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웁, 우읍···!”
아이는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 냈다. 역류하는 속이 따가워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시야마저 차츰 어두워졌다. 나뭇잎이 멀어진 탓이다.
평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잔혹한 광경. 차마 눈 뜨고 보기 두려웠으나, 캄캄한 어둠 속에 남겨지는 쪽이 더 무서웠다.
아이는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부러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은은하게 휘광하는 나뭇잎만 따라갔다.
나뭇잎은 막힌 벽에 대고 연신 부딪혀 댔다.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이파리 아래로 도드라진 문고리가 보였다. 아이는 심호흡하며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열린 문 틈새로 주홍빛이 침투하며 한층 밝아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는데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 너는···!”
“개덕이?”
안쪽에서 문이 열리자 흠칫하던 개덕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쳤다.
“이씨, 깜짝 놀랐잖아!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난 줄 알고.”
손에 든 빗자루로 문을 겨낭하던 개덕이 머쓱한 얼굴로 자루를 바로 세웠다. 아이가 걸어 나오자 개덕이 질색하며 물러났다.
“잠깐, 오지 말아 봐. 저 방에 있었다면 너도 도자역 환자일 텐데. 괜히 나한테 옮길 생각 말라고.”
“무슨 헛소리야. 난 멀쩡하거든?”
아이가 방금 막 뜯어낸 손가락의 신선한 피를 들이밀자 개덕이 눈썹을 들썩였다.
“어···? 이, 이상하네. 그 방에 있는 건 폐기처분용이랬는데. 분류를 잘못하셨나?”
“폐기처분? 그건 또 무슨···.”
때마침 문 틈새로 빠져나온 나뭇잎이 멀리 날아갔다. 아이가 헐레벌떡 몸을 돌리자 개덕이 붙잡았다.
“어디 가?”
“당연히 여길 벗어나야지. 같이 갈 생각 없으면 놔.”
“벗어난다고? 가능하긴 해?”
“네가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도망칠 기회를 놓치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널 죽여 버릴 테니까. 당장 놔.”
서슬 퍼런 어조에 개덕이 움찔하며 아이를 놓아주었다. 아이는 벌써 한참 멀어진 나뭇잎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얼결에 휩쓸린 개덕도 함께 뒤쫓았다.
“여긴 주단 금씨에서 만든 미로야. 어떻게 벗어나려고?”
“저 나뭇잎을 따라가면 돼.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 나중에 해.”
외부와 철저히 분리된 미로의 세계. 창 없는 내부를 밝히는 것은 화사(火士)가 빚어 기름 없이 타오르는 등잔이오, 텁텁한 공기를 순환시키는 것은 풍사(風士)가 접어 낸 바람개비였다. 나뭇잎의 은은한 빛무리는 등잔의 주홍빛과 상이한 색감으로 멀리서도 구분이 용이했다.
“너도 참 운이 나빴네. 여기 와서 호의호식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미로에 들어와서는.”
아이보다 덩치도 보폭도 큰 개덕이는 보조를 맞추어 달리면서 잘도 떠들어 댔다.
“여기 사람들··· 아니 허수아비들? 하여간 제정신이 아니야.”
연고 없는 거지랑 난민을 모아서 도자역 실험하는 것 같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병에 걸리는지, 어찌하면 피할 수 있을지, 도자역에 걸리고 얼마 후에 몸이 굳는지, 얼마나 굳어야 자기 그릇처럼 깨지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야.
딱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개덕은 제 발 저린 양 줄줄이 털어놓았다.
“나는 운이 좋았지. 허드렛일 하는 쪽으로 붙었거든. 한 번 미로에 들어가면 절대 밖으로 빼 주지 않는다더라. 여기서 당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노예를 자처해야겠더라고.”
부역자가 되어 살아남길 택했구나.
힐난할 뜻은 없었다. 자신도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살아남고자 무슨 짓이든 할 테니.
