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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68)화 (68/138)

68화

공중에서 조우한 두 쌍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이제 막 의식을 되찾아 흐리고 초점 없는 동공에 상대의 낯선 표정이 명경처럼 비쳤다.

한발 늦게 쫓아온 백지 부적이 두 인영을 휘감았다. 술사는 허공에 둥실 떠다니는 부적을 징검다리처럼 밟아 넘었다. 하얀 부적이 회오리치듯 지상을 향해 나선을 그렸다. 부적을 계단 삼아 딛고 내려선 술사가 지면에 사뿐 다다랐다. 두 팔에 아무개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술사님?”

꿈의 여파에서 갓 깨어난 아무개가 뒤늦게 술사를 알아보았다. 홍채와 동공의 경계가 불분명한 새까만 눈이 놀라움을 담고 크게 벌어졌다.

“술사님, 삿갓···.”

“네?”

그는 아무개가 지적하고서야 삿갓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듯했다.

일순 술사에게서 표정이라 할 것이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생물이 무생물로 화하듯 급격한 변화였다.

아무개는 서둘러 손을 내뻗었다. 술사의 눈을 가리자 그의 속눈썹이 깃털처럼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눈··· 감고 있어. 가져올게···.”

등과 오금을 받쳐 주던 술사의 팔에서 내려온 아무개는 멀지 않은 곳에 내동댕이쳐진 삿갓을 발견했다. 서둘러 삿갓을 챙겨와 까치발을 들고 술사의 머리 위에 살포시 얹어 주었다.

“술사님···?”

삿갓의 너울이 바람결에 살랑살랑 부풀었다. 일렁이는 너울을 사이에 두고 아무개가 어물어물했다.

“술사님··· 괜, 찮아?”

굳게 닫힌 듯하던 술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살며시 열렸다. 그가 은근하게 내리뜬 눈으로 나직이 답했다.

“네. 괜찮아야죠.”

술사는 여느 때처럼 ‘그럼요, 물론이죠.’ 하고 웃어넘기지 않았다. 괜찮아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 같은 대답.

그가 한 손을 들어 삿갓을 깊게 눌러쓰자 모양 좋은 입술과 날렵한 턱선만이 언뜻 보였다. 낮게 잠긴 음성이 아무개를 향했다.

“아무개 님은 어때요. 혹 불편한 곳이 있나요? 듣자 하니 식사에 수면제를 탔다던데.”

“아······ 어쩐지.”

이상하게 졸린다 했더니. 아무개는 문제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옷깃에서 나비가 비죽 튀어나왔다.

⎯ 어랍쇼? 이 동네는 난리통이네요. 주민들이 진상을 알아차렸나 봅니다?

나비는 가짜신령과 협곡 주민들이 아우성치는 광경을 남의 일인 양 태연히 평했다. 술사가 너울 자락을 정돈하며 확인차 물었다.

“일부러 때맞춰 환상을 거둬들인 게 아닌가요?”

⎯ 에잉,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손님께서 깜빡 잠이 드시기에 이때다 싶어 고놈의 악몽을 봐두려 했습죠. 한데 우리 손님 의식을 뚫기가 하도 힘들어서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보니 그만······

아무개는 꿈장수의 주저리에 정색했다.

“내 꿈을··· 훔쳐봤어?”

⎯ 아이고, 손님. 너무 노여워하진 마십쇼! 손님 의식 세계가 하도 복잡해서 빙~ 둘러 가는 바람에 막판 쬐끔밖에 못 봤습니다요!

“어쨌든··· 보긴 봤다는 거네?”

⎯ 아이 차암. 이게 다~ 손님의 악몽을 면밀히 살펴 더 나은 해법을 제공하고자 하는 저의 세심한··· 아앗!

아무개는 나비를 휙 낚아챘다. 볼일도 봤겠다. 이번에야말로 으깨어 터트릴 셈이었다.

한데 흉신이 손아귀에 힘을 주기 직전, 술사가 운을 뗐다.

“아무개 님. 수면약 때문에 잠이 드셨죠? 그 사이에 악몽을 꾸신 건가요?”

“···어? 으, 응··· 그렇지.”

문득 술사의 손등에 새겨진 흉터가 아무개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쩐지 보고 있기가 힘들어 괜스레 눈만 굴리자니 멀찍이서 난리법석인 협곡 주민들이 언뜻 비쳤다.

“저기는··· 왜 저래?”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 시작한 딴소리였으나, 술사는 그간의 사정을 조근조근 설명해 주었다. 아무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대대손손 신령입네 뻐기던 놈은 무능한 가짜였고 협곡 주민들은 꿈장수에게 농락당했다.

“너··· 속셈이 뭐야?”

아무개는 움켜쥔 손안의 나비를 싸늘히 내려다보았다. 몸부림치던 나비가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 저는 단지 청을 들어줬을 뿐입니다요!

“누가··· 너한테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랬어?”

⎯ 아뇨? 제가 받은 청은, 소녀 신령의 고통을 다른 주민에게도 분담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요.

누가 꿈장수에게 그리 청했을까. 굳이 캐묻지 않아도 금세 알 수 있었다. 먼 옛날. 홀로 소녀 신령의 앞날을 걱정하며 짊어진 의무를 분담하고자 할 만한 이라면 뻔하잖은가.

죽임당한 머슴.

⎯ 참, 손님은 머슴이 죽고 난 후에 일을 모르시죠? 소녀 신령이 협곡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상처가 깨끗이 아물었더랩니다. 피에 속한 치유의 권능이 돌아온 게죠.

