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70)화 (70/138)

70화

五. 꿈과 현실

물소리가 들렸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넘실대는 파도와도 다르다. 쏴아아⎯ 호쾌하게 굽이치는 물결은 필시 강줄기일 터.

협곡에 고인 꿉꿉한 응달을 걷어 내는 시원한 물 내음 속에서 아무개는 눈을 떴다.

새로이 당도한 곳은 하중도(河中島)였다.

드넓은 물줄기 가운데 놓인 외딴 섬. 고개를 들면 멀찍이 강변의 뭍이 보였다. 아무개가 선 곳은 자그마한 나루터로, 인근에 대어 놓은 쪽배 두어 척이 물살을 따라 잘게 노닐었다.

“아무개 님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이분을 모셔다드리고 올게요.”

당부를 남긴 술사는 가짜신령을 데리고 연달아 축지했다. 홀로 남은 아무개는 수평선을 멀거니 응시했다.

한낮의 햇살이 내리쬔 수면의 윤슬은 보석을 잘게 흩뿌린 듯 빛을 산란했다. 고즈넉하고 평온한 풍광 속에 덩그러니 놓인 아무개는 이질적인 괴리감에 젖어 들었다.

나는 이런 곳과 어울리지 않는데.

어색함에 괜스레 주먹을 쥐어 보았다. 갓 돌을 지난 어린 아기가 죔죔 하듯 손을 놀리던 중, 불현듯 선명한 적의가 따끔하게 와 닿았다. 고개 숙여 주먹을 내려다보던 아무개가 흘깃 눈동자만 올려 확인했다.

“크르르릉···.”

맞은편 저 너머에서 거대한 짐승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언뜻 곰을 닮은 듯싶으나, 곰이라기엔 과하게 커다랗다. 본디 네발짐승이었을 녀석은 앞발 한 짝을 잃고 세 다리로 몸을 지탱하였다. 아무개는 짐승을 마주 보고 섰다.

짐승이 한껏 몸을 낮춘 채 서서히 다가왔다. 사냥을 앞둔 맹수의 형상을 앞두었건만, 아무개는 기묘하게도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래. 나는 이런 것과 어울리지.

“크르릉⎯ 컹, 컹!”

제 몸의 서너 배는 될 법한 짐승이 위협하듯 짖는데도 아무개는 시큰둥하게 지형지물이나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무기로 쓸 만한 게···

아무개의 시선이 비껴간 그때. 한껏 몸을 웅크린 짐승이 뒷발을 굴리며 높이 뛰어올랐다. 오후의 햇살이 육중한 거체에 가리며 그늘이 졌다.

동시에 아무개도 지면을 박차고 나갔다. 짐승은 아무개가 떠나간 자리를 내리쳤다. 바닥이 움푹 패며 흙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타닷, 물러선 아무개는 부연 흙먼지 사이로 짐승의 눈을 마주했다. 짐승과 날카로운 시선이 교차한 후. 아무개는 쪽배를 묶어 둔 부두로 빠져나갔다.

지상에서 수면 위로 뻗어 나간 목조 다리를 내달리자 누런 먼지구름을 뚫고 나온 짐승이 추격했다.

고개를 숙인 아무개의 머리 위로 짐승이 앞발을 횡으로 휘둘렀다. 부웅⎯ 섬뜩한 파공성이 아무개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아무개가 좌측으로 도약하자 빈자리를 짐승의 거대한 앞발이 후려쳤다. 우지끈, 목재구조의 바닥면이 뚫리며 앞발이 그 밑으로 빠졌다. 짐승의 거구가 휘청였다.

난간 위에 서 있던 아무개는 짐승의 머리 위로 발뒤축을 내리꽂았다.

곧게 뻗은 아무개의 다리가 반원을 그리며 짐승의 두개골을 정확히 가격했다. 짐승이 머리부터 곤두박질치더니 얇고 연약한 판자가 콰직! 부서졌다. 짐승의 상체가 거진 수면으로 처박혔다.

목재 부두의 허리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끊어진 다리를 훌쩍 건넌 아무개는 쪽배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노를 잡아 들었다. 가늠해 보듯 손안에서 두어 번 빙글 돌려 본 아무개는 짐승을 향해 널찍한 노를 겨누었다.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쳐든 짐승의 머리는 강물에 젖어 축축했다.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 낸 짐승이 한층 사나워진 기세로 아무개를 노려보았다.

“크르릉······.”

짐승은 발톱을 세우고 이를 드러냈지만, 무턱대고 덤벼들진 않았다. 좀 전에 당한 충격이 녀석을 보다 신중해지게끔 한 모양이다. 순간적인 판단과 돌변하는 형세로 보아 흔한 들짐승 따위는 아닌 듯싶었다. 이 섬에 사는 영물이려나.

사냥감이 타념에 빠진 걸 기막히게 알아차린 짐승이 다시금 크게 도약했다. 아무개는 녀석을 피해 물러났다.

아무개가 디딘 발자취를 따라 쿵, 쿵, 육중한 앞발이 반보가량 뒤늦게 따라붙었다. 판자로 엮은 다리는 짐승의 거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족족 구멍이 뚫렸다.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된 다리가 삐걱이며 기울었다. 아무개는 무너지는 다리 끄트머리에 서서 힐끔 뒤를 곁눈질했다. 시리도록 투명한 수면 위로 울부짖는 짐승의 형체가 거울처럼 비쳤다.

