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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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는 누워 있었다.
좀 더 정확히 해설하자면, 어떤 꼬마의 몸에 의식이 깃들었는데 그 꼬마가 누워 있었다.
아무개의 꿈은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새삼 놀랄 까닭도 없었으나, 이번만은 자못 당혹스러웠다. 오늘은 꿈장수에게서 받아 낸 베갯잇을 처음 사용한 날이었던 탓이다.
낯선 육신에 갇혀 단지 흘러가는 대로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 그것이 아무개의 악몽이다. 이 악몽의 탈을 쓴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어렵사리 베갯잇을 구해 머리 밑에 베고 잠들었는데. 어째서, 또 이런.
꼬마는 시체처럼 죽은 듯 눈을 감았다. 하나 뒤통수에 짓눌린 풀잎의 감촉과 홧홧하게 아린 통증이 녀석의 생존을 알려 주었다. 어쩌다 이리 성한 곳 없이 모다 까지고 물집이 잡힌 걸까.
“얘야, 네가 절뚝이냐?”
꼬마 아이가 눈을 떴다. 푸르른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이찼다.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아무개는 생각했다. 이 꼬마 이름이 절뚝이인가? 누군지 몰라도 정말 대충 지어놨구나.
“왜 대답이 없누. 네가 절뚝이 맞느냐?”
“······그렇다면요.”
짧게 대꾸하는 꼬마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빠져서는 형편없었다. 여전히 말을 걸어 온 어른은 안중에도 없이 하늘만 멀거니 보는 놈의 시선에 아무개는 직감했다. 이 꼬마, 싸가지가 제법이겠다.
“듣자 하니 이 섬에 큰불이 나서 쑥대밭이 되었다던데.”
그제야 아이가 고개를 틀었다. 고풍스러운 차림에 풍채 좋은 노인이 차르륵, 접선을 펼쳐 살랑살랑 흔들었다.
“다 타고 잿더미만 남은 땅이 하루아침에 연녹빛으로 물들었다지 무어냐.”
“······.”
“저어기 뭍사람들은 기적이니 뭐니 한다만, 나는 안다. 그건 기적 따위가 아니다. 술법이지.”
비단부채에는 화사한 모란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가, 네 짓이지?”
탁, 부채를 접은 노인이 주름진 눈을 가늘게 좁혔다.
“모두 도망치기 급급한데 너 홀로 화마에 뒤덮인 섬으로 헤엄쳐 갔다지. 동이 틀 무렵엔, 새까맣게 타 버린 섬에 돌연 녹음이 우거졌다고.”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노인은 두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너와 같은 이능을 지닌 자들이 있단다. 궁금하지 않으냐?”
“······.”
아이는 지푸라기 인형처럼 덩그러니 놓여있기만 했다. 기대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노인은 골몰하듯 눈썹을 한데 모았다. 곧이어 묘안이 떠오른 듯, 접선을 손바닥에 탁! 두드린 그가 회심에 차 미소했다.
“아가, 네 부모가 궁금하지 않으냐?”
그 순간, 아이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무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선명히.
“······부모··· 라 하셨습니까.”
“그래! 부모 말이다!”
노인이 환히 웃었다. 주름진 눈매를 곱게 휘었으나 그 아래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감출 수 없었다. 아무개는 그 시선에서 황홀한 열망과 희열을 읽어 냈다.
“네 능력은 우리 화양 율씨의 것이 틀림없으렷다! 느이 부모는 필시 우리 가문의 술사일 게다!”
“······저희 어머니는 이번 화재로 돌아가셨습니다만.”
“저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마.”
건성으로 둘러댄 노인은 곧장 본론으로 돌아갔다.
“혹 너희 어머님께서 술사셨느냐?”
“아뇨. 평범한 도망 노비셨습니다.”
“음? 도망 노··· 그, 그럼 네 아버지가 율씨겠구나.”
노인은 당혹하였으나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고는 인자하게 웃음 지었다.
