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어느 누가 ‘실수’로 걷어찬 상대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까 싶다만.
아무개는 두어 걸음 물러서서는 애먼 협곡 끄트머리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뻔뻔하게 외면하는 그 얼굴로 따가운 시선이 꽂혀 들었으나 끝끝내 모르쇠로 일관했다.
“어쩌실래요?”
대강 상황을 정리한 술사가 가짜신령의 의사를 물었다.
“여전히 마을을 떠나고 싶은가요?”
가짜신령은 익숙한 정경을 둘러보았다. 망연자실 넋을 놓은 좌중. 실의에 빠진 깡마른 낯빛과 상처만 남은 협곡의 그늘.
“······네.”
가짜신령이 답했다.
“도자역 탓에 내몰려 생긴 마을이라지만, 정작 바깥에선 기억도 못 한다니. 더는 힘들게 숨어 살 이유가 없네요. ······신령도 가짜였고.”
가짜신령은 술사에게, 혹은 마을 주민들에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되뇌었다.
“이젠 빛을 보며 살고 싶어요.”
광활한 대협곡에는 항시 눅진한 그늘이 진다. 정오나 되어야 겨우 햇살 한 줌 새어드는 어두운 응달. 가짜신령은 지긋지긋한 음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 갈까요?”
술사는 아무개와 가짜신령을 대동한 채 움직였다. 축지술을 난생처음 겪는 가짜신령이 기함하는 비명이 짤막히 울렸다.
“아씨, 계십니까?”
문밖에서 들려온 시비의 부름에 소영은 서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손님? 오라버니들이 아니라, 내게 말인가?”
“네. 주단 금씨의 술사로 성함은 비설이라 하십니다.”
켜켜이 쌓인 서책 틈바구니에서 뒹굴거리던 재효가 벌떡 일어났다.
“금비설? 걔가 왜?!”
“······염공자께서는 아씨의 거처로 출입이 불가하실 텐데요.”
무심코 언성을 높이던 재효는 시비의 지적에 홉 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영과 재효는 둘이 함께 오만 곳을 싸돌아다니며 별별 꼴을 봐 왔다. 이제 와 한방에 있는 것쯤은 대수롭지도 않다만, 소영의 오라버니들은 그리 여기지 않았다. 재효에게 소영의 거처와 가장 먼 곳에 객실을 마련해 주고 출입을 엄금해 버린 것이다.
물론 재효가 곧이곧대로 따를 리 없다. 멀고 먼 소영의 거처와 제 방을 오가기 귀찮았던 재효는 아예 소영의 곁에 눌러앉아 버렸다. 결국 오라버니들의 계획과는 영 딴판이 되고 말았다.
“됐습니다. 어차피 염공자께서 지키지 않으리란 것쯤은 다들 예견했으니까요.”
시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강암 석씨 종가에서 일하는 자라면 누구나 안다. 하지만 도련님들, 소영의 오라버니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 현실을 부정했다. 재효를 소영에게서 떼어 내려 온갖 수작과 뒷공작을 벌이며.
“손님을 이곳으로 안내해다오.”
“네, 아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비가 손님을 맞으러 떠난 후. 재효가 무릎걸음으로 소영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금비설을 만날 거야? 이 난장판에서?”
그제야 서책으로 쌓아 올린 언덕을 발견한 소영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앉을 자리라도 만들어 보도록 하지.”
시비가 금비설을 안내하기까지. 소영과 재효는 서둘러 서책을 구석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꾸역꾸역 공간을 확보하자마자 인기척이 들렸다.
“아씨.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소영은 직접 나서서 문을 열어 주었다. 드르륵, 열린 문틈 새로 옛 친우를 물끄러미 보던 소영은 곧 몸을 비켜 주었다.
재효는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얼굴로 옛 친우를 노려보았다. 비설은 재효의 타오르는 눈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난장판이 된 방구석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꼬락서니 보게. 손님 대접이 이리 형편없어서야.”
“손님은 무슨. 네가 언제부터 손님이었어? 불청객이지.”
재효는 퉁명스레 면박을 주면서도 비죽 튀어나온 서책을 버선발로 은근슬쩍 밀어 넣었다. 금비설은 켜켜이 쌓인 서책을 집어 들더니 제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대귀인전기에 유랑야담, 기예록까지. 유랑술사 뒷조사라도 하나 보지?”
“뒤, 뒷조사라니! 그저 존경하고 흠모하는 대선배의 행적이 알고픈 후배의 마음이지!”
“이리 번거로운 작업을 할 바에야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일전에 유랑술사와 동행한 적도 있잖나.”
“뭐어···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아서.”
까칠하게 떽떽거리던 재효가 돌연 차분해졌다. 의아해하는 비설에게 소영이 말문을 열었다.
“어쩐 일이지. 네가 예까지 오다니.”
“맞아. 너 이제 우리랑 안 어울릴 거라면서? 수준 차이 때문에 못 놀아 주겠다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제 발로 오셨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재효가 비설에게 방석을 던졌다. 면전으로 날아드는 방석을 손쉽게 낚아챈 비설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금비설은 잠시간 침묵했다.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는 모양새가 자못 어려운 주제인 듯했다. 재효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방만한 자세로 발끝을 까딱였다.
