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환청이 아닙니다! 저건 진짜예요!
아무개가 중얼거리자 그 품에서 나비가 응답했다. 긴박한 전투 중에는 기척도 없이 숨어 있더니. 상황이 정리될 기미가 보이자마자 튀어 나온다.
아무개는 먼지 털듯 나비를 털어냈다. 엉겁결에 덩달아 축지해 온 몽환의 나비는 자유를 찾아 나풀나풀 날아가 버렸다.
“어찌 됐든, 가만히 있던 아무개 님이 공격받은 건 사실이네요?”
그렇죠? 하고 술사가 재차 확인했다. 그를 보자마자 신난 강아지처럼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던 짐승이 슬그머니 어깨를 움츠렸다.
되묻는 술사의 어투는 조곤조곤하고 나긋했다. 질책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그저 사실 여부를 알아볼 뿐인데도 짐승은 눈에 띄게 기죽었다.
아무개는 죽이려던 것도 잊고 놈의 심경에 동조해 버렸다.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잘못을 저지른 상황에서 술사가 별다른 타박 없이 그저 실상을 지적하기만 해도 피가 바싹 마를 터였다. 평소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소리가 괜히 있겠는가.
난감한 듯 침음을 흘린 술사가 한 발 옆으로 물러나 아무개를 드러내 보였다. 그가 짐승에게 아무개를 소개해 주었다.
“여러분. 이분은 제가 모셔온 귀빈이세요.”
“······네?”
“귀, 빈···?”
다시금 짐승에게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성은 제각각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결은 유사했다. 충격, 경악, 탄식 등.
“당혹스러우시겠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니 변신을 풀어 보시겠어요?”
술사의 제안에 잠시간 망설이던 짐승은 결국 본신을 드러냈다. 그렇게 곰은 여섯 개의 덩어리, 아니 여섯 명의 인간으로 흩어졌다.
곰처럼 듬직한 덩치의 성인 남성이 하나, 쌍둥이 자매 둘에 비실비실 유약해 보이는 청년 하나, 그들에 비해 무척 어린 쌍둥이 형제가 둘.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일렬로 나란히 선 그들을 차례차례 가리키며 술사가 설명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가철 님, 다홍 님, 라홍 님, 마윤 님, 바현 님, 사현 님이에요.”
가철이 어깨가 떡 벌어진 남성이었다. 다홍 라홍은 쌍둥이 자매, 마윤은 비실비실한 놈, 바현 사현은 꼬마 쌍둥이 형제였다.
그들의 이름에서 기묘한 규칙성을 발견한 아무개는 혹시나 하며 물어보았다.
“나 어쩌고··· 라는 이름은 없어?”
“어찌 아셨나요? 본래 이 자리에 나진 님도 계셔야 하나, 지금 무렵이라면 공방에서 일하고 계실 거예요. 나진 님까지 포함해서 칠교 남매라고 부른답니다.”
그냥 해 본 소리인데. 정말로 가나다라마바사였다니.
묘한 충격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술사는 역으로 칠교 남매에게 아무개를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아무개 님이에요. 흉신이시죠.”
“······흉신?”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칠교 남매는 한층 시끄러웠다.
“어머 어머, 들었어? 흉신이래.”
“흉신 같은 걸··· 이리 태연하게 소개하고, 통성명하고, 그래도 되나?”
“술사님이 또 이상한 걸 주워 왔어!”
칠교 남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시큰둥하기만 하던 아무개의 뇌리에 ‘또’라는 한 글자가 새겨졌다.
‘또’ 이상한 걸 주워 왔다? 그 말인즉슨, 이전에도 자신처럼 ‘이상한 것’을 주워 온 바 있다는 뜻이잖은가.
“술사님. 정말로 저걸··· 흉신을 섬에 들이실 겁니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오···.”
가철이 나서서 운을 떼자 마윤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웅얼웅얼 덧붙였다. 다홍과 라홍이 동조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술사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조금 걱정스럽네요.”
“솔직히 사이좋게 지낼 자신은 없어요. 술사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염려를 표했다. 술사는 하하 웃으며 설마요, 하고 그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사이좋게 지내다니,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서로 원수지지만 말아요.”
“······.”
술사님. 기대치가 낮다 못해 없는 수준이구나.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리는데 술사가 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데면데면한 사이라도 유지하려거든 시작부터 앙금을 남겨서야 곤란하겠죠. 혹 불만이 있다면 지금 털어놓으세요. 여러분도, 아무개 님도.”
“나는··· 없어. 저쪽에서 먼저, 공격하길래······ 대응했을 뿐이야.”
선수를 빼앗겼으나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아무개였다. 앙금 따위, 남을 리가 있나.