“자아, 절뚝아. 이 늙은이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내 반드시 느이 아버지를 찾아 주마,”
노인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아이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등허리에 묻은 풀잎을 툭툭 털어 낸 아이가 앞장서 걷는 모양을 본 노인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뭍 사람들은 널 절뚝이라 부르던데. 정작 네 걸음걸이는 멀쩡하구나?”
“어머니께서 다리가 불편하셨습니다. 매번 절름뱅이네 아들이라고 부르기는 귀찮으니 대충 절뚝이라 퉁친 거겠죠.”
“절뚝이는 별명이었구나. 하면 네 본명은 무엇이냐?”
“없습니다. 어머니께선 저를 새벽이라 부르셨지만, 그건 태명이고요.”
“그렇구나. 무어, 되었다. 우리 가문의 호적에 오르면 넌 화양 율씨가 될 테고, 항렬에 따라 돌림자가 지어질 게다.”
네 연배로 보아 돌림자는 희 또는 해일 것 같다며 노인이 말을 이었다.
“한데 율희새벽 율해새벽은 괴이쩍지 않으냐? 이참에 한문으로 이름을 지어 보는 건 어떠냐.”
“새벽을 뜻하는 한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보자, 새벽 서(曙)자도 있고, 효(曉)도···.”
“그걸로 하겠습니다.”
“음? 무슨 소리냐?”
“제일 처음 말씀하신 한문. 그걸 이름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그래, 알겠다. 서(曙)야.”
이름을 얻은 꼬마와 속내를 숨긴 노인이 길을 나섰다.
두 인영이 떠나간 섬은 화마가 휩쓸고 간 흔적이 곳곳에 잔재했다. 다만 시꺼멓게 타 버린 초가삼간 기둥뿌리에는 연녹빛 덩굴이 엉기고 검게 그을린 대지는 갓 움튼 새싹으로 뒤덮이니 이는 즉, 화생목(火生木)이라. 오행 상생의 이치를 역행하노라니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
아무개는 망연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깨어 있을 적에는 괜찮다. 아무개의 자아가 의식을 유지하니까. 하나 잠에 들면 자의식이 가라앉고 무의식이 떠오른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는 듯, 원혼들이 지겹게 들러붙었다.
악몽을 깊어질수록, 차츰 꿈속의 인물과 동화되어 종국에는 몽혼(夢魂) 그 자체가 되고 만다. 몽중의 사고와 감정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잠에서 깬 후에도 아무개가 스스로를 자각하고 정체성을 되찾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을 요했다.
한데 꿈장수의 베개를 베고 잔 오늘은 달랐다.
아무개는 늘 그렇듯, 꿈속에서 절뚝이라 불리는 꼬마 안에 갇혔다. 하지만 꼬마와 심상을 공유하지도, 자신이 그 꼬마인 양 이입하지도 않았다. 꿈의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히 제삼자의 입장을 고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꿈속의 꼬마가 멀쩡히 살았다는 것이다.
흉신의 악몽은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되새김질하는 것. 따라서 악몽의 말미는 처참한 최후 혹은 그러한 최후를 능히 짐작할 만한 절망의 구렁텅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새 보호자를 만나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는, 이리 희망찬 결말은 난생처음이다.
인정한다. 몽환의 호접이 고치에서 자아낸 실로 만들었다는 베갯잇은 모종의 효능을 발휘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당했다. 빌어먹을 꿈장수에게.
물론 오늘의 꿈은 악몽이라 칭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아무개의 흉몽은 보다 처참하고, 비할 데 없이 잔혹했으므로. 형식은 전과 유사한 듯하나, 본질은 판이했다. 이런 건 악몽 축에도 못 든다.
하지만 아무개가 원한 꿈은 이런 게 아니다. 몽환전에 방문한 그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심지어 꿈은 남에게 알려져선 안 된다기에 꿈장수와 독대하지 않았던가.
“아무개 님, 일어나셨어요?”
