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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75)화 (75/138)

75화

“잠시 기다려 주세요.”

주저하는 아무개를 멈춰 세운 술사가 공방 출입문을 가볍게 훑었다.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흘리듯 써 내려간 글귀가 은은하게 빛나더니 연기처럼 흩어졌다.

“삿된 영의 출입을 금하는 결계를 해지하셨군요.”

공방 문을 열던 술사가 나진의 지적에 애매한 미소를 띄웠다.

“그대로 두면 아무개 님이 힘드셨을 거예요. 우선 임시로 열어 두고, 나중에 아무개 님만 예외적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손볼게요.”

술사가 결계를 해지하자 아무개의 꺼림칙함도 다소 가라앉았다. 그렇게 삿된 흉신은 가게 입구서부터 쫓겨날 위기를 모면했다.

공방 내부는 지전(紙廛)과 유사했다. 목재로 짠 수납함이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부적과 족자, 나무패와 죽간 등이 종류별로 나뉘어 있었다.

술사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층과 달리 탁 트인 너른 공간에는 휴식용 이부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손님을 맞는 아래층보다 좀 더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인 듯싶었다.

나진은 종이 더미를 품에 한가득 안고 왔다. 서탁 옆에 내려놓자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술사는 맨 위에 놓인 종이를 한 장 들어보고 혀를 내둘렀다.

“주문이 많이 쌓였네요. 이게 전부인가요?”

“아뇨. 지금 가져온 건 일 할도 채 안 됩니다. 서고에 대략 열 배가량의 주문서가 밀려 있습니다.”

“······.”

나진의 단언에 술사의 안색이 묘하게 핼쑥해진 듯 보였다. 아무개는 술사가 자리 잡은 서탁 맞은편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술사님··· 일해?”

“네에. 지금부터 열심히 일해야 해요.”

술사는 나진이 모아둔 주문서를 보고 법기를 제작했다. 아무개는 무릎을 그러안고 물끄러미 응시했다.

빈손으로 소매를 걷어 올린 술사가 붓을 들고 괴황지에 경면주사로 술식을 새겼다.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필치가 물 흐르듯 시원시원했다.

술사의 필체는 곧은 듯하면서도 간혹 획이 날카롭게 뻗어 나가곤 했다. 정갈하고 반듯하게 잘 쓰는구나, 싶다가도 어찌 보면 볼수록 매서운 감이 있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옛 성현들이 이르길, 사람을 알고자 하거든 그의 글자를 보라던가. 하지만 술사님은 상냥하고 다정했다. 온유하고 나긋나긋한 그의 성정과 묘하게 어긋난 필치로 보건대, 옛 성현이랍시고 다 옳은 소리만 해 댄 건 아닌 듯싶었다.

옥선방 이 층은 골목에 인접한 벽면을 틔우고 문을 달아 내키는 대로 여닫을 수 있었다. 활짝 열어 둔 문 틈새로 불어든 바람이 휘장을 살며시 흔들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문살을 따라 쪼개져 실내를 비추었다.

아무개는 서탁에 뺨을 기대고 엎드렸다. 한창 붓을 놀리던 술사가 살풋 웃음 지었다.

“말씀드렸죠? 지루할 거라고.”

나른해서 늘어진 건데. 제 행동이 따분한 듯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려던 아무개는 서탁에 볼이 쓸리고 종이가 이마를 찌르는 바람에 멈칫했다. 눈살을 찌푸린 아무개가 제 이마를 찌른 몹쓸 주문서를 집어 들었다.

“······이거··· 주단 금씨에서··· 주문한 거네···?”

거지 꼬마에게 동화되어 도자역 연구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기억이 여직 선명했다.

덕분에 주단 금씨의 ㄱ만 봐도 못마땅하였으나, 이 같은 속내를 알 도리가 없는 술사는 주문받은 대로 묵묵히 제작할 따름이었다.

“주단 금씨에서 들어오는 의뢰가 많은 편이에요. 여타 세가에 비해 자질이 뒤처지다 보니 부족한 실력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다소 있지요.”

신랄하네.

부드럽고 사분사분한 어조로 가차 없이 평하는 그에게. 아무개가 머뭇하며 물어보았다.

“술사님······ 주단 금씨··· 안 좋아해?”

“굳이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

술사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던 터라. 아무개는 당황했다.

“그럼 왜··· 의뢰를 받아···?”

“돈을 주니까요.”

어어?

“술사님··· 돈 좋아해?”

“좋죠.”

그 순간, 아무개는 저 홀로 간직해 온 사대귀인 유랑술사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돈이 좋은 건 누군들 매한가지겠지만, 그는 다를 줄 알았다. 섣부른 속단이 민망하면서도 내심 항변하고 팠다.

다름 아닌 유랑술사잖은가. 수백 년간 온 땅을 떠돌아다니며 대가 없는 선행을 실천한 자. 그런 이에게 물욕이 있으리라 누군들 짐작하겠냔 말이다.

저자도에서 곳간에 가득 쌓인 재물을 봤다면 또 모를까. 술사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섬에서조차 그는 넓디넓은 사원을 칠교 남매에게 고스란히 내어주고 허름한 초가삼간에서 머문다지 않는가. 이는 물욕이 강한 자의 행실이라 할 수 없다.

“······의외네.”

아무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술사님은······ 그런 거에··· 초탈할 것 같았어.”

“그런 거? 돈 말인가요?”