다만 안도할 따름이다. 짐승을 죽이길 미루고 미룬 자신의 판단에.
칠교 남매는 아무개의 추측 이상으로 술사와 친밀한 관계였다. 저들의 눈에 부러진 노 조각 따위를 쑤셔 넣었다간 최소 실명이었을진대. 그랬다간 이리 범연하게 대화할 상황이 아니었을 테지.
“불만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공격한 저희 측 과실이 큽니다. 하니 감내하겠습니다.”
가철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이마에 선명한 혹이 나 있었다.
“흉신, 아니 아무개 씨도 좀 봐줘요. 시작은 우리가 했다 쳐도, 정작 피해 본 것도 우리잖아요?”
푹 젖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다홍이 덧붙였다. 검은 머리칼에는 녹조가 덕지덕지 붙어 수십 년 묵은 물귀신 꼴이었다.
“저희야 뭐어, 술사님만 따르는 거죠···.”
턱에 시퍼런 피멍이 든 마윤이 축 늘어진 모양으로 중얼중얼했다. 쬐끄만 쌍둥이 형제는 쌍둥이 자매의 치마폭 뒤에 숨어 아무개를 힐끔댈 따름이었다.
칠교 남매 모두 전반적으로 물에 빠진 생쥐인 양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반면 아무개는 전과 다를 바 없이 정갈하고 단정했다.
그 선명한 차이를 눈에 담은 술사가 살풋 미소했다.
“여러분은 씻고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어요.”
섬의 이름은 저자도(楮子島). 다환을 가로지르는 원강(元江)의 거대한 물결이 품은 하중도였다.
묘하게 익숙한 지명이다 했더니. 협곡 마을로 가기 전, 하룻밤을 보낸 동굴에서 술사가 지나가듯 언급했더랬다. 이 부근에 그가 운영하는 공방이 있다 하였지.
저자도 중심부에는 섬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규모의 거대한 사원이 있었다. 술사를 따라 그곳으로 향한 아무개는 일직선상의 기둥에 지붕을 얹은 일주문(一柱門)과 그 현판에 새겨진 글귀를 올려다보았다.
[수호전守護殿]
수호전이라 함은, 사대귀인 중 일인인 수호지신을 모시는 사원의 통칭이다.
칠교 남매는 그 수호전의 현판이 떡하니 걸린 일주문으로 익숙하게 드나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사대귀인 유랑술사가, 마찬가지로 사대귀인인 수호지신의 전당에서, 신세를 지는··· 그런 건가?
“······여기가··· 술사님, 집이야?”
“하하, 설마요. 저도 가끔 들르는 일개 객일 지나지 않아요.”
그에 칠교 남매 모두 동시에 뒤를 돌아 술사를 빤히 보았다. 서운함을 담은 눈길로 강력히 항의하는 그 뜨거움에 당혹한 듯. 짧게 침음을 흘린 술사가 슬쩍 말을 바꾸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군식구?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죠.”
아무개 님은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저는 버려진 사원을 주워 온 것뿐이에요. 칠교 남매께서는 본디 이 사원의 수호령이셨고요.”
하긴. 이리 큰 사원을 섬에다 지으려면 수고가 만만찮았을 터였다. 자재를 옮겨 오는 것부터 고역인······
잠깐, 주워 왔다고?
아무개는 일주문 너머로 보이는 대전과 그 외 여러 전각 및 사당을 둘러보았다. 언뜻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열 채는 족히 넘어가는데.
“이런 걸··· 어떻게 주워···?”
“축지술로 가져왔지요.”
사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랑술사의 축지는 술법의 수준을 넘어 사기행각에 가까웠다. 대체 어느 누가 축지술로 건물 수십 채를 통째 옮긴단 말인가!
“보시다시피 방문하는 신도도 없는 빈 사원이에요. 어느 전각이든 자유로이 정하시어 거처로 삼으세요. 혹 추천이 필요하면 말씀하시고요.”
채광이 좋은 사당, 풍광이 훌륭한 전각, 부엌과 가까운 방까지. 원하는 조건에 맞춰 줄 수 있다며 술사가 덧붙였으나 아무개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술사님은··· 어디서 지내?”
“저요?”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술사님이랑, 가까운 곳이··· 좋아.”
바닥을 내려다보며 아무개는 소심하게 손끝만 꼼지락거렸다. 혹 술사에게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술사의 침묵은 길어졌고, 아무개의 후회는 갈수록 깊어졌다.
“······저기, 술사님···.”
“어디든 원하는 곳을 택하세요.”
이제라도 철회하려던 찰나. 술사가 입을 열었다.
“제가 따라서 갈 테니.”
······어?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술사가 입가를 가늘게 휘어뜨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