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다시 꿈이 이어졌다.
“그래, 이름이 서(曙)라 했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제 이름이 남의 것인 양 하는 꼬마 안에서 아무개는 눈을 떴다. 아이를 두고 좌우로 길게 선 이들 중 익숙한 낯이 보였다. 화사한 모란꽃을 수놓은 접선의 노인. 지난 꿈에서 절뚝이를 데려간 이였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인데. 아무래도 동일한 꿈이 연속하여 계승된 모양이다.
“화변을 입어 잿더미가 된 섬에 기화요초가 만발하게 하였다, 라··· 진정 네가 한 일이더냐?”
상석에 자리한 이가 하문했다. 절뚝이는 고개 숙인 채 답하였다.
“아마 그러리라 짐작합니다.”
“확실치 않다는 게냐?”
“당시 그 섬에는 저 외에 다른 이가 없었습니다. 또 제가 원하는 때에 시기적절하게 초목이 우거졌습니다만, 저는 술법을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식견이 부족하여 확신을 드릴 수 없습니다.”
상석의 남자가 돌아보자 접선을 쥔 노인이 크흠, 헛기침했다.
“이 몸을 믿으시게나, 종주. 그 능력은 필시 우리 화양 율씨의 것이었네. 내 어찌 확인도 않고 종회를 소집했겠나? 이 몸이 그리 분별없는 사람은 아닐세.”
글쎄. 절뚝이를 데려가고 싶어 몸이 달았던 노인을 기억하는 아무개로선, 썩 분별 있는 자로 뵈지 않았다.
한데 분위기가 묘했다. 절뚝이를 두둔하는 노인은 상석에 떡하니 앉은 종주가 아닌, 그 곁에 선 아름다운 여인의 심기를 더욱 살피는 것이었다.
“여봐라, 어서 가져오거라!”
노인의 명에 대기하던 종복이 내전으로 들어왔다. 종복은 자그마한 화분을 절뚝이 앞에 내려놓은 후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우리 가문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토양과 종자다.”
노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화분에는 초목의 생장을 촉진하는 술식이 새겨져 있다. 화분에 영력을 부여하면, 술식이 흙 속의 씨앗을 발아하게끔 하지. 씨앗의 생육 정도에 따라 술자의 재주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제 막 술법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소질을 알아보고자 할 때 쓴단다.”
차르륵, 접선이 반원을 그리며 펼쳐졌다.
“화양 율씨는 화왕 모란께서 은총을 내려 주신 선택받은 일족이니라. 서야, 화분을 들거라. 네게 우리 가문의 선혈이 흐른다면, 능히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울 수 있을 게다.”
노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지독한 선민의식이 배어 나왔다.
“어서 들어 보거라.”
노인의 재촉에 절뚝이가 두 손으로 화분을 집어 들었다.
아무개는 생각했다. 만약 이 꼬마가 진정으로 잿더미가 된 섬에 녹음의 기적을 가져온 당사자라면···
여기 잘난 듯 모인 율씨 놈들 죄다 이 꼬맹이 발밑에 있지 않나?
“······⎯?!”
거뭇한 흙 위로 파릇한 떡잎이 돋더니 줄기가 자라났다. 아이의 출신을 미심쩍어하던 불온한 시선들이 일순 휘둥그레졌다.
줄기는 성장을 거듭하여 삽시간 묘목이 되었다. 생장하는 뿌리의 기세를 견디지 못한 화분이 터지듯 깨져 버렸다. 아이의 손에서 벗어난 묘목이 곤두박질쳐 마룻바닥을 나뒹굴었다.
쥐죽은 듯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허, 참.”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 이를 신호로 장내가 한껏 어수선해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군요. 이 아이는 우리 문중의 혈육이 틀림없습니다.”
“나 원, 종자(宗子)도 백 년 만에 나온 천재라 명성이 자자했거늘. 이건 뭐 비교가 무의미한 경지로군.”
논란이 종식되자 절뚝이를 데려온 노인이 기고만장하여 접선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거보게! 내가 뭐라 했나? 이 아이는 필시 우리 가문을 한층 빛낼,”
“아이의 부모는 아십니까?”
젠체하는 노인을 가로막은 이는 종주의 곁에 선 미인이었다. 종회에 자리한 술사들이 종주보다도 예의주시하던.
“어미는 노비라던데, 아비는 아이도 모른다 하더이다.”
“하면 아비가 화양 율씨겠군요.”
우미한 자태로 단상을 내려선 여인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꼬마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라.”
아이와 시선을 마주한 여인의 낯은 주름 하나 없이 아름다웠으나 지독히도 냉막한 얼굴이었다.
“네 어미의 함자를 아느냐.”
“미옥이라 합니다.”
그 순간. 아무개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보았다.
미옥이 뉘인지 통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자들과 대번에 아연실색하는 이들. 후자의 무리 중에는 상석에 앉은 종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들 봐라.
아무개는 어렴풋하게나마 감을 잡았다. 이놈들, 아무래도 켕기는 구석이 있나 본데.
“종주님.”
여인의 부름에 반쯤 몸을 일으킨 종주가 무어라 입을 열고자 했다. 하나 여인이 먼저였다.
“미옥이라는 노비를 아십니까.”
“······부인, 그 계집은···.”
여인은 종주의 본부인이었다. 오대세가 화양 율씨의 안주인.
