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오늘치 할당량 미달이군요.”
주문서를 서안 위에 탁탁, 두드려 각을 맞춘 후. 지폐 세듯 일일이 헤아려 본 나진이 결론지었다.
술사는 변명의 여지 없이 하하··· 어색한 미소만 흘렸다. 그를 향해 시선을 든 나진이 코끝에 아슬아슬 걸린 애체를 손등으로 밀어 올렸다. 반짝, 둥근 유리알이 하얗게 빛을 반사했다.
“집중이 안 되셨나 봅니다.”
“그러게요. 내일은 더 열심히 할게요.”
그가 제작한 부적과 족자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나진이 덤덤히 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심부름시키지 않고 술사님 곁에 꼭 붙여 둘 걸 그랬습니다.”
“······⎯.”
쿨럭, 사레들린 듯 밭은기침 소리가 났다. 잘못 들었나 싶어 흘깃하니 술사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나진은 제 눈을 의심했다.
“흉신, 아무개 씨가 그리 신경 쓰입니까?”
“설마······ 그렇네요.”
반박하는가 싶더니. 돌연 상념에 빠진 술사가 이내 태도를 바꾸어 수긍했다. 나진이 대수롭잖게 응수했다.
“흡사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이군요. 다 큰 어른을 무엇 하러 걱정하십니까.”
으음, 목을 울리며 낮게 침음한 술사가 쓰게 웃었다.
“그분이 불운을 끌어들이는 체질이라서요. 또 어떤 사고에 휘말렸을지 모릅니다.”
“어차피 이 근방은 술사님 구역이나 다름없잖습니까? 설령 사고가 나더라도 능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어지간하면 그렇겠지만, 아무개 님께 붙은 건 어지간하지 않아서요.”
“원혼 말씀입니까? 하기야 많기는 많더군요.”
나진은 완성된 보구들을 품에 안고서 수납장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고작 한 명에게 그리 많은 넋이 붙은 건 처음 봤습니다. 어찌나 수두룩 빽빽한지. 한낮에도 아무개 님 주위만 사위가 컴컴하더군요. 아이들이 놀라 무턱대고 공격할 법도 했습니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요.”
두 손을 마주 털어 낸 나진이 재차 보구를 옮겼다.
“언제 처리하시렵니까? 그대로 둘 수는 없잖습니까. 내색은 않지만, 아무개 씨도 상당히 버거울 텐데요.”
서안을 정리한 술사가 나진에게서 보구와 주문서를 넘겨받았다. 그로 모자란 듯 남은 짐을 연거푸 얹어 한 번에 들어 올렸다.
“그렇죠. 매일 꾸는 악몽부터가 원귀들의 소행이니까요. 한데 그 혼들이 아무개 님과 거의 일체화된 탓에 자칫 아무개마저 해할 우려가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우선은 악몽을 억제시켜 놓았어요.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은 될 수 없겠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주문서를 응시하던 술사가 불쑥 말했다.
“주단 금씨와 거래를 끊을까요?”
맥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에 나진이 정리하다 말고 시선을 주었다.
“뜻대로 하십시오. 돈이 궁하지도 않거나와, 옥선방의 주인은 술사님이시잖습니까. 내키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럼 지금 들어온 주문만 처리하고 다음부터는 받지 않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나진은 다시 선반으로 고개를 돌렸다. 능숙하고 기민한 솜씨로 착착 정리한 나진은 작업이 얼추 끝나고서야 사사로이 질문했다.
“돌연 변심한 까닭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냥, 안 내켜서요.”
술사는 마지막 주문서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보지도 않고 대강 팽개치는 듯싶었으나, 얇은 종이는 날개라도 달린 양 팔랑거리며 수납장 속에 정확히 안착했다.
그 주문서에 적힌 의뢰인. 주단 금씨의 서명을 흘깃한 나진이 되물었다.
“갑작스럽군요. 백 년 넘게 거래해 온 단골손님이라 하셨잖습니까.”