가령, 다리 밑에서 동고동락하던 거지들이 실험 후 처분당해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방에 친구를 놔두고 감시하는 일일지라도.
하여 문밖에 걸린 자물쇠도, 열쇠 꾸러미를 등 뒤로 숨기던 개덕의 손짓도. 아이는 모른 척 못 본 척했다.
물론 분류를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개덕의 말도 믿지 않았다. 저 방에 던져둔 것 또한 일종의 실험이리라. 가령··· 죽은 도자역 환자의 시신에도 전염성이 남아 있는가, 라던지.
“내가 여기 들어온 후로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너 뛰는 거 보니 오래 굶지는 않은 것 같네.”
도움 안 되는 놈. 아이는 짜증이 났으나, 그 순간 한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나 말고 제일 최근에 들어온 녀석 본 적 있어? 바짓단이 찢어진 남자앤데.”
“미안하지만··· 곧 죽을 놈들을 일일이 보고 싶지는 않아서. 잘 확인하지 않아.”
“하긴 그렇겠네. 그럼 미로에 들어오고 제일 먼저 거쳐 가는 곳은 어딘지 알아?”
“분류실일걸.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곳. 한데 가는 방법은 나도 몰라. 한번 들어오면 여기저기 길이 꼬여 있어서 통 모르겠더라. 허수아비들도 내부 구조를 다 알지는 못하는 것 같던데.”
그럼 됐다. 아이는 마음을 정했다.
형님이 준 나뭇잎은 반드시 출구를 찾아낼 것이다. 하면 입구 가까이에 있다는 분류실도 근방에 있을 테지. 가능하면 들러서 찾아보고, 없으면 포기한다. 그 이상은 제 능력으로 역부족이었다. 아이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힘써 보기로 했다.
허수아비들은 귀가 없으니 뛰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발소리 따윈 개의치 않고 있는 힘껏 내달렸다.
오른쪽, 왼쪽. 빙글 돌아 다시 왼쪽. 혼자서는 결코 빠져나가지 못했을 복잡한 길을 한창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뭇잎이 멈추었다.
거대한 문 앞에서 톡톡 몸을 부딪치며 빠져나가려 용을 쓰는 나뭇잎. 개덕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짜 출구잖아? 내가 첫날 이 문으로 들어왔어! 확실해. 여기로 나가면 미로 바깥이야!”
“분류실은?”
아이는 개덕이 가리킨 옆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바지 밑단이 찢어진, 자신을 대신해 잡혀간 꼬마가.
“······? 누구야?”
벽 모서리에 웅크려 앉은 사내아이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 녀석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일어나.”
“어딜 가자고···?”
“몰라. 하여간 이 미로만 아니면 돼.”
“······안 돼. 못 가.”
“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주단 금씨 놈들이 거지랑 난민들 모아서 도자역 실험한대. 가만있다간 너도 당할 거라고!”
힘없이 축 늘어진 녀석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 애썼다. 팔꿈치가 잡혀 들린 사내아이가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알아. 그러니 소용없어.”
“소용없기는 뭐가···!”
사내아이는 몸을 돌려 구석에 가려져 있던 반대쪽 팔을 보여 주었다. 손목 아래가 부서지고 없는 팔을.
“난 이미 도자역에 걸렸거든.”
······말도 안 돼.
손을 놓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동안 아이의 머릿속에는 그 한 마디만 맴돌았다. 말도 안 돼.
“너랑 나는, 여기 들어온 지 고작 하루 차이란 말이야! 그런데 벌써?!”
개덕이 비명처럼 절규하는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신 답했다.
“근래 들어 도자역 발현 속도가 엄청 빨라졌대. 예전에는 몇 주는 지나야 나타날 증상이 하루 이틀 만에 발현되기도 한다던가.”
그래서 비상이라고, 예까지 오는 동안 허수아비가 하나도 보이지 않던 까닭이 그 때문이리라고, 개덕이 덧붙였다.
