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각축이 벌어지기 전. 동일한 질문에 두령은 전원 공격으로 화답했다.
하나 이제는 그리할 수 없다.
두령은 휘하 무리를 두루 살폈다. 소요에 비해 부상자는 기형적으로 적었다. 아무개가 최단 거리로 뚫고 온 탓이다. 심지어 피를 본 놈도 없다. 이 또한 아무개가 인명을 다룰 때엔 둔기(鈍器)만 사용한 탓이다.
이미 전의는 완전히 상실했다.
“······물러나겠네. 더는 소란 피우지 않고 조용히 돌아갈 테니 부디 보내 주지 않겠나.”
두령의 항복 선언하자 도적들이 슬금슬금 부상자를 챙겼다. 한데 마을 청년들은 예서 멈출 요량이 없었다.
“누구 맘대로 물러가네 마네야?!“
“들어올 땐 느이 맘이었을지 몰라도, 갈 땐 아니지라?”
“저노무 시끼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놔야 해. 그래야 다시는 헛짓거리 할 엄두도 못 내지!”
젊은 사내들이 흥분하여 외쳤으나, 아무개는 일절 호응하지 않았고 두령도 본체만체했다. 두령과 도적 떼는 오로지 아무개의 대답만 기다렸다.
“······꺼져.”
아무개는 시큰둥한 얼굴로 돌아섰다. 무력으로 뚫은 길은 도로 되짚어가자 어느 누구도 막아서지 않았다. 이제는 도적들마저 헐레벌떡 자리를 비켜 주었으니.
“얼씨구? 저것들이 아주 지들 맘대로네?”
“웃기지 마. 우리 마을 일은 우리가 결정한다!”
마을 청년들이 아무개의 처분에 반발했다. 사태를 무탈히 정리해 준 건 고마우나, 별개로 도적을 처결할 권한은 그들에게 있다 여긴 탓이다.
물론 아무개는 누가 뭐라 짖든 무시했다.
“······에잇!”
그때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후퇴하던 도적들에게 누군가 돌을 던진 것이다.
퍼억! 돌 맞은 도적이 눈을 부라리며 돌아봤다. 그러나 분한 듯 노려보기만 할 뿐 이를 악다물며 다친 동료를 어깨동무로 받쳐 주었다. 하나둘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돌이 차츰 늘어났다. 도적들은 대응 않고 서둘러 피하려 했다.
상황이 반전되자 마을 청년들은 편히 돌을 던져 댔다. 투호놀이 하듯 목표를 조준해 맞추기라도 하면 낄낄대며 추켜세웠다.
개중 하나가 도적이 흘린 도끼를 주웠다. 잠시 망설이던 청년은 주변의 부추김에 덩달아 휩쓸려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팔을 한껏 젖히고 도적 떼를 향해 던지려던 찰나,
아무개가 발을 걸었다.
“흐억!?”
청년이 걸려 넘어지고 도끼가 바닥을 굴렀다. 킬킬 웃으며 어서 던지라 종용하던 작자들이 제 한 몸 상할까 부리나케 뒷걸음질 쳐 피했다. 넘어진 청년 주위가 일시적이나마 텅 비었다.
“이, 이 무슨 짓입니까? 가만히 있던 사람을 어찌 넘어트리는 게요!”
“······가만히··· 있었다?”
아무개가 팔짱을 낀 채 도끼를 빤히 보자 넘어진 청년의 낯이 붉어졌다.
“뭐, 그게 어떻단 겁니까? 나쁜 도적놈들 혼쭐내려던 건데!”
청년이 외치자 주변에서 부추기던 놈들이 옳소, 하고 맞장구쳤다.
“거, 그쪽도 도적놈들이 몹쓸 짓을 해서 내쫓았잖습니까? 우린 같은 편이라고요!”
그 순간. 줄곧 무심한 듯 덤덤하던 아무개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음울한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아무개가 낮게 뇌까렸다.
“누가··· 너희 편이야.”
심히 불쾌했다. 일순 통제가 어긋날 만큼.
