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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65)화 (65/138)

65화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허수아비의 나무 작대기에 걸린 옷을 받아들었다. 이어서 허수아비는 좌측을 가리켜 말했다.

“저···기서······ 씻···어.”

그러고는 용건이 끝난 듯. 탕, 탕, 탕, 뛰어갔다.

아이의 안에 갇힌 채로. 아무개는 허수아비에게 걸린 주술을 유추했다. 저거 술사님도 썼던 것 같은데.

함장군 댁 막내 아씨께 눈을 빌려줄 적에. 아무개의 몸은 성 밖으로 나왔으나, 시선은 줄곧 아씨를 따라 의원의 무덤가에 머물렀더랬다.

그렇다면, 저 허수아비는 누군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의 일종일 터다. 눈과 입, 혹은 또 다른 신체를 빌려준.

아이는 일단 순순히 지시에 따르는 척했다. 들키지 않게 혼자 씻고, 허수아비가 내어 준 재료로 식사 준비를 하고, 깨끗한 방에서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자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보니 이 생활에 적응해 버렸다. 기괴한 몰골의 허수아비마저도.

다만 한 가지. 끝끝내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은, 오밤중에도 쿵쿵 뛰어다니는 허수아비였다.

주단에 몰려든 난민과 거지들을 죄 모아놨으니 북적북적한 건 당연지사였다. 누구 하나쯤 스리슬쩍 사라진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래서일까 허수아비는 야심한 밤에도 한 시진마다 쿵, 쿵, 돌아다니며 머릿수를 세는 듯했다.

그것만 제외하면 이곳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좋았다.

거지 고아가 어디 가서 삼시 세끼 꼬박꼬박 흰 쌀밥에 고기반찬을 곁들여 먹겠는가. 튼튼한 지붕 아래서 비바람 걱정 없이 몸을 누이는 것도.

그렇게 평온한 시간이 흘러 어느 날. 허수아비는 전각의 거지와 난민 몇몇을 불러모았다. 개중에는 아이와 함께 다리 밑에서 어울리던 개덕이도 있었다. 허수아비는 개덕을 포함한 일련의 무리를 이끌고 어디론가 콩콩 뛰어갔다.

“쟤네 어디 가는 거야?”

아이는 전각에 남은 다른 허수아비에게 물어봤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휙 돌아서 쿵쿵 가버리는 허수아비를 포기하고 낯익은 거지들에게 물어봤다. 하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잘은 모르겠는데. 거지랑 난민을 전각 한 채에 다 밀어 넣기는 힘드니, 여기저기 분산시키는 게 아닐까?”

“네 추측이지? 어째 확실한 게 없네. 예서 그리 오래 머물렀으면서. 다른 놈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어?”

“궁금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알 도리가 없어. 허수아비는 늘 제 할 말만 하고, 제 할 일만 하니까.”

아무개는 그 연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허수아비에게는 귀가 그려지지 않았으니. 누가 뭐라든, 애당초 들을 귀가 없었을 것이다.

“하면 쫓아가 봐야지!”

“안 돼. 허수아비한테 붙잡혀.”

“고작해야 나무랑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인데? 때려눕히고 가면 되잖아!”

아이가 항변했으나, 거지들은 어이없다는 기색이었다.

“야, 야. 네가 허수아비를 잘 몰라서 그래.”

“전에 누가 허수아비한테 씨름하자고 덤볐다가 제대로 깨졌어. 완력이 장난 아니라더라.”

아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무개는 알았다. 한때 저것과 유사한 술법을 본 적 있으니.

유랑술사에게 힘줄을 빌린 적안장군은 단신으로 성문을 무너뜨렸다. 허수아비도 겉보기엔 빼빼 마른 나뭇가지일 뿐이나, 헐렁한 거적때기 속에는 근육을 포함한 다양한 신체 부위를 빌려왔을 터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거지들은 치우고. 아이는 홀로 도전을 시작했다.

우선은 허수아비의 전력을 알아보는 게 급선무다. 아이는 장난인 척 허수아비의 등과 팔에 매달려 보았다. 허수아비는 아이 하나를 달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콩콩 돌아다녔다. 확실히 힘으로 때려눕히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다음으로 소리. 허수아비가 참으로 말귀를 못 듣는지, 부러 무시하는 건지 알아내야 했다.

아이는 이번에도 장난인 양 허수아비에게 바보 멍청이 메롱 따위의 유치한 소릴 해 대며 졸졸 쫓아다녔다. 입술 모양이 보이지 않게끔 등 뒤에서 하루 반나절 그러고 다녔으나, 허수아비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이는 크게 외쳤다.

“날 계속 무시하면, 등에 낙서해 버릴 테다!“

물론 허수아비는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해서 아이는 정말로 저질러 버렸다. 허수아비의 등에 똥 모양 낙서를 그린 것이다.

허수아비는 그 상태로 한 시진 넘게 돌아다녔다. 거지와 난민들은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썼다. 이후 다른 허수아비가 발견하고 거적을 벗겨 주고서야 해당 허수아비는 제 등에 낙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허수아비는 듣지 못한다. 사람처럼 목을 좌우로 돌릴 수도 없으니. 등 뒤에 찰싹 붙어서 노래 부르며 쫓아가도 정면에서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아이는 얼마간 식사 당번을 자처하며 몰래 조금씩 쌀을 빼돌렸다. 쌓아둔 빨랫감을 가져와 끝을 찢어 내 천 조각을 만들고, 쌀을 담은 후 작은 구멍을 냈다. 구멍 난 쌀 주머니를 차고 걷자 일정한 간격으로 낱알이 떨어졌다.