“공방을 처음 열었을 땐 손님 가릴 처지가 못 됐어요. 이후로는 타성에 젖어 방치했고요. 한데 가만 돌이켜 보니 저걸 묵혀 둘 이유가 없더라고요? 이왕 생각난 김에 치워 둘까 해요.”
“······아무개 씨가 그러셨습니까? 주단 금씨 주문은 받지 말라고요.”
나진이 신중하게 운을 떼었으나, 술사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휘었다.
“아무개 님은 그런 말씀 안 하세요. 단지 물어보셨죠. 주단 금씨를 안 좋아하는지.”
“주단 금씨를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백 년 전에는 그랬죠. 지금은 딱히?”
“스러진 옛일로 현재 이익을 포기하는 건, 비이성적이며 감정적인 결정입니다.”
“하하. 전적으로 동의해요.”
술사는 스스로도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결정이라 시인하면서도 철회는 않았다.
“술사님도 사람이셨군요.”
나진이 신기한 듯 감탄처럼 중얼거렸다. 술사가 난처하게 웃었다.
“당연한 소릴 왜 당연하지 않은 양 하시는 걸까요.”
“솔직히 반쯤은 사람 같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술사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인간미가 다소 부족한 편이죠.
나진이 덤덤한 어조로 부연하자 술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처럼 인간적인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본인의 어떤 면을 인간적이라 여기시는지 몹시 궁금하군요.”
“흠.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한심한 실패자 같은 면?”
그의 언행은 자책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유랑술사라는 인물을 실패자로 간주한 것이다.
그 실패자로부터 구원받은 나진으로선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지만.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점은 인간종의 특성이니 넘어가겠습니다만, 당신께서 한심한 실패자라는 점은 동의하기 어렵군요.”
“하하. 나진 님이 절 너무 좋게 봐주셔서 그런 거예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술사가 마룻바닥 가까이 손 내밀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햇볕을 쬐던 뱀이 스물스물 기어와 손을 타고 팔 안으로 스며들었다.
평소 술사에게 문신처럼 달라붙어 꼼짝도 않던 녀석이다. 기척을 숨기고 있는 듯 없는 듯 숨바꼭질하기에 내향적인 성정이라 여겼거늘. 아무개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와 온 공방을 쏘다녔더랬다.
그간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답답했을런지. 술사는 쓰게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진이 그 뒤를 따랐다.
“당신께선 강박적으로 결벽적인 분입니다.”
나진이 이어 말했다.
“사람이 응당 가지는 감정. 특히 분노나 슬픔, 불안 등의 부정적인 면이 소거됐다는 인상을 받곤 했습니다. 누군가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지워 버린 듯 이질적으로 깔끔하죠.”
그렇기에 단지 ‘그냥’이라는 이유로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고, 내가 아는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고.
“변하셨습니다.”
공방 문을 걸어 닫던 술사가 멈칫했다. 나진은 그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변했다고요?”
철컥. 자물쇠가 잠겼다.
“제가?”
불현듯 나진은 희미한 두려움을 느꼈다.
질식할 듯한 공포감과는 달랐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 문단속을 마치고 돌아선 그가 어떤 표정일런지.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하나 뒤돌아본 술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낯이었다. 습관인 듯 미지근한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 조금 난처한 듯도 한.
“곤란하네요.”
그걸로 끝이었다.
강변 상가 골목 어귀로 걸어간 후 축지하여 저자도로 이동했다. 여느 때와 변함없는 일상. 나진은 묘한 안도감에 사로잡혔다.
사원으로 돌아온 나진은 장거리부터 확인했다. 기다리던 서책이 없어 다홍 라홍이 시무룩해졌으나, 그 외에는 빠진 것 없이 완벽했다. 흉신과 바현은 무탈히 심부름을 끝마쳤다.
그런 줄 알았다.
