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무개는 가짜신령이 든 쇠스랑을 힐끔 곁눈질했다.
“······도적?”
“네! 어서 막으러 가야 합니다!”
그러고는 서둘러 달려가 버렸다.
아무개는 선착장과 가짜신령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아무개는 이내 가짜신령이 내달린 길목을 따라갔다.
“어디 가? 도적놈들 구경하게?”
바현이 아무개를 쫄래쫄래 뒤따랐다. 한데 말하는 모양새가 기묘했다.
“구경···이라고?”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이랑 싸움 구경이라잖아. 상대가 도적 떼면 더 재밌겠지?”
열 살도 못 된 꼬마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바현을 슥 훑어본 아무개는 생각을 고쳤다. 어쩌면 이 녀석, 겉모습과 달리 나이가 상당할지도 모르겠다. 신령에게 외견은 무의미하니. ······나보다 연상이려나?
강변을 거슬러 오르자 두 무리로 갈라진 인파가 나타났다. 곡괭이와 삽 따위를 든 마을 주민과 도적이었다.
“말로 할 때 들으면 서로서로 좋잖아, 엉?”
“다 알 만한 사람끼리 왜들 이러쇼?”
“잘 사는 동네가 베풀 줄도 알아야지. 세상 혼자 사는감?”
덩치 크고 인상 험악한 도적들이 침을 퉤 뱉으며 위협했다. 시비가 걸려 오자 젊은 주민들이 반발했다.
“우리가 당신네들 소작농이여? 뭐 땜시 피땀 흘려 일군 알곡을 댁들한테 냉큼 갖다 받쳐야 한단 말여?”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 줄 아는구먼! 그간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는 게다, 이 도적놈들아. 썩 물러가라!”
언성을 높이는 젊은이들 가운데 가짜신령이 끼어 있었다. 마을 사정도 잘 모르는 신참이 분위기에 휩쓸려 얼결에 쇠스랑을 흔들어 댔다.
저런 멍청이가 있나.
비실비실하니 유약한 몸으로 눈치도 없이 맨 앞 열에 가서는, 저따위로 눈에 띄게 굴면 어쩌자는 건지. 그야말로 날 잡아 잡수- 하는 꼴이다. 표적이 되고 싶어 환장했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어른들 얘기하시는 데 감히 끼어들어?”
“보자보자 하니 요것들이 참말로 손맛을 보고 싶은 게냐?!”
도적들이 으름장을 놓았으나, 마을 청년들은 한술 더 떴다.
“해 봐! 말로만 떠들지 말고 진짜 해 보라고!”
“입만 나불거리는데 지레 쫄아 가지고는, 있는 거 없는 거 싹 모아 대령하던 늙은이랑 같은 취급하지 마라!”
“망할 잡것들이. 누굴 호구 취급하고 털어먹으려 들어? 네놈들 수작질이 언제까지 통할 것 같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하던 청년 하나가 돌을 집어 던졌다. 이를 계기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둑이 무너지듯, 성난 도적 떼가 와아악! 괴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그럴듯한 기술이나 병기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로 쪽수와 덩치만 믿고 부대끼는 개싸움. 그 난장판에 휩쓸린 가짜신령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개는 한숨을 쉬었다.
놈이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저래 봬도 술사님이 주워 왔으니까. 혹 흠집이라도 나면 술사님이 좋아하진 않겠지.
어느새 팔짱을 푼 아무개는 우전에서 사 온 사과를 손에 쥐고 던졌다 받길 거듭했다. 도적놈이 하나가 가짜신령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던 찰나, 손안에 착 감긴 사과를 투척했다. 퍼억! 도적의 이마에 정통으로 부딪힌 사과가 산산이 조각나며 달콤한 과육을 흩뿌렸다.
일순 소란이 멎었다.
“······커헉!”
주먹만 한 과실에 된통 얻어맞은 도적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졌다. 얼굴에 과즙을 뚝뚝 흘리며 쓰러지는 그를 주위에서 잡아 주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범인을 찾아 헤맸다.
“누구냐!”
“웬 놈이 비겁하게 수작질이야! 당장 튀어나오지 못해?!”
“걸리기만 해 봐라. 다시는 사과를 씹지도 못하게 이를 뽑아 버리겠어!”
도적들이 살벌하게 협박했으나, 아무개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장거리를 내려놓았다.
“······이거··· 지키고 있어···.”
장거리를 바현에게 맡긴 후. 아무개는 제 발로 걸어 나갔다. 아무개가 향하는 곳마다 북적이던 인파가 썰물인 양 길을 내주었다.
덕분에 최전선까지 수월하게 도착한 아무개는 멍하니 넋 놓고 있는 가짜신령에게서 쇠스랑을 갈취했다.
“···나가.”
“네, 네?”
“······여기서 나가라고···.”
“그, 하지만···.”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던 가짜신령은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는 주변의 압박에 짓눌려 어깨를 떨궜다. 가짜신령이 자발적으로 예까지 온 게 아님은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놓는다고, 이 같은 무력시위에서 한 명이라도 꽁무니를 빼려 들면, 자칫 전체의 기강을 흐트러트릴 수 있다. 주동자가 암묵적으로 참여를 강제하는 분위기를 조성했겠지.
