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 그래도 돼···?”
“딱히 아니 될 까닭도 없는걸요.”
“술사님··· 짐 옮기려면, 번거롭잖아···.”
“하하. 염려 놓으세요. 짐 같은 건 없으니.”
그건 이상한데.
저자도는 온 사방을 떠도는 유랑술사에겐 드물게도 거점이라 할 만한 곳이다. 한데 짐이 없다고?
“술사님··· 여기서 지내는 거··· 맞아?”
“저는 심적으로 껄끄러운 면이 없잖아서, 사원에서는 길게 머물지 않아요. 대신 섬 외곽에 작은 초가를 지어놨는데······”
한창 설명하던 술사가 도중에 말을 끊었다. 아무개의 얼굴을 빤히 보던 그가 돌연 단언했다.
“엄청 좁아요.”
“······어···?”
“간신히 초가삼간에 맞춘 수준이라서요. 미학적으로 훌륭하게 조형된 데다 넓고 편하고 세간이 완벽하게 갖춰진 사원과는 비교가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어요.”
“···으응······.”
“애당초 거주 목적으로 지은 게 아니에요. 년에 두어 번 성묘할 적에나 쓰려고 대강 만든 거예요.”
“어··· 알았어.”
“그간 관리도 안 했으니 온갖 벌레가 들끓을 거예요.”
“으응··· 그렇구나···.”
초가집 험담을 한참 늘어놓던 술사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얼굴로 봐도 안 돼요.”
“······?”
내 얼굴이 어떻길래? 아무개는 괜스레 볼을 문질러보았다. 술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재차 역설했다.
“안 된다고 했죠.”
“······.”
아무개는 풀이 죽었다.
술사가 이리 단호하게 끊어 내는 건 처음이다. 아무래도 정말 안 되려나 보다. 술사가 머무른, 아마도 그가 친히 세웠을 초가집이 궁금한데.
“······안 되는데.”
“······.”
“···정말, 안 되는데.”
“······.”
혼잣말처럼 연신 아니 된다 중얼거리던 술사가 삿갓을 깊게 눌러쓰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사원에서 쉬세요. 초가집은 제가 따로 가서 정리해 놓을 테니, 나중에 한 번 들르죠.”
“응···!”
아무개는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발걸음이 통통 튀는 것이 절로 흥이 묻어나는 듯했다.
“술사니임! 지금 저녁 차리려는데, 같이 드실 거죠?”
옷을 갈아입은 라홍이 물었다. 겉으론 티 내지 않으려 하나 은근히 신이 난 아무개를 힐끔 돌아본 술사가 라홍을 향해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오늘은 아무개 님이랑 따로 먹을게요.”
“그럼 두 분 몫은 따로 내드리면 될까요?”
“그래 주면 고맙죠. 올 때마다 매번 신세 지네요. 저도 좀 거들어드릴까요?”
“어휴, 농담이라도 그런 무서운 말은 마시어요. 술사님은 부엌 출입 금지인 거, 잊지 않으셨죠?”
라홍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술사가 부엌에 들어오는 순간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할 듯이.
“신세는 무슨. 그러지 마시고 자주 좀 들러 주세요. 바현이 사현이가 술사님 언제 오느냐고 맨날 칭얼대서 귀찮아 죽겠어요.”
손을 내저은 라홍이 치맛자락을 잡아 들고 돌아서다 아, 하고 뒤늦게 떠올린 듯 아무개를 돌아보았다.
“경황이 없어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했네요. 수호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호지신께서 당신의 앞길을 열어 주길.”
사대귀인 중 일인인 수호지신은 뭇사람들로부터 신으로 숭배받은 바 있다. 지금에서야 그의 신당을 찾아보기도 어려워졌다지만. 사원의 수호령인 라홍은 전과 다름없이 사원을 방문한 이들에게 축언을 선사했다.
수호지신께서 당신의 앞길을 열어 주길.
한때 저 인사가 온 다환에 일상처럼 스며든 시절이 있었지.
찰나 떠오른 옛 추억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낸 아무개는 술사에게 살포시 다가섰다.
“술사님······ 우리, 여기서··· 저녁 먹어?”
“네에. 그렇게 됐네요.”
“······나는··· 안 줘도 되는데···.”
