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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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깬 아무개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러모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꿈이 다음날까지 이어진 것도, 의식이 깃든 육체가 죽지 않고 멀쩡히 산 것도.
밤이 길게 느껴지지 않은 것도.
‘······율해원이라 했지.’
뒤꽁무니에 복슬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환상이 보일 정도로 해맑은 꼬마. 녀석의 앳된 얼굴이 어쩐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누굴 닮은 걸까?
사색에 잠겨 있던 아무개는 뺨을 간지럽히는 감촉에 눈을 떴다. 문가에서 스며든 바람이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칼 몇 오라기를 흐트러트렸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그랬다.
오래된 초가라서일까, 외풍이 상당했다. 특히 문가가 심했는데, 지난밤에는 의식하지 못했다.
「아무개 님은 거기 누우세요. 저는 문가에서 잘게요.」
문지방에 기대어 종이를 접던 술사가 떠올랐다. 설마··· 그 몸으로 외풍을 막았던 걸까.
불현듯. 그가 무진 보고 싶었다.
빈 옆자리로 손을 넣어 보았다. 서늘하게 식은 이부자리는 술사가 떠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짐작게 했다.
아무개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대강 정리하고 술사를 찾아갈 셈이었다. 한데 뜻밖의 광경이 주의를 끌었다.
하룻밤 새 작은 꽃밭이 생겼다.
지난밤 청했던 동백은 물론, 수선화와 노루귀, 해당화, 나팔꽃, 국화까지. 종이로 접은 새하얀 꽃이 종류 불문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가운데 단 한 송이. 붉은 색지로 접은 동백꽃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설원 위에 떨어진 핏방울처럼 홀로 붉디붉은 그것을. 아무개는 한참 들여다보았다.
상당히 지체한 후에야 아무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종이꽃을 모아들었다. 어찌나 많은지 두 손, 두 팔에 가득 담고도 넘쳐 흘렀다. 종이로 만든 꽃밭에서 존재할 리 없는 향을 찾듯, 꽃 더미에 코를 가까이 대 보았다. 다정한 냄새가 났다.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인산인해를 이룬 저잣거리를 거니는 것, 술사가 아닌 다른 이과 동행하는 것. 아무개가 질색하는 것들이 합쳐진 탓이다.
“흥!”
바현이 보란 듯 콧방귀를 뀌었다. 심통 났으니 어서 알아봐 달라는 행색이었으나, 아무개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들 사이에 냉한 기류가 흘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들이 동행하게 된 건 나진의 부탁이 있어서다.
아침 식사 도중 그녀가 아무개에게 말을 꺼냈다. 혹 장을 봐 줄 수 있느냐고.
흉신을 어려워하고 데면데면하게 구는 칠교 남매 중 홀로 덤덤한 나진만이 가능한 청이었다. 모두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아무개는 곧장 수락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저자도에 머물고부터 지금껏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편히 지내지 않았던가. 어지간한 부탁은 들어줄 심산이었다.
본래 아무개는 받는 것도 주는 것도 하지 않는 칼 같은 관계를 선호하지만, 칠교 남매와는 생활 영역이 겹치는 만큼 다소 감내하기로 했다.
한데 나진이 조건을 걸었다. 장을 볼 때 쌍둥이 형제 중 하나를 데려가라는 것이다.
아무개와 바현 사현. 셋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쌍둥이 형제는 죽어도 피하고픈 심부름을 걸고 치열한 가위바위보 승부를 벌였다. 그때 술사가 아무개에게 다가왔다.
「괜찮겠어요?」
그는 내키지 않거든 거절하라 했으나, 오히려 더욱 해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나는 혼자서 장도 못 보는 얼뜨기가 아니라고. 술사님이 여차할 때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흥! 칫! 뿡!”
······혼자는 아니게 됐지만.
가위바위보에서 지고 심부름 담당이 된 후. 바현은 내내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나진의 의중을 모르진 않는다. 좀 더 가까워지라는 뜻이겠지.
