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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76)화 (76/138)

76화

“어때요. 역시 지루하죠?”

저녁 무렵. 공방을 닫은 술사가 물었다. 아무개는 격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는··· 좋아.”

술사와 함께 있는 것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특히나 술사가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전신의 감각이 오직 그를 향한다. 부러 그리하는 게 아니라,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하니 지루할 틈이 어디 있으랴.

아무개는 진심으로 좋았다. 술사는 입바른 소리라 여기는 모양이지만.

술사는 나진과 아무개를 데리고 버려진 사원으로 축지했다. 귀가하고 보니 일주문 그늘 아래 바현과 사현이 흙장난을 치고 있었다. 칠교 남매 중 가장 어린 쌍둥이 형제였다.

“술사님?”

“술사님 왔다아!”

모래 쌓기 놀이하던 형제는 깃발이 무너지든 말든 아랑곳 않고 우르르 달려왔다. 덩실덩실 흥겨운 걸음으로 술사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쌍둥이는 뒤늦게 흉신을 발견했다.

흠칫, 얼어붙은 형제가 후닥닥 나진의 뒤로 숨었다. 술사는 나진의 치맛자락 너머로 눈만 빼꼼 내민 쌍둥이 형제에게 살갑게 웃어 주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시나요?”

“선착장을 수리하고 있을 겁니다. 술사님이 계실 적에는 축지술을 쓰면 된다지만, 저희끼리 지낼 땐 배가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쌍둥이 형제 대신 나진이 설명했다. 칠교 남매와 아무개가 한바탕 치고받은 탓에 나루터가 반쯤 무너지다시피 했으니.

이게 다 짐승으로 변모한 칠교 남매가 체구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들이박아서 그런 거라고. 아무개는 남 탓으로 돌렸다. 무어, 사실이잖은가. 자신이 망가뜨린 거라 해봐야 노 두어 개뿐. 떳떳지 못할 까닭이 없다.

한데 어째서일까, 아무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자부하면서도 은근히 술사의 눈치를 보았다. 혹 사고는 같이 쳐놓고 수습할 때 쏙 빠지는 얌체로 여겨질까 봐.

“술사님. 오늘 저녁은 저희와 함께 드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귀빈께서도.”

발을 동동 굴리며 나진의 소맷부리를 잡고 늘어지던 쌍둥이는 그녀의 제안에 반색하더니 ‘물론 귀빈께서도’ 하고 덧붙이자 시무룩해졌다.

참 알기 쉬운 녀석들이다. 나진의 제안은 필시 쌍둥이의 등쌀에 못 이겨 나온 것이리라.

“저녁이라. 아무개 님은 어떠세요?”

술사는 아무개 의사부터 확인했다. 어차피 술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잡것들은 없는 셈 치던 아무개인지라 무난히 수락했다.

그리하여 사원에 거주하는 모두가 함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데 원하는 바를 이루었음에도 쌍둥이 형제는 똑 닯은 눈에 나란히 쌍심지를 켰다.

아무개를 챙기는 술사의 행태는 다소 과한 면이 있어, 때때로 상전을 뫼시는가 싶기도 했다. 그 모양새가 쌍둥이 형제에겐 사특한 흉신이 술사님을 머슴처럼 부리는 꼴로 보였던 것이다.

“침구가 부족하신 않으십니까? 가철이 돌아오거든 홍의당으로 가져다드리라 이르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다른 데서 묵을 예정이라서요.”

나진이 의외라는 듯 애체를 추어올렸다.

“홍의당이 탐탁지 않으십니까? 빈 전각은 많으니 내키는 대로 하시지요.”

“하하. 아녜요. 홍의당도 나쁘지 않지만, 모처럼이니 저희 집에 들를까 해서요. 초가에서 자고 올게요.”

“하면 귀빈께선 홍의당에 남아계십니까?”

“아뇨. 저랑 같이 갈 거예요.”

애체의 동그란 유리알 속. 나진의 눈이 전에 없이 휘둥그레졌다. 쌍둥이 형제는 목구멍에 파리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입을 떡 벌렸다.

영 심상찮은 반응이었으나, 아무개는 가뿐히 무시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아무개는 술사와 나란히 산책하듯 거닐었다. 고즈넉한 섬의 정경은 삭막한 흉신의 심상에조차 잔물결을 일으켰다.

아니, 아니지. 아무개는 섬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을 회상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양 불편했던 기억을.

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수려한 경관을 자아낸다. 달라진 것은 함께 걸어가는 이의 유무. 그뿐이건만, 어째서.

바람결에 흐트러진 술사의 너울 자락이 손끝을 스쳤다. 당연한 듯 제 곁에 머무는 그의 기척에 팽팽히 당겨 놓은 심중의 고삐가 한결 느슨해졌다. 경계를 누그러트린 아무개는 지그시 눈을 감고 기감을 한껏 열었다.

“······어?”

조용하다. 이상할 정도로.

기감을 한계까지 펼쳤으나, 칠교 남매 외의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사람이··· 없어?”

“네에. 이 섬은 오랫동안 무인도였어요. 지금도 칠교 남매 외에 다른 주민은 없고요.”

조경이 이토록 훌륭한데 귀족의 별장은 고사하고 객관조차 없다니.