여유로운 표정과는 상반된 속도로 순식간에 부적 한 묶음을 완성한 그가 덧붙였다.

“재물이 좋다기보다는, 돈 자체를 좋아해요.”

“······어?”

아무개가 눈만 끔뻑이자 술사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어린 시절 저는 돈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걸 당연시 여겼어요.”

부적이 마르길 기다리는 잠시간. 그는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술사는 이백여 년에 달하는 세월 간 온 땅을 유랑했다. 그가 겪은 시대는 난세였으며 온갖 군벌이 각축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연나라가 무너지자 그간 힘들여 모은 돈이 한낱 고철 덩어리에 종잇장으로 전락했어요. 화폐가 무너졌죠.”

그때 깨달았다.

“돈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었어요. 돈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서로 간의 믿음이지요.”

다섯 냥으로는 쌀 한 섬을 살 수 있다. 동그랗게 찍어 낸 쇳덩어리에 쌀 한 섬의 값을 부여한 것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돈이란 고도의 신뢰를 초석으로 할 때에 유의미한 자산이었다.

“오랜 세월 쌀과 면포, 소금이 주거래 수단이었죠. 작금의 황제 폐하께서 화폐 개혁을 단행하기 전까지는요.”

그랬다. 현재 쓰이는 화폐가 두루 통용된 지 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돈이 좋아요. 그만큼 이 세상이 회복되었다는 증명 같아서.”

시간의 흐름은 진보를 보증하지 않는다. 자칫 헛디뎠다간 언제 어느 시절이든 퇴보의 기로에 서게 되니.

사뭇 덤덤하게 풀어 내는 소회는, 퇴보의 시대를 버텨 낸 이가 세상을 향해 건네는 감상이었다.

“이렇게 세상이 안정되고 신뢰가 쌓이다 보면, 언젠가 화폐조차 불필요한 날이 오지 않을까요? 서로 가진 액수만으로 거래하는 거죠.”

“그런 게··· 가능할까?”

아무리 그래도 돈 없이 숫자만으로 거래하긴 좀··· 가족끼리도 돈은 빌려주는 게 아니라는데. 생판 남을 어찌 믿고.

아무개가 떨떠름해 하자 술사가 피식 웃었다.

“상상은 자유인걸요. 각자 선의에 맡기는 불확실한 신뢰 대신, 강제력을 집행하는 제도와 조직이 마련된다면··· 혹시 모르잖아요? 가능할지도.”

그새 마른 부적을 차곡차곡 쌓아 정리한 술사가 괴황지를 한 움큼 꺼내고는 새 부적을 그렸다.

아무개는 그의 손이 바삐 움직이는 모양을 유심히 살폈다. 긴 손끝에 가지런히 자리한 손톱이 퍽 고와 보였다.

돈이 좋다는 그의 소견은 아무개의 환상을 산산이 부서트렸다. 하지만 그 짧은 행간에 숨겨진 내막을 이해한 순간. 아무개는 환상에 가려져 있던 실체를 잠시나마 엿본 듯하였다.

그곳에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대귀인 유랑술사가 아닌, 한 명의 인간이 있었다.

우스운 노릇이지. 술사는 그 스스로 청렴결백하다 한 적 없다. 혼자 멋대로 망상하고, 착각하고서는. 실제가 상상과 다르다며 놀라다니. 아무개는 자신이 너무 한심한 나머지 목을 졸라 버리고 싶어졌다.

“참, 현 황제 폐하께선 작고하셨죠?”

“···어? ······그렇지.”

모를 수가 없다. 황제의 유품을 친가인 함장군 댁에 전달한 이가 아무개 자신이었으니.

“곤란하네요. 폐하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애써 밟아 놓은 군벌들이 도로 득세할 텐데.”

“······아직 안 알려진 걸 보면··· 일부러 숨기는 게 아닐까?”

“하긴. 폐하의 서거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보다는 지금처럼 실종 상태를 유지하는 쪽이 국정운영 측면에서 났겠네요.”

그가 황제의 서거를 아쉬워하는 눈치기에 아무개는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술사님··· 황제가 좋아?”

종이 위를 가볍게 노닐던 붓이 삐끗했다. 누런 괴황지에 붉은 선이 주욱 그어졌다.

입가에 엷은 웃음기를 머금은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린 술사가 괴황지를 내려다보았다. 망한 부적을 주시하는 그의 시선은 미동 없이 정적이었다.

“글쎄요. 지고하신 천자께 한낱 필부가 감히 호불호를 논하는 것조차 불경이겠으나···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는 이를 앙모할 만큼 위국충절한 인격자는 못 되는지라.”

술사는 망한 부적을 한 손에 구겨 쥐고는 작게 뭉쳐 서탁 귀퉁이로 휙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부적 뭉치를 따라 아무개의 고개도 좌우로 반원을 그렸다.

“황제가 아니라, 변하는 풍경을 좋아해요.”

성긴 잡초가 무성한 산등성이로 길이 닦인다. 폐허에는 초가가 옹기종기 들어서고 황량하던 벌판에 알곡이 누렇게 익어 간다.

수백 년간 지지부진하던 천하가. 요 몇 년 새에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양상을 목도한 이가 나직이 읊조렸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백마 탄 초인 나부랭이가 아니란 거겠죠.”

술사는 새로 괴황지를 꺼내어 부적을 썼다. 아무개는 서탁 귀퉁이에서 굴러다니는 부적 뭉치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굴렸다.

그 부적은, 이날 술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지른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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