준비를 마친 밤. 아이는 자는 척 기다렸다. 쿵, 쿵, 쿵··· 쿵, 쿵, 쿵··· 허수아비가 잠든 이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쿵, 쿵, 쿵. 그 소리가 제 머리맡을 지나쳤을 때,

아이가 눈을 떴다.

살금살금 뒤에서 따라붙은 아이가 허수아비의 등 허리에 쌀 주머니를 매달았다. 톡, 토독, 톡··· 낱알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으나, 허수아비가 뛰어다니는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덕분에 쌀알 소리는 거의 묻혀 버렸다.

쿵, 쿵, 소리가 아득히 멀어질 즈음. 아이는 미리 빼돌린 빨랫감을 이불 속에 밀어 넣었다. 작게 부푼 동산이 생겼다. 이 정도면 오래는 아니어도 잠깐은 눈속임이 되어 줄 테지.

아이는 떨어진 쌀알을 주우며 걸음을 옮겼다. 허수아비가 남긴 흔적을 따라서.

허수아비들은 하루 십이시진 꼬박 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각자 역할이 나뉘었고 밤마다 번갈아 가며 번을 섰다. 아무개야 허수아비 뒤에 실제 인간이 조종하기 때문임을 알지만, 아이는 그 점을 기이하게 여겼더랬다.

밤은 고요했다. 아이는 허수아비가 흘린 쌀알을 주섬주섬 주우며 전각을 나섰다. 흙바닥에 떨어진 것은 발재간으로 적당히 흐트러뜨렸다.

아이는 잔뜩 긴장하고서 드문드문 이어진 쌀알을 쫓았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갔더라면 도중에 포기했을지도 모르나, 허수아비는 인적 드문 샛길로 빠지더니 경비조차 없는 뒷문으로 나가 버렸다. 아이는 멀찌감치 서서 허수아비가 향하는 방면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미로가 있었다. 이 시국에 어인 공사냐며 주단 사람들이 혀를 차던, 그 미로.

놀랍게도 미로를 지키는 것조차 허수아비였다. 문지기 허수아비들은 아이가 쫓아온 허수아비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이는 고민했다. 허수아비의 목적지를 알아냈으니 이만 돌아갈까, 좀 더 지켜볼까.

허수아비가 전각에서 밤 순시를 도는 간격은 대략 한 시진. 예까지 오는 데 일각 정도 걸렸다 셈하면 돌아가는 데에 또 일각이니 반 시진은 넉넉히 남았다.

아이는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미로의 정문이 어렴풋 보이는 거리에서. 정원 수풀 틈에 웅크려 앉아 숨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로운 허수아비가 미로 밖으로 나왔다. 수레를 끌고 쿵, 쿵, 어디론가 뛰어가는 허수아비. 아이는 거리를 유지하며 조용히 뒤따랐다.

쿵, 쿵, 쿵. 외발로 뛰는 허수아비를 따라 수레가 덜컹댔다. 도중에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한 듯 앞뒤로 크게 덜커덩 흔들렸다. 흰 천을 덮어 둔 수레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아이는 잔뜩 몸을 숙이고서 수레 바퀴 자국을 따라갔다. 어디, 무얼 떨어트렸나 볼까.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바닥에 코를 박을 듯 주의를 기울이던 아이가 우뚝 멈추었다.

수레가 떨어트린 것은, 다름 아닌 손가락이었다.

“···⎯!”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자꾸만 호흡이 가팔라졌다.

그건 분명 손가락이었다. 잘린 게 아니라 부러진 엄지. 지방과 근육, 뼈로 이루어진 신체라기엔 너무도 이질적인 단면이었다. 도자기처럼 깨지고 부러진 손가락이 망막에 선명히 맺혔다.

그래, 도자기처럼.

아이는 휘청이며 네발로 기어갔다. 길을 거꾸로 되짚어 가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허수아비가 수레에 싣고 간 것은 필경 도자역 환자의 시신일 터. 어째서 오대세가 중 당대 최고라 불리는 주단 금씨 종가에서 도자역 환자가 수레째로 나온 걸까? 혹 전염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리 위험한 짓을······

“······허수아비.”

사람이 아닌 허수아비를 쓴 이유는, 역병의 전염을 피하기 위함이라.

이리 어려운 시국에 대규모 공사를 강행하여 미로를 세운 까닭은, 도자역 환자들을 가두고자 함이다. 혹은 그들이 밖으로 도망 나오지 못하도록.

왜? 어째서 이런 짓을? 그런 근원적인 고민 이전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어찌하여 허수아비는, 도자역 환자로도 모자라 거지와 난민까지 관리 감독하는가.

불안감이 들었다. 아이는 이를 세워 검지 끝마디를 세게 물어뜯었다. 찢어진 살결에서 붉은 피가 몽글몽글 솟아났다. 제 몸에 상처를 내고도 아이는 안도했다.

다행이야. 난 도자역에 걸리지 않았어.

하나 앞일은 모르는 법. 어쩌면 개덕과 함께 끌려간 거지들은 지금쯤 미로 속에 있을는지 모른다. 혹은··· 방금 허수아비가 끌고 간 수레에 실려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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