“아시는 모양이군요.”
본부인은 백토로 빚어 빙고에 얼린 듯 표정 변화 없이 서늘했다.
“이름이 서(曙)라 했느냐? 잘됐구나, 서야. 네 아비를 찾았다.”
접선을 말아 쥔 노인의 손에 힘줄이 우뚝 섰다. 희대의 재능을 발굴해 낸 공적이 탐나 일가친척 모두 모인 종회에서 아이를 소개했건만. 하필이면···
“십중팔구 저기 상석에 계시는 종주 나리께서 네 부친일 게다. 저분이 뿌린 씨앗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민들레 홀씨보다 가벼우니 대관절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통 짐작을 할 수가 없구나. 이제는 썩 놀랍지도 않아.”
“······부인!”
“네 재능에 감사하거라. 덕분에 별 탈 없이 호적에 오를 수 있을 터이니.”
부인은 종주의 부름을 들은 척도 않았다. 서릿발처럼 싸늘한 시선이 아이를 향했다.
“네 향렬의 돌림자는 해. 오늘부로 네 이름은 율해서다.”
일방적인 선언을 끝으로 부인은 대전을 벗어났다. 남편이 다른 배에서 낳은 아이를 조우하고도 그 걸음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했다.
순식간에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종주는 성을 내며 절뚝이를, 율해서를 외면했고 다른 이들도 모른 척 바쁜 체하며 떠나 버렸다. 심지어 해서를 데려온 노인마저도.
졸지에 애물단지가 된 율해서를 종복이 수거해 갔다.
어느 외딴 전각에 모셔진 율해서는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아이의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율해서는 손을 빗처럼 써서 머리칼을 묶었다. 짧은 머리칼이 새의 꽁무니 깃처럼 간신히 죄었다.
참으로 극적인 삶이다. 아무개는 곰곰이 셈해 보았다.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꼬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살던 곳마저 화재로 불타 버린 후 조우한 노인. 사실 너는 귀한 집 아이란다, 하고 유괴범처럼 지껄였으나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심지어 부친이 화양 율씨 종주라니. 어린 나이에 인생 굴곡이 비 내린 산길보다 더했다.
“······할 말이 있거든 나와서 하시죠.”
율해서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그 육신에 갇혀 기감을 공유한 아무개는 진즉 알고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기웃거리던 작은 기척을.
“엇, 그럴까요?”
담벼락 뒤로 꼬마 아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율해원이에요!”
율해원은 어린 나이에도 선명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니 곱상한 녀석이었다. 아이 특유의 동글동글한 인상이 아무개의 눈에도 퍽 귀여웠다.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걸 엿들었는데, 아버지가 종주님이라면서요?”
“그런 모양입니다. 저도 방금 알았지만.”
율해원이 반색을 하며 맑게 웃었다.
“실은 저희 아버지도 종주님이거든요! 그럼 제 형님이시죠?”
······이 꼬마는 뭐지?
아무개는 당혹했다. 대체 어떤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복형제를 그리 기쁜 얼굴로 반긴단 말인가.
율해서도 아무개와 같은 심정인 듯 침묵했다. 눈치 없는 율해원은 신이 나서 총총 뛰어 댔다.
“저는 옛날부터 형님이 갖고 싶었어요! 어머니께 부탁드렸지만, 동생이라면 모를까 형님은 안 된다 하셨거든요. 너무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찔끔 났는데 갑자기 형님이 생겼어요! 선물처럼!”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이리 좋아하는 걸까.
어린아이의 해맑음이란 실로 감탄스러웠다. 율해서의 눈길이 율해원의 얼굴을 맴돌았다.
“혹 본부인 마님 소생이십니까?”
“네, 저희 어머니가 종부(宗婦)세요!”
심지어 종자(宗子)란다. 본부인 소생이 얼자 따위에게 밀릴 리 없으니. 녀석 입장에선 크게 신경 쓸 까닭이 없으리라.
율해원 이 꼬마가 복잡한 권력 구조를 인지하고 살갑게 대하는 건 아니겠지. 하나 율해서는 내심 계산을 끝마쳤으리라. 서로 위치를 분명히 한 후에야 희미하게나마 미소 비슷한 걸 지었으니.
“도련님이시네요.”
“예? 도련님이라뇨. 아우님이라 부르셔야죠!”
“제게는 도련님이 맞습니다.”
“아, 아닌데···? 아우님인데···?”
고대하던 형님이 생겨서 기뻐하던 율해원은, 정작 그 형님이 명확히 선을 긋자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시무룩해진 율해원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에 짓씹힌 오른손 엄지가 엉망인 것이 하루 이틀 버릇이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율해서는 얄짤없었다.
“저는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왜요?”
“저희 어머니께서 노비니까요.”
“······?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술사가 되면 출신은 중요하지 않아요.”
“술사란 실력을 우선하여 신분의 귀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들었습니다만, 그래 봤자지요. 얼자가 종자와 호형호제할 수는 없습니다.”
율해원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어깨를 떨구었다. 서운한 티를 마구 내는 모양새에 율해서가 한숨을 삼켰다.
“······그건 제 사정이니 도련님은 원하는 대로 부르세요. 형님이든, 비천한 놈이든, 본명이든. 개의치 않겠습니다.”
“형님!”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복형제는 서로를 형님과 도련님이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