미세하나마 흉신의 기운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영문 모를 공포에 휩싸였다. 이성적으로는 판단할 길 없는, 본능적인 섬뜩함.
낭패였다. 실수를 자각한 아무개가 서둘러 기운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군중의 시선은 달라졌다.
그들을 도와준 고마운 존재에서, 꺼림칙한 무언가로.
“······나는··· 술사님 편이야.”
물론 아무개는 저들의 심경이 어찌 되든 관심 없었다. 단지 사실을 정정해 줄 뿐.
“참, 유랑술사님이랑 같이 계셨죠?”
무거워진 분위기의 변화를 꾀하듯, 가짜신령이 아는 체했다.
“저도 참. 식견이 부족해서 한참 후에야 절 도와주신 은인이 사대귀인 유랑술사님인 걸 알았지 뭐예요? 술사님이 이 자리에 계셨어도 도적을 몰아내고 저희를 도와주셨을 텐데. 굳이 니 편 내 편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가짜신령이 어색하게 웃으며 해맑게 가장한 음색으로 말하자 다른 이들도 점차 동조했다.
“맞아. 얼마 전에 술사 나리께서 돌아오셨다지?”
“이김에 술사님께 부탁드려서 도적놈들 산채까지 싹 토벌해 버리자!”
이것들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아무개는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꼈다. 술사라면 당연히 부탁을 들어주리라 전제하는 모양새가 무척 아니꼬웠다.
“어찌 이리들 생각이 짧은 게냐!”
그때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일갈했다.
“본디 술사란 세속의 홍진에 관여치 않음이다. 허튼소리로 그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아라!”
“저희도 술사의 규율은 압니다. 하지만, 어르신. 유랑술사께선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 근방에 걸음 하실 때마다 농사일도 봐주시잖아요.”
청년들이 반박하자 나이 지긋한 노인이 거칠한 숨을 토해 냈다.
“좋다. 술사 나리께 고한다 치자. 대관절 무어라 말씀드릴 셈이냐?”
“마을을 약탈하는 도적 떼를 없애 달라고···.”
“그들이 친히 곳간 문을 열고 약탈한 적 있더냐? 아니지! 마을을 가만두는 대신 쌀과 면포를 주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노인이 타일렀으나 이는 되려 분노만 일으켰다.
“우리가 피땀 흘려 가꾼 쌀과 면포를 왜 내줘야 합니까? 도적놈한테 조공이라도 바치는 겁니까!”
“애초에 놈들 버릇을 잘못 들여놨습니다. 진작에 모다 박살 내 놨어야 했는데!”
청년들은 멀찌감치 떠난 도적 떼 뒤꽁무니를 노려보며 분을 터트렸다. 노인이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그네들이라고 날 때부터 도적이었을 성싶으냐?”
젊은 청년들과 달리 중장년층은 노인에게 공감했다.
“고향을 잃고 떠돌던 치들이 우리 마을에 정착하려 했을 때. 쌀을 내어줄 테니 들어오지 말라 했다.”
“잘하셨군요. 한정된 땅에서 나는 쌀이라 봤자 고만고만하잖습니까? 수확은 고대론데 먹을 입만 늘어나서야 힘들죠. 무작정 내쫓지 않고 식량도 챙겨 주셨으니 그만하면 할 도리 다 했습니다. 계속 베풀어 줬더니 염치가 없어진 게지요!”
“본디 이 고을은 술사 나리께서 다환 전역의 오갈 곳 없는 신세를 하나둘 데려오며 생겼다. 우리는 예서 살고 싶다는 자들을 막을 명분이 없어.”
“까마득한 옛날옛적에 그랬습죠. 언제 적 일로 여지껏 발목 잡혀야 하는 겁니까?”
“옛날 옛적이라. 바로 며칠 전에도 술사 나리께서 누굴 데려오지 않았던가?”
