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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64)화 (64/138)

64화

“이봐, 기루에서 봤다는 꼬마가 이 녀석이 맞나?”

술사들이 누군가를 향해 확인차 물었다. 바짝 굳은 채로 그들을 따라 시선을 돌린 아이가 기함했다.

“네, 네. 맞습니다. 그 녀석입니다.”

연거푸 굽신거리며 술사들의 비위를 맞추는 저치는, 건달들이 큰형님이라 부르던 사내였다.

기억 속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쇠약해진 몰골. 홀쭉해져 움푹 팬 볼에 그늘이 드리울 지경이었다. 고신을 당했다더니. 제 발로는 서지도 못하는지 양옆에서 팔을 잡아 주고 있었다.

“정말인가?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무나 붙잡아 거짓부렁 하는 게 아닌가?”

“차, 참말입니다! 믿어 주십쇼!”

간곡히 외치는 건달의 호소에서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엿보였다.

막막했다. 술사들이 포위했으니 도망갈 수도 없고. 나뭇잎을 쓰기엔··· 이리 지척에 붙어 있으니. 미처 손을 써 보기도 전에 빼앗길 듯싶었다.

“좋아, 상관없지. 설령 거짓이라 한들 어차피 주단의 거지란 거지는 죄다 끌어모으는 중이니까.”

“꼬마야. 우리랑 함께 가자꾸나.”

“밥도 주고 잘 곳도 내어 주마.”

“불쌍하게도. 제대로 먹질 못하니 뼈만 앙상하게 남았구나.”

상냥한 음성. 하지만 제 발로 설 수도 없는 몰골의 건달을 본 아이는, 그들이 꾸며 낸 다정함에 속지 않았다.

“나는 못 가. 몸이 허약해서 공사 일에도 방해만 됐지 도움은 안 될 거야.”

“공사? 그걸 왜··· 참, 거지들에게 공사판 일거리를 주겠다 했지.”

자문자답하듯 나직이 중얼대는 말소리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나 그 실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술사들이 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걱정 말거라. 미로는 거의 다 완공되었으니. 너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빌릴 만큼 아쉽지는 않다.”

주단 사람들은 금씨네가 이상해졌다고들 했다. 이 시국에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심지어 실용적인 건축물도 아닌 미로 따위를 만든다니.

하나 그들은 관에서 그러하듯, 강제로 부역을 지게 하지도 않고 세금을 올려받지도 않았다. 되려 거리를 어지럽히는 거지와 난민을 거두어 일을 시킨다 하니 불만의 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양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은 본인에게 직접 피해가 오지 않는 이상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외려 더러운 거지와 위험한 난민이 사라졌다며 좋아라 했다.

“공사라니. 아무나 시켜도 될 잡일이나 맡기려고 이리 힘들여 널 찾았겠느냐.”

금씨 술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전후좌우로 벽처럼 막고 서 있어 도망칠 틈이 뵈질 않았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아이는 하는 수 없이 보조를 맞추어 걸어갔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네가 쓴 전낭의 원주인, 삿갓을 쓴 사람에 관해 물어보고 싶을 뿐이니.”

“질문에 대답만 잘해 주면, 매일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을 게다.”

“······난 아는 거 없어.”

아이는 방어 태세로 일관했다.

“내가 형님의 전낭을 훔쳤고, 기껏 도둑질한 걸 멍청하게 빼앗겼을 뿐이야. 그게 전부야.”

“네 말은, 잠시 스쳐 간 인연일 뿐이란 뜻이냐?”

“그래! 금전 이만 냥짜리 증서가 화양 율씨에서 나온 거라며? 것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고!”

거짓부렁이다. 한참 후는 무슨. 당일에 바로 알았다.

“애초에 진작 떠나간 사람이잖아. 이제 와서 캐고 다녀 봤자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네.”

“······그자가 주단을 떠났다고?”

“몰랐어? 한참 전에 갔는데.”

금씨 술사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 하나가 아이를 향해 상냥히 웃으며 말을 붙였다.

“혹시 어디로 간다든가,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니?”

“아, 글쎄. 그런 깊은 대화를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라니까? 난 단지 좀도둑이었다고.”

이 또한 거짓부렁이다. 형님은 고향으로 간다고 했으니. 물론 정확히 정한 건 아니라 했지만.

“네가 은전을 면포로 바꿨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그 돈은 어디서 났지?”

젠장. 거기까지 털렸나.

아이는 다급히 머리를 굴렸다. 술사가 영리하다 칭찬한 골머리에서 쥐가 나도록 궁리했다.

“면포? 그건 건달 패거리한테 전낭을 뺏기기 전에 미리 빼놓은 돈으로 샀어. 요즘 세상에 그리 큰 목돈을 통째로 들고 다니는 바보 천지가 어디 있어? 무슨 험한 일 당할 줄 알고.”

그 바보 천지가 아이 자신이었다.

살짝 변명을 해 보자면, 생전 돈이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던 탓에 그 생리를 알지 못했다 할 수 있겠다.

“형님이 술사라기에 이번에야말로 팔자 펼 기회인가 싶어서, 얼굴에 철판 깔고 냅다 제자로 받아 달라 빌었어. 한데 자기도 힘을 제어 못 한다면서 떠나 버렸지. 그게 끝이야. 내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다 거절당한 게 전부라고.”

“잠깐, 지금 무어라 했지? 자기 힘을 제어 못 한다고?”

아이는 아차 했다. 혹 말실수라도 한 걸까, 눈치를 살피는데 금씨 술사들의 표정이 기묘했다. 안도와 조소가 한데 스치는.