간절히 살리고자 했던 머슴은 차디찬 시신이 되었건만. 영 엉뚱한 놈들만 치료해 주게 생겼으니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지요. 어찌하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원.

발성기관도 없는 나비의 형상으로. 꿈장수는 쯧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흉내 냈다. 아무개는 나비가 보여 준 머슴의 환영을 설명해 주었고, 술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추측해 보자면, 소녀 신령님의 권능은 협곡 마을이라는 지역에 한정되었을 거예요. 머슴을 살려 내지 못한 까닭은, 신령이 제 권역을 벗어나 힘이 급감한 탓이겠죠.”

협곡 마을의 신앙에서 비롯된 치유의 피와 이를 계승한 혈족을 가리켜 술사는 ‘만들어진 신령’이라 지칭했었다. 쉽게 만들어진 만큼 한계도 분명하리라고.

제 터전에서 강력한 권능을 발휘하는 신령이 영지 밖에서 약해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미력해질 뿐. 아예 무능해지는 것은 아닐진대.

결국 만들어진 신령의 한계는, 작고 좁은 권역이었던 걸까. 혹은··· 신령을 빚어낸 사람들의 한계였을까.

“넌··· 청을 받으면, 아무거나 다 들어줘?”

아무개는 나비를 짤짤 흔들어 댔다. 아씨와 노비가 귀장군과 동시대임을 감안하며, 그 자녀인 머슴이 소녀 신령을 만난 시절을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다.

즉, 꿈장수는 한 세기를 넘어서는 세월 동안 협곡 마을을 속여 온 것이다.

⎯ 그렇지 않습니다. 제 나름의 신념에 따른 원칙이 있습죠!

“무슨··· 원칙.”

⎯ 저는 기특한 아해들의 청만 들어준답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으나, 아무개는 과거 금역에 들어선 노비에게 나비가 건넨 언담을 떠올렸다.

「너희 이야기 속 신령들은 언제나 교훈을 주지.」

「기대에 부응해 주마. 어리고 기특한 것에겐 상을 주어야지. 인간 아이야, 원하는 게 있느냐?」

당시 노비는 눈앞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아씨를 위해 목숨을 걸었기에 상을 받았다.

하면 머슴은 대관절 얼마나 기특하기에 백여 년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 매여 있었던 걸까. 딱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건만, 나비는 아무개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멋대로 답했다.

⎯ 걸핏하면 사고 치고 패악을 부리며 협잡이나 일삼던 놈이었습니다. 불가해한 사유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비뚤어진 몹쓸 놈팡이였더랬죠. 그런 놈이 다른 이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인간들은 개과천선이라 하던가요? 참으로 기특하지 않습니까!

아무개는 설핏 눈매를 찌푸렸다. 틀린 말은 아닌데. 아주 맞는 말도 아니고?

“궤변··· 같은데.”

⎯ 그런가요? 어찌 됐든 저는 그 아이의 청을 충실히 들어주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에게 고통을 나누어 주어야지요.

“······언제까지.”

⎯ 글쎄요. 이 마을이 존재하는 한, 계속?

부탁받은 것은 ‘마을’ 주민들에게 고통을 분담시키는 것.

그리하여 나비는 머슴을 죽인 장정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장성하여 세월에 스러질 때까지 요구를 이행했다. 마을이 건재하는 한, 그들은 함께 고통을 나누어야 하므로.

⎯ 저는 열심히 했습니다요!

마을 전체에 환영을 꾸며 내기엔 몽환의 나비가 지닌 본신의 권능이 다소 부족헸다. 모자란 꿈은 다른 데서 빌려와 채워야 했고, 때문에 몽환전을 운영하며 타인의 꿈을 수집해 온 것이다.

몽환전에서는 사람과 직접 접촉하는 만큼 이질감을 줄이기 위해 나비는 가장 오랜 시간 지켜봐 왔고 가장 잘 아는 인간의 외형과 성격을 빌려왔다. 하여 머슴을 흉내 낸 꿈장수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나비는 자신이 그간 얼마나 열과 성을 다했는가 피력했다. 그에 술사는 짧은 평을 남겼다.

“이래서 신령에게 함부로 부탁 따위를 하면 안 되는데 말예요.”

그들의 사고방식은 근본부터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한숨처럼 읊조린 술사는 축지로 단숨에 좌중 가운데에 섰다.

그가 무어라 말을 주고받는 동안 아무개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괜히 서둘렀다가 마을 이장 놈이 눈에 띄면 족치고 싶어질 테니까.

식사에 수면약이라니. 아무개는 이리 간단한 함정에 빠진 책임을 스스로에게서 찾았다. 필시 자신의 불운과 부주의함이 일으킨 사고이리라.

하나 저들을 가만둘 까닭도 없잖은가?

아무개는 팔짱을 꼈다. 술사님이 있으니 참아야 할 텐데··· 조금만 방심했다간 자칫 실수해 버릴 것 같았다.

“······고의는 아니었소이다.”

아무개가 다가오자 이장이 어물어물 변명을 주워섬겼다. 아무개는 속으로 연신 되뇌었다.

참아야지. 참아야 해.

“그래···?”

“수면제를 타긴 했으나, 다른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소. 갑자기 뱀이 나와서 너무 놀란 바람에 그만···.”

팔짱을 단단히 끼고서 이장이 지껄이는 말을 삐딱하게 듣던 아무개는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고도 선명했다. 신속하게 치고 빠진 각법에 이장이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형편없이 고꾸라졌다.

참아야··· 하는데.

“······실수야. 고의는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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