어제 딸려온 꿈장수가 아직 저자도에 있으려나. 놈을 족치고자 궁리하던 아무개는 분합문 너머 흘러든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문 열어도 되나요?”
“어? 어어······.”
끼이익, 문 한 짝이 들려 올라가고 그 아래로 술사가 보였다.
술사는 한 팔을 괴고 엎드려 누운 채 아무개를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한데 그 얼굴이 아무개의 짐작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다.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면, 맞닿을 정도로.
“오늘 처음으로 베갯잇을 써 봤죠? 어때요, 악몽은 좀 나아졌어요?”
“······으응.”
꿈장수에게세 베갯잇 하나 얻겠다고 참으로 많은 고난과 역경과 거쳐 왔더랬다. 제 일처럼 나서준 술사에게 차마 ‘또 사기당했어’라고 할 수 없었던 아무개는 대강 얼버무렸다.
“다행이네요. 이제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되겠어요.”
순수하게 기꺼워하는 그를 보자 더더욱 사기당했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아무개는 우물쭈물하며 애꿎은 이불속만 쥐어뜯었다.
꿈장수에게 또 당하다니. 간만에 살심이 들끓었다. 한데 생글생글 웃는 술사를 보자 마음에 진 응어리가 봄바람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머리맡에 비스듬히 얹은 삿갓을 매만지며 술사가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공방에 나가서 밀린 업무를 처리할 예정이에요. 아무개 님은 어쩌실래요?”
“나는, 술사님이랑 같이······.”
술사님이랑 같이 있을래. 술사님 따라갈래. 늘 하던 그 말이 입술에 걸려 미처 끝맺지 못했다. 지난밤 그를 떠올리며 홀로 위로하던 때가 떠올라서.
“하하. 아무개 님이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어요.”
그는 아무개가 새끼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걸 당연시하는 지경에 이른 모양이다.
“같이 가는 건 상관없지만, 분명 지루할 거예요. 남이 일하는 거 구경해 봤자 무슨 재미겠어요?”
남이 일하는 구경은 재미없겠지만, 술사는 숨만 쉬어도 재미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아무개는 술사가 운영하는 공방으로 따라나섰다. 씻고 의복을 갖추고 조반을 챙기는 등 아침 일과를 끝마친 아무개는 사원의 일주문에서 칠교 남매의 마지막 일원과 조우했다.
“이분은 나진 님이세요. 공방에서 여러 업무를 맡아 주고 계시죠.”
나진은 동그란 애체(愛逮)를 쓴 이지적이면서도 서늘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이쪽은 아무개 님. 제가 모셔 온 빈객이에요. 흉신이라고도 하고요.”
“처음 뵙겠습니다. 술사님을 도와 공방의 잡무를 도맡아 하는 나진이라 합니다.”
나진이 사무적인 태도로 인사하자 술사가 하하 웃으며 부연했다.
“겸손하셔서 잡무라 하시는 거예요. 한 해에 두어 번 정도 방문하는 저보다는, 나진 님이 공방의 실질적인 주인에 가깝지요.”
술사는 저자도에서 뭍으로 단숨에 축지했다. 강변에 줄지은 상가 골목 어귀에 다다른 그가 아무개를 돌아봤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해요. 공방 인근으로 축지할 수 없도록 금제를 걸어놓았거든요.”
유난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세가에선 필수로 손꼽는 방비책이었다. 축지술로 기습하는 침입자를 막아내기 위해.
“술사님··· 공방 저거야?”
하여 멀찌감치 떨어져 있음에도 아무개는 줄지은 점포 가운데 한 곳을 콕 집어냈다. ‘옥선방’이라는 간판이 걸린 이 층짜리 건물이었다.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옥선방은 외관상 평범한 점포였다. 하나 아무개는 흉신으로서의 직감이 경종을 울려 댔다.
지나치게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던가. 옥선방이 그러했다. 흔한 잡령은 물론이거니와,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념마저 깔끔히 도려낸, 병적인 결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