“금비설. 왜 답지 않게 머뭇거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선 안 된다.”
마침내 비설이 운을 떼자 소영의 눈매가 한층 가늘어졌다. 재효는 도로 몸을 일으켜 허리를 꼿꼿이 폈다.
“뭐 이리 심각해? 너 사고 쳤냐?”
“헛소리.”
짧게 일갈한 비설이 한숨을 토해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너희. 나랑 작업 하나 하자.”
“뜬금없이 뭔 소리람. 작업? 잘난 너희 가문 술사 나리들을 두고 왜 수준 낮은 우리를 찾냐?”
한쪽 입꼬리를 비딱하게 끌어올린 금비설이 자조적인 어조로 토로했다.
“어머님 뒤를 캐는데 가문 사람의 힘을 빌릴 수는 없잖아.”
“뭐? 너희 어머님?”
화들짝 놀란 재효가 금비설을 타박했다.
“야, 야. 네가 아무리 어머님이랑 사이가 별로라지만, 이건 아니지 않냐? 불만 있으면 말로 해, 말로. 치사하게 뒤에서 꼼수 부리지 말고.”
“주단 금씨 종가 외곽에는 거대한 미로가 있지.”
비설은 재효를 말끔히 무시했다.
“누가, 어째서, 어인 용도로 세운 건지 몰라. 어릴 적부터 결코 접근해선 안 된다며 귀가 따갑도록 주의를 받은 곳이지. 정작 그리 경고하는 어른들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듯했지만.”
“어머니 뒤를 캔다는 놈이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
“풍문에 의하면, 그곳에 귀신이 산다나 봐. 미로에서 길을 잃거든 무사히 나갈 수 있게끔 친절히 안내해 준다지. 미로를 떠돌던 귀신이 산 사람과 마주쳤을 때 처음으로 하는 일은 이름을 묻는 거야. 다른 성씨는 무어든 개의치 않지만······. 만약 금씨라면, 미로 속에 영원히 가둬 버린다더군.”
하지만 어느 동네든 사고뭉치는 있기 마련이지. 금비설은 재효를 힐끔 곁눈질하며 부연했다.
“내가 어릴 적에 본가와 방계의 골칫덩이 몇몇이 뭉쳐서는 몰래 미로로 숨은 적이 있어. 뒤늦게 사라진 꼬마들을 찾으러 갔지만, 돌아온 녀석들은 모두 정신을 놓았다.”
꼬투리 잡고 핀잔을 줄 기회만 엿보던 재효는 예상외로 심각한 이야기에 차츰 몰입하게 되었다.
“실성한 듯 거품 물고 횡설수설하면서도 입을 모아 강변하더라. 미로에서 원혼을 보았다고.”
당치않은 소리지. 주단 금씨의 본산, 종가 지척에 원혼이 활보하는데 재령도 않고 가만둘 리가 없잖아?
한데 녀석들이 설명하는 원혼의 생김이··· 묘사가 제법 일관되고 구체적이더라고. 옷이며 장신구, 머리 모양까지.
“당시에 나는 무지하여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아.”
재효와 소영을 지그시 마주하며. 금비설이 나직이 말했다.
“놈들이 봤다는 원혼은, 연나라 무렵의 복식이야. 이백 년 전에 멸망한 제국의 차림새였다고.”
“······.”
“하잘 거 없는 귀담이나 떠벌리려고 온 건 아니야. 잊고 지낸 옛일이 새삼 떠오른 까닭은······.”
탁, 비설의 손끝이 서탁을 두드렸다.
“······어머니께서 그 미로에 들어가는 걸 목격했거든.”
“가면 안 되는 곳이라며? 너희 어머님이 거길 왜··· 잠깐, 어머님은 괜찮으셔? 미로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모두 이상해졌다며.”
“멀쩡하셔. 평소와 같이. 해서 뒤를 캐 보려고.”
서탁에 팔을 걸친 금비설이 턱을 젖히고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키지 않거든 거절해. 이런 제안을 입 밖에 꺼내라도 볼 수 있는 게 너희뿐이라는 현실이 나도 암담하니까.”
“부탁하는 처지에 말을 참 곱게도 한다?”
주단 금씨에서 알게 모르게 소외당하는 금비설이다. 굴러들어오는 인복도 걷어차는 모난 성품이니 허심탄회하게 흉금을 털어놓을 벗이 있을 리 만무하지.
신뢰할 이가 부재하니 종내에는 연 끊은 옛 친우들을 찾아온 게다. 심지어 제 쪽에서 절교 선언한 상대를.
재효는 입술을 삐죽이며 소영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교환한 소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재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한 숨을 흘려낸 뒤 비설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정확히 무얼 어찌하자는 건데?”
험악한 표정과 달리 자못 긍정적인 응답이다. 금비설은 무심코 휘어지는 입꼬리를 서둘러 감추며 정이 과히 넘치는 호구 둘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염재효. 너 아직 도깨비 감투 갖고 있지?”
“어? 그···렇지?”
“좋아. 덕분에 일이 아주 수월해지겠어. 그렇고말고.”
기묘한 미소가 맺힌 입술로. 금비설이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어머니께서 미로에 가실 때. 우리도 함께 따라갈 거야.”
도깨비 감투를 쓰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