칠교 남매는 아무개에게 일방적으로 후드려 맞지 않았던가. 술사가 중재할 때에야 별수 없다손 쳐도 속으로는 이를 갈았을 터. 식사에 무슨 짓을 할지 어찌 아나.
협곡 마을에서 어처구니없이 당한 일이 여직 앙금으로 남았던 터라. 아무개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총총 멀어지는 라홍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술사는 하하 웃었다.
“염려 놓으세요. 아무리 빈정 상했더라도 제가 친히 모셔 온 빈객의 상에 독을 탈 만큼 아둔한 분들은 아니니.”
술사의 어조는 사근사근했으나 정작 그 속에 깃든 함의는 자못 냉담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일 텐데. 두둔하거나 역성해 주는 기색이라곤 일절 없이 이성적으로 판단한 그가 그러고 보니, 하고 운을 뗐다.
“아무개 님. 몸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수면약 때문에 졸리거나 나른하지 않고요?”
“으응··· 괜찮아.”
“제게도 그리 보이기는 한데. 혹 괜찮으시다면 마윤 님을 뵙는 게 어때요? 의원이시거든요. 의약에 조예가 깊지 않은 저보다 믿음직할 거예요.”
아무개는 동굴 인근에서 거지 꼬마에게 약재로 쓸 법한 초목과 효능을 일일이 짚어 주던 술사를 상기했다. 의약에 조예가 무지막지하게 깊어 보이던데.
“응··· 다음부턴······ 쉽게 당하지 않을 거야.”
오늘의 실책으로 혹여나 그에게 맹추로 여겨질까. 아무개는 실은 국을 한술 뜰 때부터 맛이 이상했다며 객쩍은 소리만 꿍얼댔다. 술사가 자연스레 되물었다.
“맛이 이상한데 어찌 계속 드셨나요?”
“어··· 그건······.”
술사님은 잘만 먹으니까. 내가 공연히 까다롭게 구는가 싶어.
······이리 말하면 꼭 술사님을 책잡는 것 같잖은가. 아무개는 차마 진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하여 괜스레 방을 찾는 척 두리번거리는데 술사가 귀신같이 눈치챘다.
“혹 제 탓인가요? 제가 아무렇지 않게 잘 먹어서?”
“······술사님 탓··· 은 아니고··· 내가, 좀 더 신중하지 못해서···.”
“어찌 됐든. 저 때문에 헷갈렸다는 거죠?”
재차 확인하는 술사에게. 아무개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술사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아무개 님. 저를 어떤 판단의 근거로 삼으시면 아니 되어요.”
“······왜?”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니까요. 특히 음식에 관해서는 결코 저를 믿으셔선 아니 돼요. 라홍 님이 저보고 부엌에 얼씬도 말라며 치를 떠는 거 보셨죠?”
아무개가 으응, 하고 끄덕이자 술사가 담담히 말했다.
“저는 미맹이에요.”
뭐?
“후각도 썩 좋지 않아요. 나진 님이 평하길,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도 모를 정도로 형편없다더라고요. 하니 저를 믿으시면 아니 돼요.”
아시겠죠?
술사가 확답을 받으려는 듯 아무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무개는 무어라 말문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미맹, 이라고···?”
결국 앵무새인 양 그의 말을 반복하자 술사가 간략하게나마 부연했다.
“네. 예전에 복용하던 환약의 후유증으로 미각 후각을 잃었어요”
칠교 남매를 저자도로 데리고 온 첫날. 술사는 손수 요리를 대접했다.
은인께서 친히 조리한 찬으로 가득한 상을 받은 칠교 남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했다. 그릇에 정갈히 담긴 칠첩반상은 그 자태가 참으로 고와 입에 닿기도 전에 눈부터 즐거워졌다.
하나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도록 허기진 중에도 씹던 걸 도로 뱉어 버릴 만치 끔찍한 맛에.
멀끔한 겉모양에 속아 넘어간 칠교 남매는 이후 술사에게 요리는 물론 부엌 출입마저 엄금했다. 조왕신의 분노를 살까 두렵다는 연유로.
‘술사님이 못 하는 것도 있구나.’
당연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잖은가. 업으로 삼을 만큼 잘하는 일이 있는 반면, 못 하는 것도 수두룩하다.
한데 아무개는 기묘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술사도 미숙한 부분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에.
“······미맹은, 아프진 않지···?”