아무개는 녀석이 쩍 벌린 시꺼먼 목구멍을 향해 노를 던졌다. 창대처럼 휙 날아간 노가 짐승의 입안에 정확히 꽂혔다.

“···⎯!”

컥, 하고 숨을 들이켠 짐승의 이빨에 짓이겨진 노가 와직, 부러졌다. 거구의 짐승에게 노는 윷가락처럼 작았으나, 목구멍을 쑤시고 들어오자 여간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짐승이 부러진 노 조각을 뱉어내며 켁켁 헛구역질했다.

아무개는 남겨진 나룻배로 올라타 멀쩡한 노를 들었다. 강물에 떠다니는 부서진 판자 조각을 가볍게 디딘 아무개가 허물어진 다리의 잔해로 올라섰다. 노를 수평으로 들고 세운 무릎에 내려치자 콰직 두 동강이 났다.

납작 평평한 부분은 던져 버리고 가느다란 손잡이만 남긴 아무개는 거스러미가 톱날처럼 드러난 단면을 역수로 잡았다.

이걸 놈의 눈에 꽂아 버리면······

“······.”

짐승을 거침없이 두들겨 팰 요량으로 흉기를 제조하던 아무개가 돌연 멈추었다. 부러진 노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고뇌가 깃들었다.

이걸 저놈 눈에 꽂아도 될까?

여느 때라면 망설일 까닭이 없겠으나, 이 섬은 유랑술사가 데려온 곳이 아닌가. 허니 어쩌면, 만에 하나 저놈이 술사님과 관련 있다면.

‘······치명상은 피해야겠네.’

아무개는 쥐가 파먹은 듯 듬성듬성 구멍 뚫린 다리를 재주 넘듯 하며 뭍으로 돌아왔다. 그즈음에서야 정신을 가눈 짐승이 황망하여 두리번거리더니 멀찍이 선 아무개를 발견하곤 씩씩거렸다.

저 녀석. 상당히 골이 난 모양인데.

아무개는 부러진 노를 손끝으로 돌리며 놈을 응시했다. 얕은 강가에 몸을 던진 녀석은 헤엄칠 필요도 없이 제 발로 물속을 걸어왔다.

뭍에 다다른 짐승은 재차 아무개를 공격했다. 아무개는 방어에 치중하며 연신 물러섰다. 혹여나 술사님과 연관 있다면, 그 심사가 손끝을 둔하게 했다.

하나 된통 얻어맞은 짐승은 더욱 흉포해졌다. 자칫 한 대라도 스쳤다간 단박에 뼈가 으스러질 듯 강맹한 공격이 연이었다.

고개를 기울여 놈의 손톱을 피한 아무개는 뭉툭하고 맨들맨들한 노의 손잡이로 짐승의 턱을 쳐올렸다. 놈의 머리가 뒤로 사정없이 넘어갔다. 어울려 놀아주는 데에 영 재주가 없는 아무개는 슬슬 염증을 느꼈다.

그냥 죽일까?

혹 술사님과 관련 있는 짐승이라고 해도, 녀석이 먼저 공격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하면 되지 않을까. 거짓말은 아니잖은가. 녀석이 다짜고짜 덤벼든 건 사실이니.

몹시 강렬한 유혹이었다. 아무개는 내면의 속삭임에 차츰 넘어갔다.

그새 기우뚱한 짐승이 중심을 잡고 일어서서 재차 달려들었다. 저건 지치지도 않나. 아무개는 짜증이 났다.

성큼 다가온 짐승.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외려 반가이 맞이하듯 전진했다.

짐승은 눈앞의 인영을 뼈째 씹어 삼키겠다는 듯 한껏 울부짖으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춘 아무개는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부러진 노를 휘둘렀다. 짐승과 흉신의 공세가 맞부딪히려던 찰나.

“뭐 하시는 건가요?”

유랑술사가 돌아왔다.

그들 사이로 정확히 축지한 술사는 양방으로 손을 뻗었다. 술사의 손끝이 아무개의 콧망울과 짐승의 가슴팍에 톡, 가볍게 닿은 순간. 양측은 수십 보 뒤로 밀려났다. 술사의 축지술로 그들 간의 간격을 띄워놓은 것이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아무개와 짐승을 한 차례 돌아본 술사가 차분히 운을 뗐다. 아무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저게, 날··· 공격했어!”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다다닷, 짐승을 상대할 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려온 아무개가 술사의 등 뒤로 바짝 붙어섰다. 작고 가녀린 초식 동물이 너무나도 무서운 포식자로부터 숨듯이.

머리에는 혹이 나고 턱 밑에는 멍이 들고 전신이 강물에 흠뻑 젖은 짐승은 기막히다는 듯 쿵, 쿵, 묵직한 뒷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짐승이 말을 했다.

“세상에 어느 수호령이 이리 흉악한 것을 가만둘까!”

“우, 우리는···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을 뿐이에요!”

“술사님! 술사님이다!”

“술사님이 돌아왔어!”

굵직한 성인 남성부터 꺄르르 웃는 어린 미성까지. 나이도 성별도 각기 다른 음색이 흘러나왔다. 아무개는 정체불명의 짐승을 보며 눈만 끔뻑였다.

뭐지, 이건.

“······환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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