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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66)화 (66/138)

66화

일순 소름이 돋았다. 서늘하게 식은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은 채 아이는 서둘러 전각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와 제자리에 누운 후에도 심장의 떨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한 시진마다 허수아비가 다가오는 쿵쿵 소리에 비명을 참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결국 아이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거지들 틈에서 멍하니 넋 놓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일어나. 모두 집합하래.”

“집합?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전에도 이런 식으로 전부 다 모이게 한 적이 있어?”

“아니. 내 기억으론 이번이 처음인데.”

아이는 불안해졌다. 갑자기 왜 집합하라는 거야?

거부하고 싶었다. 하나 그랬다간 필경 주목을 받을 테지. 아이는 별수 없이 거지와 난민들 틈에 섞여 마당으로 나섰다. 붉은 눈의 허수아비를 보자 절로 몸이 굳었으나, 억지로 걸음을 떼어냈다.

모두들 허수아비의 인도에 따라 행과 열을 맞춰 정연하게 섰다. 영문을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잠에 취해 눈곱을 떼고 하품하는 등 평소처럼 늘어진 모양새였다. 그들 사이로 허수아비가 쿵쿵 지나갔다.

한 줄에 하나씩.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허수아비의 행태에 아이의 심장이 널을 뛰었다. 순서에 따라 자신이 속한 줄을 살피러 온 허수아비를 보자 아찔한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허수아비의 나무 팔에 걸린 찢어진 천 조각. 지난밤, 자신이 쌀알을 담아 구멍 뚫은 그것이었다.

눈치챘구나.

하지만 정확히 누가 벌인 짓인지는 아직 모르는 듯싶었다. 그러니 죄다 모아놓고 확인하려는 게지.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면 즉각 의심을 살 터. 아이는 눈물이 질금 새어 나오려는 것을 하품인 양 꾸며 냈다.

쿵··· 쿵··· 쿵···⎯!

허수아비가 가까워졌다. 주먹 쥔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찼다. 아이의 고개가 절로 굽어졌다. 차마 허수아비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쿵··· 쿵··· 쿵······

마침내 고개 숙인 시야 내로 허수아비의 나무다리가 보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기다리는데···

이 허수아비. 움직이질 않는다.

옆으로 더 가지 않고 멈춰선 허수아비의 붉은 눈이 따갑게 내리꽂히는 듯했다. 아이는 만약을 대비해 소매 안에 넣어 둔 나뭇잎을 움켜쥐었다.

“너······ 따라···나···와···.”

뚝뚝 끊기는 음색이 섬뜩했다. 아이는 눈을 질끈 감고 나뭇잎을 꺼내 들었다.

“엑, 저요? 갑자기 왜?”

아이가 결심을 마친 그 순간, 우측에 선 꼬마가 되물었다. 아이는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허수아비가 제 옆의 사내아이를 향해 명했다.

“나···와라···.”

“에휴. 하여간 이놈의 허수아비는 자기 할 말만 한다니까.”

툴툴거리며 줄을 이탈하는 사내아이. 이어서 허수아비들이 소집을 해제했다.

아이는 얼떨떨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각자 흩어지는 인파 속에서. 홀로 멍하니 선 아이는 뒤늦게 발견했다. 허수아비가 데려가는 사내아이의 바짓단. 끄트머리가 찢어진.

“···설마.”

저 녀석, 내가 쌀 주머니를 만드느라 찢은 옷을 입은 건가?

그럼 허수아비들이 저 애를 데려간 연유는······.

“······!”

아이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안 돼. 안 된다고.

그 녀석은 아무 상관 없어! 너희 뒤를 캔 건 나야! 오해라고!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은 없었다.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막아 호흡조차 여의치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홀로 남아 있던 아이가 비틀비틀 전각으로 들어갔다. 대관절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다. 아이는 구석진 모서리에 틀어박혀 웅크리고 앉았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염불 외듯 중얼거렸다. 아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미안해. 나 때문에 오해받게 해서 미안해. 내가 진짜라고, 너희가 찾는 녀석이 바로 나라고, 제때 나서지 못해서 미안해. 겁쟁이라서 미안해.

안심해서 미안해.

“얘. 너 괜찮니?”

실성한 듯 넋 놓은 아이에게 낯선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종일 굶었다며? 거지는 따로 챙겨 주는 사람 없어. 자기 몫은 자기가 알아서 간수해야지.”

입으로는 통박을 주면서도 막상 여인의 손은 아이 몫의 밥을 챙겨 들고 있었다. 발치에 그릇을 두고 떠나려는 그 발목을 덥석 붙잡았다.

“······! 무슨 짓이야?”

미로에 도자역 환자가 있어.

말하고 싶었다. 버거운 진실의 무게를 나누고 싶었다. 하나 망설임이 재차 목을 옥죄었다.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어?

아이는 자신을 팔아넘긴 주모를 떠올렸다. 만일 금씨에서 첩자를 심어놨다면? 허튼 마음 먹는 녀석들을 솎아 낸다면?

“이만 놓아주련?”