“하하. 그렇지요. 익숙해져서 이제는 딱히 불편하지도 않아요. 여기는 어때요?”
술사는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그가 권한 자리는 홍의당(紅衣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으로, 건물명부터 참으로 수호지신을 모시는 사원다웠다. 수호지신이 자진하여 적의 표적이 되고자 눈에 띄는 붉은 옷을 입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였으니.
아무개는 술사가 추천한 자리에 터를 잡았다. 홍의당은 칠교 남매가 거주하는 혜신채와는 멀찍이 떨어진 외곽에 자리했다. 고요한 정취와 우거진 수풀 너머로 낮은 담장과 강의 풍경이 돋보였다.
무어, 구구절절 장점을 갖다붙였지만 모다 사족에 불과했다. 술사가 권해 준 곳이니 짐을 풀기 전부터 일찌감치 마음에 들었다.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 아마 간단한 청소부터···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분합문을 열고 들어가던 술사가 도중에 말을 바꿨다. 댓돌에 신을 벗고 마루에 오른 아무개는 그의 옆에 서서 사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잊혀진 사원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멀끔했다. 마룻바닥에는 흔한 먼지 한 톨 없고 단청에 칠이 벗겨진 곳도 없었다.
“잘 쓰이지 않는 사당도 꾸준히 관리하나 봐요.”
과거 한때나마 융성한 신의 사원답게 전, 각, 당, 누, 재까지. 크고 작은 건물이 수두룩했다. 그걸 고작 일곱 명이서 관리한다니.
공연히 힘만 빼는 노릇이었으나, 아무개는 내심을 삼켰다. 그들 남매가 과하게 열심히 일한 덕에 자신이 편해졌으니.
술사는 분합문을 내렸다. 널찍한 자리가 필요할 땐 문을 올려 공간을 틔우고 그렇지 않을 때엔 벽처럼 내려 방을 분리할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동굴에서 지새운 밤의 재현이었다. 술사가 축지하여 휙 사라졌다 나타날 때마다 그 손에 각종 세간살이가 들려 있었다. 그가 다녀갈수록 빈 사당에 차곡차곡 가구가 채워졌다.
“술사님··· 나는··· 할 거, 없어?”
“물론 있지요.”
술사는 베개를 하나 내주었다.
“자, 아무개 님 거예요. 여기에 꿈장수한테 받은 베갯잇을 씌우시면 돼요.”
“······어, 어어···.”
무심코 베갯잇을 씌운 아무개는 순식간에 끝마치고서 이게 아닌데··· 하는 심회에 잠겼다.
아무개의 물음은 술사와 함께 사당을 거주하기 용이한 공간으로 가꾸려는 의도였다. 저 혼자 써먹을 베개를 정돈하는 게 아니라.
하나 축지술을 양껏 남발하는 술사가 원체 신출귀몰한지라 말 한번 진득이 붙이기 어려웠다. 기척을 느껴 돌아보면, 이미 사라지고 없는 형국이니.
결국 아무개가 운이나마 띄운 건, 마윤이 방문할 무렵이었다.
술사에게 잡혀 홍의당으로 오게 된 마윤은 아무개를 진맥하더니 별다른 이상은 없다면서도 몸을 보할 약재를 몇 가지 처방했다. 모자란 수면으로 누적된 피로를 덜어 줄 요량이었다.
마윤이 진단을 내리기 무섭게 즉시 일어난 술사가 약재를 구하러 가려 했다. 그의 소맷부리를 덥석 그러잡은 아무개가 간곡히 부르짖었다.
“술사, 님···!”
“네?”
수고의 뜻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마윤을 축지시킨 술사가 아무개의 손에 고분고분 잡혀 주었다.
“왜 그러세요?”
“······어···.”
그를 붙잡겠노라 작정했건만. 막상 손에 쥐고 나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특별한 용무가 있던 것도 아니니.
“······아니야.”
서두르느라 급히 무릎걸음으로 섰던 아무개는 도로 소맷자락을 놓아주며 움츠러들었다. 묘하게 시무룩해 보이는 아무개의 머리꼭지를 가만 내려다보던 술사의 손끝이 상대의 흑단 같은 머리칼을 살그머니 흐트러트렸다.
“금방 돌아올게요. 집 잘 지키고 있어요.”
웃음기를 머금은 음성이 잠시간 머무르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