“맘에 드시나요? 아무개 님은 인적 드문 곳을 선호하잖아요.”

인적이 드물다 못해 소멸한 수준이지만, 그래서 더 좋다.

그가 자신을 예까지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아무개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스름한 늦저녁. 술사가 든 초롱불이 어둠 한구석을 밝혔다. 아무개는 그의 등불이 밝히는 빛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다. 두 손으로 품 안의 베개를 꼬옥 그러안은 채.

꿈장수의 베갯잇을 씌운 베개였다.

머지않아 목적지에 당도했다. 등불에 비친 작은 초가는 세월에 낡고 닳아 허름했다.

“딱 하루만 여기서 묵을 거예요. 아셨죠?”

볼품없는 초가집이 성에 차지 않으리라 짐작한 듯. 술사는 맘이 바뀌거든 기탄없이 말하라며 신신당부했다.

물론 그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아무개는 위인전기 속 사적(史跡)이라도 답사하듯 케케묵은 초가를 신중히 살폈다.

바로 여기다. 부평초마냥 온 땅을 유랑하는 술사가 처소로 삼은 곳이.

싸리문을 지나 마당을 건너 댓돌에 신을 벗어 놓을 때까지. 아무개는 보고 느낀 모든 것을 뇌리에 새겨넣으려는 듯 뚫어져라 주시했다. 술사가 난감한 미소를 띤 채 문을 열었다.

“이만 들어오세요. 밤바람이 차네요.”

아무개는 등허리를 잔뜩 숙이고서 그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비좁았다. 잠버릇이 고약한 작자는 몸뚱이 하나로 온 바닥을 쓸고 닦을 수 있을 만큼.

“좁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저는.”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린 아무개는 어영부영 고개만 주억거렸다. 너절한 초가삼간에 무어 그리 볼 게 있다고. 무아지경에 빠져 흠모하는 술사님의 말조차 잘 들리지 않는 듯싶었다.

별수 없다는 듯 혀를 내두른 술사가 초롱불을 등잔에 옮겼다. 따스한 주홍빛으로 사방이 물들었다.

어젯밤 늦도록 술사가 정리한 덕일까. 온갖 벌레가 들끓으리라는 엄포가 무색하게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무어, 아무개는 개미 떼가 집을 지어놨어도 개의치 않았을 테지만.

이래 봬도 흉신이잖은가. 본신의 영력을 슬쩍 흘리기만 해도 작은 미물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달아나곤 했다. 세상 만물이 꺼리고 배척하는 흉신의 예기지 못한 쓰임새렷다.

“아무개 님. 잠시 발 좀 들어 주시겠어요?”

“···어, 어?”

아무개가 삼천포로 빠진 사이 술사는 침구에서 요를 펼쳤다. 바닥에 깔자 벽에 맞닿은 가장자리가 밀려나 솔기가 접혔다. 방 한 칸이 이부자리보다도 작아서 벌어진 참사였다. 술사가 혀를 찼다.

“이거야 원. 좁아서 어쩔 수 없네요. 한 이불을 써야겠어요.”

하, 하, 하··· 한 이불?!

비슷한 상황을 계기로 과거의 기억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신부로 분한 술사와 마주 앉아 화촉을 켜고 원앙금침에 몸을 누이던 나날. 지독히도 현실적이던 꿈.

베개를 안은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아무개가 베갯속을 터트릴 뜻 움켜쥔 것도 모르고 이부자리를 정돈하던 술사는 실없는 소리나 했다.

“어라, 이게 누구야. 혼례를 열여덟 번이나 올리고도 수줍어 손목 한 번 잡아 주질 않으시던 서방님 아니세요?”

······아니나 다를까. 그도 같은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다.

“홀로 지새우는 밤은 어찌 그리도 길던지. 어여 이리 오세요, 서방님. 제가 손수 이부자리를 마련했답니다.”

젠장. 아무개는 벽 모서리에 머리를 처박았다.

제 반응에 재미라도 들린 걸까. 술사는 지금까지도 종종 소꿉장난처럼 서방님, 서방님, 하고 농을 걸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술사는 여전히 상황에 맞춰 농지거리를 했을 뿐이다.

문제는 자신이다.

술사를 생각하며 위로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한 이불을 덮자고? 어젯밤 아무개는 이 몸의 음탕함을 똑똑히 확인했다. 수치를 모르는 망측한 몸뚱어리에 불신이 가득 차올랐다.

흉신의 심각한 고뇌를 알 길 없는 술사는 뒤늦게 축 처진 아무개의 등을 발견했다.

변변찮은 초가삼간을 금칠한 황궁마냥 구경할 땐 언제고. 이불을 펴느라 잠시 눈을 뗀 사이 저리 쪼그라들었다. 쥐구멍이 없으면 직접 파서라도 들어가고픈 모양새였다.

술사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모양 좋은 입술이 맵시 있게 움직였다.

“서방님. 그 벽이 저보다 어여쁜가요?”

흠칫. 아무개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를 어찌한다. 소첩은 그 흔한 내훈서 한 권 탐독한 적 없는 몰상식한 부인이라, 투기를 다스릴 줄 모른답니다.”

실로 참신한 개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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