성을 내던 청년이 멈칫했다. 무수한 시선이 가짜신령을 향했고, 녀석이 어깨를 움츠렸다. 청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술사님께서 친히 이방인을 들인 건 참으로 간만이지 않습니까. 몇 해에 두엇, 기껏해야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데려오는데. 수십 수백에 달하는 부랑자 떼가 정착하는 것과 비교할 거리는 아니지요!”
“내게는 소리쳐도 된다. 한데 술사 나리께도 그리 말씀드릴 셈이냐? 실은 우리 고을에 정착하려던 무리를 거부해 왔다고? 전에 쫓아냈던 치들이 도적으로 화했으니 토벌하는 데 도와 달라고?”
“······.”
“나리께서 무어라 답해줄 성싶으냐?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떠오르는 바가 있다만.”
아무개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술사님이 이러한 곡절을 듣는다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자들을 부러 막지는 않을 터였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손으로 일군 논밭인데 어찌 도적놈들 몫을 챙겨야 하는지, 어째서 우리와 별 상관도 없는 술사님 심기를 살펴야 하는지!”
“마을 사정이 어찌 나리와 상관없단 게냐? 내 정녕 예서 우리 마을의 기원과 발전, 게서 술사 나리가 기여한 바를 구구절절 떠들어야겠느냐!”
점차 언성이 높아지자 상황을 주시하던 한 중년 여인이 나섰다.
“우리 마을이 여타 고을보다 세간살이가 넉넉한 까닭은 모다 술사님 덕이란다. 한데 그분께선 이 땅에 누가 살든 개의치 않으시지. 우리도, 부랑자들이 모인 도적 떼도. 그분께는 똑같은 비술사에 인민일 뿐이니 말이다.”
“······.”
“먹을 입이 늘어날까, 이방인의 정착을 거부하고 우리끼리 잘살려는 건 이기심이지. 물론 이기심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리 운을 뗀 여인이 씁쓸히 덧붙였다.
“적어도 술사님 앞에서는 떳떳할 수 없지. 여전히 그분의 선의에 기대어 사는 우리가 어찌 그러겠니.”
지팡이 쥔 노인이 여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금 나섰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가 창창한 젊은이를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변했으니 새로운 논의가 필요할 터. 하여 이번 차례를 너희에게 맡겼다만, 무턱대고 도적놈들 씨나 말리자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나 할 줄은 몰랐다.”
그즈음 아무개는 발길을 돌렸다. 술사님 이야기가 나오길래 좀 더 들어 봤을 뿐. 마을 운영에는 한 톨 관심 없으니.
아무개가 나오자 바현이 마중하듯 쫄래쫄래 나섰다. 한데 어쩐지 녀석의 표정이 이상했다. 흥칫핏 거리며 불퉁한 낯으로 내리 투덜대던 놈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게 아닌가.
“형님!”
심지어 형님이란다.
이놈이 그새 뭘 잘못 먹었나. 아무개가 미심쩍게 내려다봤으나, 바현은 아랑곳 않았다.
“형님, 진짜 멋있다. 혈혈단신으로 도적 떼를 몰아내다니!”
아. 그래서 태도가 변했나.
“심지어 무기 든 적을 맨손으로 격파했어!”
잔뜩 흥분한 바현이 두 주먹을 꼭 쥐고 흔들어 댔다.
아무개는 바닥에 놓아둔 장거리를 들고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쪼그만 녀석은 쉴새 없이 종알댔다. 소란을 썩 좋아하지 않는 아무개의 미간이 점차 구겨졌다.
“······폭력이··· 멋있어?”
“그럼! 완전 멋있어! 법이 망한 세상에선 주먹이 전부잖아?”
당찬 주장에 일순 아무개는 할 말을 잃었다. 하나 곧 정신을 차리고 바현이 잊은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 주먹에······ 너도··· 당했잖아.”
“참, 그랬지?”
형님이 저자도에 오자마자 우리를 묵사발로 만들어 놨었지. 바현이 종알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맞을 땐 영 별로던데. 남이 맞으니까 흥미진진하더라고? 역시 내가 하면 연정, 남이 하면 불륜인가 봐.”
“······.”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 절대로 꼬맹이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