“거기서 형님이 막, 쇠스랑을, 어? 홰애애애액⎯! 하니까 도적 세 놈이 한꺼번에 걸려서는, 낚싯줄에 꿰인 듯이 넘어지는데······.”
넘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바현이 흉신의 무용담을 퍼트렸다. 나진은 이마를 짚었다.
「그분이 불운을 끌어들이는 체질이라서요. 또 어떤 사고에 휘말렸을지 모릅니다.」
이래서야 술사의 고민이 딱 들어맞은 셈이잖은가.
술에 전 비렁뱅이도 아니고. 그새 같은 얘길 얼마나 반복했으면, 다홍 라홍은 무시로 일관하고 마윤은 자리를 피해 버렸다. 가철만이 듣는 시늉이라도 해 주었으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빤했다. 사현은 함께 흉신을 적대하던 형제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도적 떼가 왔어요?”
술사의 물음에 바현이 만세 하며 외쳤다.
“네! 그치만 무개 형님이 완벽히 퇴치했어요! 호되게 당했으니 앞으로 이 근처엔 얼씬도 않을 거예요!”
바현은 아무개를 추켜 올릴 심산이었다. 한데 막상 당사자인 아무개는 바현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킬까 고민했다.
저놈이 술사님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 구분 않고 나불대잖아.
“······내가 먼저··· 시비 걸려던 건 아니고···.”
아무개는 다급히 변명을 쥐어짰다.
“그··· 있잖아. 술사님이 데려온 가짜신령······ 위험해 보여서··· 빼내려다가···”
“구해 주려고 하신 거예요?”
아무개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신령을 구하고자 끼어든 건 사실이잖은가. 가짜신령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술사를 위해서지만. 결과적으로 사지 멀쩡하게 보존해 줬으니 뭐.
“아무개 님이 다른 누군가를 구해 주시다니···.”
뜻을 음미하듯 입술에 머금고 되새김질하던 술사가. 눈꼬리를 접어 환히 웃었다.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과 작위적인 미소에 익숙한 아무개가 처음으로 목도한, 선명한 웃음이었다. 때 묻지 않은 소년처럼 말간 웃음.
그 미소를 아무개는 홀린 듯 멍하니 바라봤다. 술사를 십 년 넘게 알았다던 칠교 남매도 기함할 지경이니 오죽할까.
“다친 데는 없나요? 상한 곳이 있거든 마윤 님께 보여드리세요.”
“······어? 어, 어어···.”
술사의 얼굴에 넋을 잃고서도 아무개는 어찌저찌 대답했다. 정신 차리고 말귀를 알아먹어서가 아니다. 그의 음성에 자동 반응하는 버릇이 몸에 밴 탓이다.
좀전의 미소는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아무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늘 밤도 사가에서 묵으시렵니까?”
충격에서 가장 먼저 풀려난 나진이 사무적인 어조로 확인했다. 술사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시 홍의당에서 지낼 거예요.”
참, 하고 술사가 아무개를 향해 돌아섰다.
“아무개 님. 베개를 초가에 두고 오셨죠? 지금 가져올게요.”
“······어? 굳, 이···? 나중에 가져와도 되는데···.”
우물쭈물하는 아무개와 달리 술사는 단호했다.
“아무개 님 숙면을 지켜 주는 소중한 베개잖아요. 잘 챙겨야죠.”
술사는 즉시 축지하여 사라졌다. 그의 빈자리로 나진이 다가왔다.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신다 들었습니다. 술사님께서 임시로 억제시켰다 하셨는데, 혹 베개를 사용하는 겁니까?”
아무개는 술사의 초가가 자리한 방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개가 아니라 베갯잇이 핵심이지만,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베개는 아닌가 보군요. 보구나 다름없으니 혹여라도 베개를 잃어버렸다간, 도로 악몽을 꾸겠습니다.”
아무개는 또다시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날 밤.
“······?”
아무개는 당혹했다. 아무리 찾아도 베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