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일각이 여삼추로 오매불망 서방님을 그리던 부인은 거들떠보지 않고. 애달픈 손길로 토벽만 어루만지시니···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한 소첩이 벽을 허물어 버릴까 염려되옵니다.”
이게 말이냐 소냐.
아연하여 자괴감마저 증발해 버린 아무개가 부인, 아니 술사를 돌아보았다. 실색한 아무개와 달리 그의 낯은 지극히 태연했다.
“자, 아무개 님은 거기 누우세요. 저는 문가에서 잘게요.”
그는 언성을 높이지도,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한데도 아무개는 묘하게 압도되어서는, 얌전히 베개를 베고 누웠다.
막상 자리를 잡았으나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라 눈이 말똥말똥했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조금 서늘한 듯도 싶어서 아무개는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직 온돌을 덥힐 계절은 아니었으나, 강에서 불어 드는 바람이 제법인 탓이다.
이불 속에 파묻힌 아무개는 모로 누운 채 눈만 빼꼼 내밀어보았다. 술사는 문설주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의 턱선에 주홍빛 음영이 깊게 맺혔다.
어째 목이 타는 듯해서. 아무개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료한 듯 턱을 괴고 검지를 세워 톡, 톡, 두드리던 술사가 불쑥 서안을 뒤적였다. 붓과 먹, 벼루를 제쳐 두고 그가 택한 것은 종이였다.
술사는 하얀 종이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접었다. 평평한 종이가 차츰 입체적인 형상을 띠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거미?”
오밤중에 느닷없이 종이를 접어 만든 거미라니. 참으로 생뚱맞지 않은가. 무어, 그럴싸하게 잘 만들긴 했지만.
“여기 오면 거미가 생각나서요.”
자칭 종이접기의 고수라던 술사는 특별히 신청도 받아 주겠다며 농담조로 말했다. 아무개는 사양 않고 덥석 매달렸다.
“꽃··· 만들 수 있어?”
“무슨 꽃을 원하시나요?”
“······동백.”
술사는 즉시 새 종이를 꺼내 모양을 잡았다. 둥글게 말린 꽃잎 안에 수술이 옹기종기 모인 소담한 한 송이가 아무개의 베개맡에 살포시 놓였다.
“주문하신 꽃 나왔습니다.”
점원인 양 하는 말에 웃음기가 스몄다. 아무개는 하얀 종이로 만들어 낸 동백꽃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술사님··· 손재주 좋구나.”
실물을 보지도 않고 이리 정교하게 구현하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하하. 나쁜 편은 아니죠. 꽃 종류는 어지간해선 다 만들 수 있어요.”
종이 거미의 다리를 쥐고 문지르자 거미의 몸통이 휙휙 돌아갔다. 술사의 손장난에 놀아나는 종이 거미는 제법 힘겨워 보였다.
“거미랑··· 무슨 일 있었어?”
아무개의 물음에 술사가 피식 웃었다.
“어릴 적에 거미가 방에 들어온 적 있어요.”
새 종이를 꺼내 든 술사가 그 위에 거미를 올렸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종이로 들어 밖에 보내 주셨죠.”
뒷이야기를 기다리던 아무개는 이어진 정적에 고개를 기우뚱 들었다.
“······끝이야?”
“네에. 끝이에요.”
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 올 때마다 매번 떠올릴 만큼 강렬한 경험은 아니지 않나. 아무개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자 술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별거 없죠? 한데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나더라고요. ······아마 제가 종이를 주로 쓴 것도, 그 날의 영향이겠죠.”
사대귀인 유랑술사를 대표하는 삿갓과 백지 부적. 그중 하나는 이렇듯 사소한 일상에서 비롯되었다.
“그 거미. 무척 작았어요. 보리 한 톨만도 못하던가. 그에 반해 어머니나 저는 너무 커서, 무심코 손에 힘을 줬다간 뭉개져 버렸겠죠?”
술사는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얇고, 쉬이 접히고 구겨지고. 이런 약한 종이를 써야 자칫 실수하더라도 죽이지는 않겠더라고요.”
언뜻 모자간에 가벼운 일상을 얘기한 듯싶으나,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유랑술사는 백지 부적을 일상처럼 사용하니까.
지금이야 비축해 둔 부적이 소진되었다지만, 본디 그랬다. 함장군 댁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무개를 내려치던 몽둥이를 막아 낸 것도, 운해의 땅굴에서 추락하는 일행을 보호한 것도, 심지어 장거리 축지로 멀미하던 재효의 등을 두드려 준 것조차 부적이었다. 술사는 일상의 모든 행위를 부적으로 해결했다.