여인은 아이의 손에서 발목을 빼냈다. 미간을 구기는 거로 보아 썩 유쾌하진 않은 모양이다.

“······고마워.”

아이는 여인이 가져다준 밥을 우걱우걱 쑤셔 넣듯 퍼먹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오로지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우선 필요한 것은 증거. 다짜고짜 주단 금씨 종가에 도자역 환자가 있다고 주장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터. 어찌해야 증거를 구할 수 있을까.

손가락은, 아직 남아 있을까?

아이는 창밖으로 눈을 내밀어 허수아비를 세어 보았다. 어제와 특별히 다른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리 보일 뿐, 모종의 술법으로 감시할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소매 안쪽에 숨겨 둔, 형님이 준 나뭇잎을 살살 문질러 보았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으면 사람이 좀 더 대범해지는 모양이다. 전에 다리 밑에서 지낼 적에는 누가 끌려가든 말든 신경 쓸 여력도 없었을 텐데.

아이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제 코가 석 자인 거지 고아가 남을 신경 쓰게 만들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그 형님은.

종일 나뭇잎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형님을 부르고 싶었지만, 금씨 술사들이 ‘제힘도 못 다루는 초짜’라고 떠들던 것이 아이를 주저하게 했다. 실제로 형님이 술법에 미숙한 초심자라면, 주단 금씨 술사가 발에 채도록 흔한 종가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밤이 되도록 아이는 고뇌를 거듭했다. 결국 이부자리에 몸을 누인 후에야 결심이 섰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 보자고.

“······별로. 내 한 몸 희생하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거든?”

지난밤 한 차례 오고 간 길을 더듬어가며. 아이는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변명처럼 주워섬겼다.

인적 드문 샛길을 따라 작은 뒷문으로. 기이하리만치 인적이 없는 그곳을 아이가 서성였다.

여기 어디엔가 떨어졌을 텐데. 손가락이.

잔뜩 숙인 목이 뻐근해지도록 노면을 헤매길 한참. 마침내 흙먼지에 파묻힌 손톱이 보였다. 아이는 반색하며 손가락 주위의 흙을 털어냈다. 덥석 잡기에는 불안하고. 혹시 모르니 옷소매로 감싸 쥐려던 찰나.

쿵··· 쿵··· 쿵···⎯!

귀에 익은, 익숙한 소리.

쿵··· 쿵··· 쿵. 쿵. 쿵, 쿵, 쿠궁!

점차 가까워지는 그 소리에 아이의 심장이 동조하듯 가파르게 넘실거렸다.

아이는 허수아비를 피해 몸을 숨기려 했으나,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사방 도처에서 쿵쿵쿵! 허수아비의 나무다리가 지면을 박차고 북처럼 울려 댔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하던 아이의 앞에 기어코 허수아비가 나타났다. 하나, 둘, 셋, 넷···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허수아비가 아이를 둘러쌌다.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이리······ 와···.”

아이는 허수아비에게 손가락을 던지고는 냅다 줄행랑쳤다. 하나 이미 포위된 상황. 얼마 못 가 금세 잡혀 버렸다. 아이는 사지를 바동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썼으나, 뒷머리를 후려치는 둔통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온통 암흑이었다.

실로 눈을 뜨긴 한 건지. 혹 아직 눈을 감고 있는데 착각한 것은 아닐는지. 헷갈릴 만큼 어두운 공간. 빛 한 점 없는 그곳에서 아이는 오들오들 떨며 몸을 구석구석 더듬어 살폈다.

의식을 잃은 사이 몸수색이라도 한 듯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성별은 진작 들켰을 테지. 어디 묶이거나 구속되진 않았다. 가만 내버려 둬도 어차피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의 발로일까.

아이는 입안에 숨겨 둔 나뭇잎을 꺼냈다. 만에 하나 붙잡히더라도 들키지 않을 곳을 궁리하다 보니 그리되었다. 손끝의 감각으로 나뭇잎의 결과 잎맥을 매만져 앞뒤 면을 구분한 아이는 지난밤 깨문 검지의 피딱지를 도로 뜯어냈다. 따끔한 통증이 비릿한 혈흔과 함께 섞여 나왔다.

대강 점만 찍어도 된다 했지? 아이는 피를 내어 나뭇잎을 마구 덧칠했다. 그러자 뒷면에 새겨진 술식이 호응했다. 술사가 새긴 환(還) 자를 따라 은은하게 빛을 발한 나뭇잎이 바람 한 줄기 없는 실내에서 둥실 떠올랐다.

술식이 발하는 미미한 빛이 캄캄한 내부를 어렴풋이 비추었다. 한발 물러난 어둠 속. 아이가 처음 목도한 것은, 미간에 금이 간 채로 반씩 나뉜 얼굴이 비뚤게 어긋난 사람이었다.

채석장 돌무더기처럼 파손된 사지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깨진 머리에서 뇌의 단면이 보이는 얼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눈알이 툭 떨어지더니 바닥에 부딪혀 유리구슬처럼 산산조각 났다.

부서지고 깨진 인간들의 언덕. 도자역 환자들의 시신이 산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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