 한 구의 얼굴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끔 박살내 놓았다. 잠시간 그 스스로 벌인 꼴을 확인한 소년이 일어났다.
터덜터덜 내딛는 걸음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했다. 비가 오고 지면이 고르지 못해 자꾸만 발이 미끄러졌다.
바닥에 돌이 또 왜 이리 많은지. 바위산이라도 되나?
아무개가 내심 불만을 토로하던 중. 번쩍⎯ 번개가 거듭 하늘을 양분했다. 지척에 내리친 탓에 일순 사위가 낮처럼 환히 밝아졌다. 비로소 아무개는 목도했다.
발밑이 시신으로 가득했다.
돌이 굴러다니는 바위산이 아니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도자역 환자의 시체로 쌓은 인산(人山)이었다.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나, 아무개는 벌써부터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오늘 밤은 유달리 길어질 듯한 예감에.
소년은 깊은 골짜기에 유기된 시신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도끼로 쳤다. 도자기 특유의 쨍, 하고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퍼져나갔다.
전신이 빗물에 젖어 척척한데도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그 짓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쭈그려 앉아 도끼질하려는데 눈앞이 빙글 돌았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도끼가 흙탕물에 처박혔다.
도끼 자루를 다시 쥐려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다. 차게 굳은 손은 뻑뻑하여 주먹을 쥐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제 보니 손톱이 파랗게 변했다.
사나운 빗줄기가 전신을 아프게 때렸다. 추위도, 고통도 뒤늦게 자각한 소년이 젖은 몸을 웅크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불현듯, 비가 멎었다.
고개를 들자 머리 위로 우산이 비스듬히 씌워져 있었다. 우산을 쥔 손끝을 눈으로 좇자 한 남자 보였다. 그는 우장(雨裝)을 갖춘 채 삿갓을 쓰고, 빈손에는 창백한 부적을 쥐었다.
“열심이시네요.”
고개를 살풋 기울인 유랑술사가 소년을 향해 웃어 보였다.
“급한 사정이 아니라면,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마저 하지 않을래요? 날이 갠 후에요.”
이러다 고뿔 들겠다는 술사의 만류에 소년이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무슨 억하심정으로 망자를 욕되게 하느냐 꾸짖지도 않고, 시신을 훼손치 말라 호통치지도 않았다. 그의 권유는 퍽 기묘한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술사는 소년의 물음이 의아한 듯 재차 고개를 기울이더니 아, 하고 깨달았다는 듯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
“인사를 깜빡했네요.”
······지금 인사가 문제는 아닐 텐테.
어스름한 하늘 아래 물안개 자욱한 시체 밭에서. 소년의 침묵이 길어지고 술사의 미소도 차츰 애매해졌다.
“으음. 이게 아닌가요? 따로 듣길 원하는 말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참고할 테니.”
하도 어처구니없어서일까. 긴장으로 바짝 죄어 있던 소년의 맥이 풀렸다. 오랜 시간 혹사당한 몸이 까무룩 의식을 놓고 말았다.
소년의 육신에 깃들었으나, 정신은 분리된 아무개가 울컥 짜증 냈다.
술사님 앞에서 이 무슨 민폐야. 당장 일어나지 못해?
소년의 눈이 감기자 아무개의 시야도 까맣게 물들었다. 발로 차서라도 깨우고 싶지만, 실지로는 기절한 몸 안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꿈속에서 보고 듣고 겪는 모든 일은 지나간 시절에 불과하며, 흉신은 서글픈 과거를 되새길 따름이니.
이제 진흙탕에 코 박고 드러눕겠구나, 그리 예감한 순간. 기울어지던 소년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이런···.”
소년을 낚아챈 술사가 나직이 탄식했다. 동시에 아무개의 의식도 멀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장소가 바뀌었다.
빗소리가 여전한데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갔다. 화로의 온기가 뻣뻣한 몸을 녹여냈다.
서둘러 일어나려던 소년은 몸에서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이제 보니 벗은 나신에 도포 한 겹을 덮어쓴 몰골이었다.
“옷이 다 젖어서요.”
술사가 짧게 설명했다.
그는 유삼(油衫)을 벗고 화로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도포를 이불 삼아 준 것도 그의 소행일 테지.
“······괜한 짓을 하셨습니다.”
오래도록 쓰이지 않아 녹슨 슨 목소리로 소년이 핀잔했다.
“천한 백정놈을 살려주시다니요.”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 엎드려 절하기는커녕 비꼬는 소리나 하다니. 아무개의 심기가 다소 불편해졌으나, 의외로 화는 크지 않았다. 소년의 어조에 자조가 배어 나온 탓이다.
비천한 몸뚱어리가 당신의 손을 더렵혔다는 듯이.
“신분이 중요한가요?”
술사는 김이 올라오는 숭늉 그릇을 소년의 곁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다 망했잖아요. 지나간 시대가 남긴 잔재에 얽매이기는 아깝지 않나요?”
소년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나 반쯤 누운 채로는 행전을 맨 종아리 언저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혼자 아무리 부정해도 다른 모두가 긍정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소년은 초면의 낯선 이에게 제 사연을 털어놓았다.
어딜 가든 꼬리처럼 따라붙은 경멸의 시선과 거부의 몸짓. 애써 도축한 고기를 거저 얻어가려는 자들. 정당한 몫을 달라 하면 주제를 알라며 돌아오는 폭력. 짐승만도 못한 취급.
“누이는 자결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건, 자결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백정각시놀음이라. 대관절 누가 누구더러 짐승이라는 겐지. 그따위 상스러운 짓거리를 한낱 ‘놀음’이라 치부하는 자들이야말로 짐승만도 못하지 않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두고 자결(自決)이라 하면, 누이는 자결했다 할 수 없다. 누이는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리 살아 무엇 하냐던 어미는 누이를 뒤따랐고, 술에 진탕 취한 아비는 도축하는 칼을 들고 같이 죽자 하였다. 소년은 아비가 두려워 도망쳤다. 몇 날 며칠을 산속에 숨어 있다 주린 배를 견디지 못해 돌아오니, 아비는 먼저 이승을 떠나 버렸다.
소년은 살아남았다. 처음 살게 한 것은 두려움이었으나, 끝에 살게 한 것은 원통함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누이와 가족을 죽인 놈들이 젊은 시절 한때의 짓궂은 놀음이라 대수롭잖게 넘기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인 일인지. 소년이 복수를 결행하기도 전에 하늘이 대신 벌을 내렸다.
도자역이 퍼진 것이다.
“살고 싶어 아등바등하는 행태가 어찌나 우습던지.”
소년이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기괴하리만치 입술을 끌어올려 웃으니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리 잘만 웃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눈앞이 흐리게 번졌다.
“마을 놈들이 모다 도자역에 걸렸습니다! 천벌을 받은 게지요! 하나··· 그건 제 복수가 아니잖습니까?”
하여 소년은 마을 주민들의 시신을 뒤졌다. 누이를 죽인 역겨운 얼굴을 일일이 찾아내 손수 박살 냈다.
죽은 자는 고통을 느낄 수 없고 반성할 수도 없다. 무의미한 짓. 하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놀랍네요.”
소년의 곡절을 가만히 들어주던 술사가 마침내 운을 뗐다.
“마을 주민 모두 역병에 걸려 죽었는데··· 당신만 멀쩡하시다니.”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