작고 연약한 거미는 인간의 거대함을 감당할 수 없어 종이로 대신한다.
이 논리를 술사의 행적에 대입해 보면, 한층 기이해진다.
마치 그 자신이 너무도 거대해서. 이 세상이 그를 감당하기엔 너무나 작고 연약하다는 것 같지 않은가.
제 해석이 과대망상이나 다를 바 없음을 안다. 한데도 불현듯, 그런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불 끌까요?”
으응, 하고 아무개가 답하자 등잔불이 꺼졌다. 한순간 암흑이 시야를 뒤덮었다.
이불 스치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척에 술사가 눕자 묘한 긴장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술사님······ 내일도 공방에 가?”
“네에. 밀린 주문서를 모두 처리할 때까진 공방에서 살다시피 할 거예요. 아무개 님은 어쩌실래요?”
“······나?”
“하루 종일 공방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지루하잖아요? 따로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리하세요. 사당에서 쉬셔도 좋고, 섬 밖으로 나가보는 것도 좋겠지요. 저자도는 풍경 외에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어 심심하니까요.”
“···나는··· 딱히······.”
어째서 그와 함께 있는데 지루하리라 여기는지 모르겠다. 술사는 그 자신이 아무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
나는 술사님만 있으면 돼.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으나, 혹 부담스러워할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아무개는 우물쭈물 부연했다.
“별로··· 심심하지 않아. 여기도······ 좋아. 사람도 없고.”
“이 섬이 마음에 들어요?”
“으응···.”
“다행이네요.”
술사가 몸을 돌렸다. 팔베개를 베고 모로 누운 그가 아무개를 마주 보았다.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했거든요.”
“······내가? 여길?”
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데 술사가 삿갓을 얼굴 위로 비스듬히 걸치며 말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실은 당황했어요. 아무개 님이 거부당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는 저자도에 온 첫날을 거론했다. 짐승으로 화한 칠교 남매가 다짜고짜 덤벼들었던 때를.
“제가 가장 안전하다 여긴 곳에서. 당신을 해하려는 시도가 있으리라곤 미처 예상 못 했어요.”
술사는 아무개를 저자도에 내려놓은 후 가짜신령을 옮기러 갔다. 아무개를 혼자 둬도 괜찮으리라 예단할 만큼, 이 섬은 그에게 더없이 평온한 공간이었다.
하나 그 짧은 틈에 아무개는 공격당했다.
“······칠교 남매는··· 수호령이라며? 흉신을 막는 건··· 당연하지.”
“당연한가요?”
술사와 함께한 이래 문전에서 쫓겨나듯 내몰린 것만 벌써 세 번째다. 해운 하씨 종가와 주단의 장승, 저자도의 칠교 남매까지.
“저는 슬슬 거슬리는데요.”
아예 엎드린 술사가 턱을 괴고 삿갓을 깊이 눌러썼다. 아무개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매번 거부당해서인지, 그걸 당연시하는 태도 탓인지 모르지만··· 거슬려요. 상당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술사님이 거슬린다고?
나 때문에?
어디 좀 가 볼라치면 매번 입구서부터 거절당했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언짢을 테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은가. 아무개가 거부당하는 까닭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성정 탓이니.
흉신이 되고자 택한 게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이리 생겨 먹었더랬다.
하나 억울함과는 별개로 제 존재가 술사에게 번거롭고 성가시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감히 누군들 유랑술사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겠는가. 이게 모다 불길한 흉신 탓이렷다.
해서 곁에 머무르는 것만도 족하다 여겨 왔건만. 이제는··· 그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걸까.
갑작스레 닥쳐온 공포가 폐부를 짓눌렀다. 내 탓이 아니라 항변하고픈데. 가슴께가 답답하고 목구멍이 먹먹하여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아무개가 애꿎은 베갯잇만 움켜쥐던 찰나.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턴 물러서지 않으려고요.”
톡, 술사의 손끝이 삿갓 언저리를 가볍게 튕겼다.
“앞으로는 누가 막아서든, 개의치 말고 아무개 님 마음대로 가세요.”
아무개를 향해 고개를 기울인 술사가 입가를 엷게 휘었다.
“원하는 곳 어디든. 당신께서 가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다다를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
“아시다시피 제가 그 방면으로는 재주가 있잖아요?”
그가 일컫는 재주란, 필경 축지술일 터였다. 버려진 사원을 외딴 섬 한복판으로 옮겨 버리는, 신기에 가까운 능력.
“가령 구중궁궐 가장 깊은 심처라도 괜찮아요. 화광대인께서 목숨보다 귀히 여긴다는 창성의 정원도 상관없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