칠교 남매와는 과격한 첫 만남 후로 내리 서먹서먹했다. 굳이 절친한 사이가 될 필요는 없다만. 유독 바현 사현 쌍둥이 형제는 기이하리만치 적개심을 불태웠다. 숨길 생각도 없이 아주 노골적인 작태였다. 살의와 적의에 민감한 아무개가 이를 모를 리 없다.
다만 안중에 없을 뿐.
“치사해.”
싸전과 채소전을 거쳐 우전에서 과일을 살 무렵. 아무리 삐진 티를 내도 소용없자 결국 바현이 입을 열었다.
“맨날 술사님이랑 붙어 다니고, 너 때문에 술사님이 우리 보러 오지도 않고, 자꾸 너만 챙겨주고. 이건 편애야!”
양손에 짐을 나눠 든 아무개가 바현을 내려다보았다.
말인즉슨, 내가 술사님을 독차지해서 아니꼽다 이거지?
“헛소리.”
단칼에 잘라 내자 바현은 일순 당황하여 어물거렸다. 아무개가 이어 부연했다.
“술사님은··· 누구에게나 다정해.”
“흥! 부모조차 같은 배에서 난 자식을 평등하게 사랑하지는 못하는데. 술사님이라고 세상 만물에 평등히 다정하겠어?”
우리는 기껏해야 한 해에 두어 번 뵙지만, 그때도 술사님은 늘 초가집에서 따로 지낸단 말이야.
“너처럼 꼭 붙어 다닌 건 지금껏 없었다고! 술사님이 한가한 분도 아닌데. 주인 뫼시는 종복마냥 꼭 붙어서 일일이 수발들어 주는 꼴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민 바현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씩씩 분을 삭였다. 아무개는 꼬마를 한심하게 내려다봤다. 웬 헛소리를 정성껏 하나 했더니.
술사가 아무개의 곁에 머무는 건, 보호하려는 목적이다.
흉신으로부터 너희 민중을 비호하기 위해서란 말이다, 이 녀석아.
“술사님이··· 나만··· 챙겨 주는 것 같아?”
아무개의 물음에 바현이 고개를 팩 치켜들더니 바락바락댔다.
“당연하지! 우리가 저자도에서 산 지 십 년이 넘도록 술사님네 집에 가 본 적 없단 말이야!”
집··· 이 아니라 무덤 관리용 처소라던데.
그곳을 집이라 한다면, 술사는 무덤지기가 되는 셈이다.
“왜 너만 특별 취급인데? 우리랑 뭐가 달라서?!”
특별 취급이라. 진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표현이었으나, 마음에 든다.
아무개는 흡족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흥얼흥얼 콧노래라도 부를 기세이자 바현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상대를 비난했는데 오히려 기분 좋게 만들어 준 꼴이다.
“너어···! 착각하지 마. 우리는 너보다 술사님이랑 훨씬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고!”
바현이 왁왁댔으나 아무개는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세책방을 찾아갔다.
이는 쌍둥이 자매인 다홍 라홍의 부탁으로, 근래 유명한 통속 소설의 다음 권이 발간되었으니 빌려다 달라는 것이었다.
“‘군주가 연모한 황후’ 하편 있어?”
멀끔한 청년이 다소 낯부끄러운 통속 소설을 거리낌 없이 입에 담자 주위 시선에 일제히 쏟아졌다.
“아이고, 이를 어쩝니까. 고것이 하도 인기가 많아서 오늘 아침나절에 벌써 다 빌려가 버렸습니다요.”
책이 없다니. 아무개는 일고의 여지도 없이 돌아섰다. 주인장은 기껏 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아쉬웠는지 연신 말을 붙였다.
“하편을 보시기 전에 상편부터 중편까지 복습하는 건 어떻습니까? 실성한 황제가 황후를 순장하겠다 선언할 때, 칠황자가 반란군을 이끌고 회장에 딱! 나타나서 황후를 낚아채는 부분을 보고 하편을 감상하시면 한층 더 몰입할 수 있는······.”
“어? 여기 술사님 나온다!”
주인장이 뭐라 종알거리든 갈 길 가던 아무개는 바현의 외침에 우뚝 멈춰 섰다.