“제힘도 못 다루는 초짜였나.”

“그러게 이리 시간 낭비할 일이 아니라 누차 말하지 않았나. 하여간 웃대가리들은 현장 목소리라곤 귓등으로도 안 듣지.”

마음이 편해진 걸까. 그네들의 어조가 순식간에 저렴해졌다. 마치 사석에서 허심탄회하게 잔을 나눌 때처럼.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건, 초짜나 저지르는 어리숙한 짓임을.

금씨 측에선 화양 율씨의 고수가 복수심을 품고 온 게 아닌가 불안했던 모양이다. 상대가 보잘것없는 실력이라 추정되자 금세 긴장을 푼 걸 보면.

확실히. 유랑술사를 익히 아는 아무개가 보기에도 이 무렵의 술사는 미숙한 티를 채 벗지 못하였다. 만약 늦은 나이에 입문했다면, 아직 배워 가는 초기 단계일 법도 했다.

“수호지신이 귀환하긴 개뿔. 그놈은 바다보다 넓은 호수에서 죽었다고 몇 번을 말해도 못 알아 처먹어.”

수호지신.

익숙한 칭호에 아이가 움칫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비교적 둔한 거지 꼬마조차 그 위명을 아는, 일부 지역에선 이미 신격으로 받들어 모시는 영웅.

아무개의 시점으로는, 종적을 감춘 지 이백 년이 지난 훗날에조차 유랑술사와 함께 사대귀인이라 거론되는 자.

수호지신에겐 동료가 없다. 단독으로 활동하며 얼굴마저 가면으로 숨긴 탓에 그의 내력을 아는 이가 없었다. 하니 금씨 술사들이 수호지신을 잘 안다는 듯 쉬이 입에 올리는 꼴이 의아할밖에.

그러나 모든 의문의 잠시 뇌리를 스치었을 뿐. 길게 고심할 여유 따윈 없었다. 아이는 한창 잡혀가는 중이었으니.

긴장이 풀린 술사들과 달리 아이는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잔뜩 경계한 채 주단 금씨 종가에 발을 들였다. 여기서 길이 엇갈렸다.

“이 꼬마는 안 데려가도 되나?”

건달패 큰형님과 반대 방향으로 인도되는 아이를 보고 종가의 술사가 물었다. 아이를 데려온 술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더 물어볼 것도 없더라고? 우리 어르신들 소라게마냥 움츠러들게 한 정체불명의 술사가, 알고 보니 제힘도 통제 못 하는 초짜에 진작 주단을 떠났다네.”

“그래도 혹 모르잖나. 위에서 명이 내려올 때까지는 기다려 봐야지 않겠어?”

“기다림을 구금실에서 할 필요는 없지. 애 경기하겠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깨달았다. 아이가 혹여 말실수한 걸까 걱정했던, ‘형님은 자기 힘을 제어 못 한다’는 언설 덕에 명운이 달라졌다는 것을.

자칫 한 치라도 삐끗했다간, 저기 끌려가는 건달패 큰형님과 같은 몰골이 됐을는지도.

삿갓의 술사가 별 볼 일 없는 놈임을 알았으니 더는 아이에게 캐물을 까닭이 없었다. 하여 구금하고 고문하는 대신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게다. 망나니의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운 듯 서늘한 긴장감이 등골을 쓸어내렸다.

그들이 아이를 데려간 곳은, 종가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전각이었다. 완공이 가까워진 미로가 언뜻 보이는 그곳에서 낯선 얼굴들이 아이를 반겨 주었다.

“어라? 네가 여긴 웬일이야?”

“죽어도 안 올 거라더니. 마음이 바뀌었나 보지?”

처음 보는 놈들이 친한 척 다가오자 아이는 주춤 뒷걸음질 쳤다. 주변에서 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야, 나. 개덕이! 모르겠어?”

“···네가 개덕이라고?”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함께 다리 밑에서 동고동락하던 거지들. 그들은 과거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을 만치 깔끔했다.

잘 먹고 잘 잤는지 못 본새 키도 크고 살도 제법 올랐다. 환골탈태한 듯한 풍채에 놀라는 아이를 맞이하던 옛 친구들이 인상을 쓰며 물러섰다.

“어우, 야. 너 냄새 심하다. 좀 씻어.”

지들은 거지 꼬락서니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이는 코웃음 치며 무시했다. 그때.

탕, 탕, 탕!

지팡이로 마룻바닥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렸다. 고개를 든 아이의 앞에 나타난 것은 허수아비였다. 검붉은 피로 눈과 입을 덧그린.

“으아아악⎯!”

아이는 기겁하며 도망질을 쳤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제 발에 걸려 뒹굴기까지 했다.

한데 다른 놈들이 영 이상했다. 제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놀라는 게 당연할 상황에서. 외려 달아나는 아이를 비웃는 게 아닌가.

“푸하하! 아이고, 배야!”

“하여간 처음 온 놈들은 죄다 저런다니까?”

“덕분에 신참례가 따로 필요 없어. 허수아비 형님이 어지간히 개성 있게 생겼어야지, 원.”

모두들 태연자약하니 아이는 얼떨떨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 아이를 향해 콩콩 뛰어온 허수아비가 나무 손을 내밀었다.

“옷··· 은··· 여기······ 있···다···.”

피로 덕지덕지 그린 입술에서 이질적인 음색이 흘러나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낸 신호가 예까지 도달하느라 버벅이고 군데군데 끊어진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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