뭐, 상관없다. 벗어날 빌미만 제공해 주면 쉬이 해결될 테니.
“너도······ 사과로··· 처맞아야, 꺼질래?”
가령, 폭력을 동반한 타인의 강요라든가.
“······! 네놈이구나! 네놈이 숨어서 공격했어!”
“비겁한 놈.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줄 알아라!”
도적들이 광분하며 달려들었다.
아무개는 가짜신령의 멱살을 잡고 냅다 던졌다. 허공으로 붕 떠오른 가짜신령이 군중 속으로 떨어졌다. 사람을 베개인 양 휙휙 내던지는 꼴에 주민들이 경악했다.
도적들은 각자 몽둥이와 도끼, 칼을 들고 휘둘렀다. 이에 맞서듯 아무개는 쇠스랑을 횡으로 그었다. 동시에 손목을 회전시켜 각을 바꾸자 쇠스랑의 뾰족한 괭이 사이로 몽둥이, 도끼, 칼이 차례차례 걸려들었다.
미끼 문 고기를 낚싯대로 건져 올리는 강태공과 달리, 아무개는 흉기를 낚은 쇠스랑을 아래로 내리쳤다. 콰득⎯ 쇠스랑의 갈퀴 같은 날이 병기와 함께 지면 깊숙이 박혀 들었다.
따라서 무기를 쥔 도적들도 덩달아 기우뚱 고꾸라졌다. 세 도적이 쇠스랑을 두고 부채꼴처럼 철푸덕 엎어졌다.
“······⎯!”
일 대 삼의 대치. 그러나 하나가 셋을 압도했다.
아무개는 권태로운 얼굴로 도적 떼를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더 할 거야?”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자 도적 두령은 고뇌에 빠졌다.
지금 꼴사납게 물러났다간, 권위를 잃게 된다. 단지 마을 하나를 포기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혹 소문이라도 번지거든, 그간 숨죽이던 것들마저 들고일어날 테니. 아니 될 말이지.
하나 실상 오합지졸인 그네들과 달리 아무개는 무예를 익힌 고단자임이 틀림없으렷다. 계속 맞섰다간 크게 다칠 게 뻔했다.
두령은 쇠스랑에 한 발을 걸친 채 삐딱하게 선 아무개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듯 뻗은 세 놈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모두 잘 들어! 다 함께 저놈부터 처리한다!”
일신의 무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개인은 집단을 이길 수 없다.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된다.
“우아아아!”
“가자! 쓰러트려!”
떼로 몰려드는 도적들을 둑 아무개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리되나. 하긴, 내가 끼어서 좋게 마무리될 리 없지.
빨리 끝내자.
“커헉···!”
앞장선 놈의 빈틈을 파고들어 명치를 가격한 아무개는 무너지는 거구의 측면을 미끄러지듯 기민하게 스쳐 가며 도적 무리를 파고들었다.
투박한 나무 몽둥이부터 묵직한 철퇴까지. 도적들이 긁어모은 무기는 통일성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중구난방이었다.
아무개는 다가오는 손목을 후려쳐 몽둥이를 강탈하고 무딘 손잡이로 턱을 쳐올렸다. 눈을 까뒤집고 넘어지는 몸을 걷어차 지척의 도적에게 떠넘긴 후. 몽둥이를 세워 정면에서 덤벼드는 놈의 북부를 깊이 찍었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도적이 꺽꺽대며 속을 게워 냈다.
아무래도 등을 토닥여 줘야 할 듯싶은데. 더러워서 손을 쓰긴 싫었다. 대신 발로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겸사겸사 발판으로도 쓰고.
불쑥 시야 언저리에서 빛이 번쩍, 반사됐다. 기다렸다는 듯 검이 날아들자 아무개는 몽둥이로 막아 냈다.
검을 쓰는 법도 모르더니. 관리하는 법은 더더욱 모르는 듯싶었다. 도적이 휘두른 검은 이 빠지고 날이 상해 둔팍한 나무 몽둥이를 베지 못했다.
요령은 모르고 힘으로 밀어붙이니 되려 검신이 몽둥이에 박혀 회수하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혹하여 낑낑대던 도적은 아무개의 뒤차기에 얻어맞고 쓰러졌다.
도적이 갖은 애를 써도 빼내지 못한 검을 아무개는 손쉽게 뽑아 들었다. 보지도 않고 좌상단을 향해 대뜸 내던지자 곧게 날아간 검이 붕붕 파공성을 울리며 회전하던 철퇴의 사슬 틈에 정확히 걸렸다. 묵직한 추가 엉뚱한 궤도로 고꾸라졌다.
아무개는 다양한 무기를 노획했다. 곤봉, 채찍, 죽창에 목검까지. 주인 없이 떠돌던 무구들이 아무개의 손에 쥐어지면 대오각성하듯 소생했다. 그는 구분 없이 존재하는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뤘다.
단 한 걸음도 밀리지 않고 순식간에 직진 돌파한 아무개는, 목적한 대상에게 쉽사리 당도했다.
“······더··· 할 거야?”
두령 앞에 선 아무개가 재차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