바현이 펼친 것은 행실도(行實圖)였다.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본받을 만한 일화를 그림과 함께 수록하여 글을 몰라도 쉬이 이해하게끔 만든, 일종의 교육용 서적. 조정에서 통치이념을 전파하는 데 이용하곤 하는 것이었다.
민심을 수습하고 국정을 재정비하는 차원에서 발간한 교재에 유랑술사의 일화가 실린 것이다. 심지어 판본으로 대량 간행해서.
아무개는 새삼 자각했다. 술사의 유명세도, 실존한 전설이나 다름없는 그 자취도.
“어?”
바현의 손에서 행실도를 쏙 빼낸 아무개는 대금을 치렀다. 두꺼운 서책에서 많아 봐야 두어 장 할애했을 유랑술사 항목 때문에 통째 사들인 것이다.
심지어 세 권 샀다. 한 권은 보관용, 한 권은 감상용, 한 권은 자랑용으로.
아무개는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세책방을 나섰다. 하나 들뜬 기분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마을 어귀서부터 분쟁의 조짐이 불거진 탓이다.
어수선한 대기. 불안과 초조, 짜증 등 부정적인 감정이 여실한 이들과 때아닌 농기구를 들고 바삐 이동하는 장정들까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분위기 속, 아무개는 생각했다.
무시할까.
예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관계없잖은가. 마침 장도 다 봤겠다. 못 본 셈 치고 저자도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귀찮은 일에 굳이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개는 결심했다.
못 본 척하자.
다환을 가로지르는 너른 원강(元江)의 물가에는 선착장이 세워져 있었다. 저자도에서 아무개와 칠교 남매가 박살 낸 조그마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규모였다. 아무개가 으르렁거리는 바현을 뒤로 하고 강변으로 빠지려던 때였다.
“어라, 당신은?”
길목에서 아는 체하는 얼굴이 낯익었다. 협곡 마을에서 데려온 소년, 가짜신령이었다.
“이 근방에서 사셨던가요? 와, 같은 동네 주민인데 어찌 그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을까요.”
그야 나는 강 건너 저자도에서 지내니까.
“······너. 여기서··· 살아?”
아무개가 묻자 가짜신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사님께서 저를 이 고을 회당에 맡기셨습니다.”
아무개를 저자도에 내려놓은 후. 술사는 가짜신령을 강변마을에 맡겼다.
듣자 하니 이런 식으로 고을 밖에서 주워 오는 인물이 꽤 있다는 모양이다. 회당에서 머물며 추후 자립할 때까지 일을 배우는 것이다.
“참, 몸은 어떠세요? 절벽에서 떨어지셨잖아요. 괜찮으세요?”
빨리도 물어본다. 그야 당시에는 가짜신령도 혼비백산하여 경황이 없었을 테지만.
아무개는 고개만 대충 설렁거렸다. 이 몸은 협곡에서 추락한 직후 이장 놈 다리몽둥이까지 부러뜨린, 멀쩡하다 못해 심히 건강한 육체였다.
건성으로 까딱이는 아무개의 작태에도 불구하고. 가짜신령은 전심으로 안도했다.
“무사하셔서 참말 다행이에요. 으름장이나 좀 놓을 줄 알았지. 그 높은 데서 정말 떨어트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필이면 그때 뱀이 나와서는···.”
“···뱀?”
「고의는 아니었소이다.」
불현듯 이장이 변명처럼 지껄이던 것이 떠올랐다.
「수면제를 타긴 했으나, 다른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소. 갑자기 뱀이 나와서 너무 놀란 바람에 그만···.」
“예. 갑자기 시커먼 구렁이가 튀어나와서는 대뜸 이장님을 공격했었죠. 쌤통이다만 시의가 부적절했어요. 이장님이 놀라서 붉은 천을 놓쳤는데, 그게 떨어트리라는 신호였다나 봐요.”
아무개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망할 뱀. 이무기는 개뿔. 좋게 봐 줄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지렁이. 술사님께 빌붙은 거머리 자식.
속으로 온갖 상소리를 퍼붓는데 멀찌감치서 누군가 가짜신령을 찾아 불렀다. 한참 주절주절 떠들던 가짜신령이 뒤늦게 아차, 했다.
“예서 지체할 때가 아닙니다. 도적이 쳐들어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