“너한텐 잘됐지. 덕분에 감시가 소홀해졌으니. 이 틈에 도망가기 좋잖아?”
옳은 말이다. 이 밖은 주단 금씨 술사들이 넘쳐나는 종가. 미로 안에서 힘을 빼고서는 탈출 가능성이 극도로 낮아진다. 모두 맞는 말인데···.
웅크려 앉은 사내아이의 찢어진 바짓단을 보니. 차마 긍정할 수가 없었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바닥에 아교라도 칠한 듯 도통 떨어지질 않는 발을 애써 움직여 분류실을 나섰다.
틱, 틱, 얇고 가녀린 나뭇잎이 육중한 문에 저항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여전히 은은한 빛을 발하는 나뭇잎을 보며 아이는 대문 앞에 섰다.
모르겠다. 일단 형님을 만나자. 형님이라면, 무언가 답을 줄지도 몰라.
아이는 상황을 회피하려는 듯 형님을 떠올렸다. 형님이라면, 그래, 형님이라면······
끼이익⎯ 문이 열리고 밖에서 경비를 서던 허수아비 두 개가 동시에 안쪽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피로 그려낸 두 쌍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혈흔으로 덧칠한 입술에서 어눌하게 뚝뚝 끊어지는 괴음이 흘러나왔다. 나뭇잎이 가파르게 허공을 날아가고 아이는 문지방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콰당!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는 노면에 엎어진 채 눈을 치켜뜨고 뒤돌아보았다. 자신에게 발을 건, 개덕을 향해.
“술사 나리! 제가 도망치는 놈을 붙잡았습니다!”
녀석이 희번득한 눈으로 외쳤다.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던 걸까.
도망을 포기한 부역자는, 제 위상을 공고히 하고자 친구를 팔아넘겼다. 하긴, 애초에 친구라 할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지만.
아이는 으득으득 이를 갈며 일어나고자 했다.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아이는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다리가 부서졌다.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끊어졌다. 나무 작대기를 뚝 부러뜨린 듯 종아리 아래부터 두 동강 난 다리에선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어떤 감각도, 고통조차 없었다.
“아, 아아···!”
아이는 신음했다. 이럴 리 없어. 이럴 리 없다고!
좀 전까지 피 흘리던 검지의 상처를 헤집었다. 손톱을 세워 검붉은 딱지를 긁어내자, 딱지 대신 손톱이 깨지고 부러졌다. 아이는 두 팔로 엉금엉금 기어가려 했다.
“수, 술사 나리님들. 이상합니다. 이, 이 녀석, 조금 전만 해도 손가락에서 피 흘렸다고요! 일다경도 안 지났을 텐데. 고작 그사이에 도자역에 걸리다니?!”
허수아비의 나무다리가 아이의 얼굴 앞에 콱-! 내리꽂혔다. 더는 나아갈 수 없다는 듯이.
“······최···단기간··· 발현···자···다···.”
“가···져···가서··· 확인···을······.”
허수아비가 아이를 둘러업고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볏짚과 나무로 만들어진 딱딱한 어깨에 짐짝인 양 얹어진 채로. 아이는 거미줄처럼 금이 간 손을 미로 밖으로 한껏 내밀었다.
형님, 내가 말했잖아. 세상은 악의로 가득하다고. 이유 없는 선의는 없다고.
형님이 이상한 거라니까.
쿵⎯ 문이 닫혔다. 익숙한 어둠이 찾아왔다.
***
아무개가 협곡 절벽에서 추락한 직후.
백지 부적이 도중에 소진되자 당혹한 듯하던 술사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협곡의 경사면이었다.
지표면과 수직을 이루는 가파른 경사로 단숨에 축지한 그가 비탈에 발을 내디디고선 허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아슬아슬 헐렁하게 묶인 끈이 풀리며 삿갓이 날아갔다. 술사는 두 팔을 뻗어 추락하는 아무개를 품 안에 담아냈다.
그 순간, 흉신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