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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63)화 (63/138)

63화

아이는 지진이 일어난 줄 알고 발발 떨던 좀 전보다 더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고독이라 명명된 공포였다.

“형님? 형님! 어디 있어?!”

동굴을 구석구석 이 잡듯 뒤졌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힘없이 발을 질질 끌며 나온 아이가 입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갔어? 떠난 거야?”

꼬마 녀석이 상상 이상으로 술사를 의지했던 모양이라고, 아무개는 짐작했다. 하기야 아이를 향한 여타 사람들의 시선과 술사는 태도는 불과 얼음처럼 판이했으니.

그나저나 술사님이 이리 언질도 주지 않고 떠날 위인이 아닌데. 아무개가 의아해하던 찰나.

“거기서 뭐 해요?”

술사의 음성이 들렸다.

아이는 고개를 홱 들었다. 술사가 수풀을 헤치며 다가왔다. 아이는 그를 향해 힘껏 내달렸으나, 닿기 직전에 멈춰 섰다. 아마 냄새 탓이리라. 아이가 스쳐 갈 적이면, 이맛살을 찌푸리며 코끝을 움켜쥐거나 손부채질 하는 치들이 한둘이었어야지.

어차피 제 몸에서 나는 냄새는 잘 못 맡으니 아이는 개의치 않아 했더랬다. 한데 술사에게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형님, 어디 갔었어? 산사태가 났는데 없어져서 깜짝 놀랐잖아!”

“산사태···?”

산속에 있었으니 누구보다도 그 여파를 잘 알아야 할 술사가 의아한 듯 되뇌었다. 아이가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뒤늦게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고 탄식했다.

“으음. 잠깐 실험을 해 봤는데, 영 실패한 것 같네요.”

“실험이라고? 산속에서?”

“그게··· 아니, 아니에요.”

난처한 듯 목덜미를 주무르며 변명처럼 말을 잇던 술사가 결국 입을 닫았다. 이번 꿈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표정다운 표정이었다.

아무개는 내심 짐작했다. 어쩌면 이번 산사태가 그의 소행일는지 모르겠다고.

호명성에서 족자에 봉인되었다 빠져나온 직후. 눈앞이 보이지 않아도 발밑으로 느껴지는 지형이 고르지 않고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건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술사님의 소행이라 했지.

하니 이번 산사태도 마찬가지로. 그가 모종의 시도 끝에 실패한 결과일는지 모른다.

“설마 또 지진은 아니겠지? 형님, 산속은 너무 위험한 것 같아. 동굴 말고 제대로 된 집을 구하는 게 어때?”

아무개의 고찰과 무관한 아이는 순수하게 염려했다. 술사는 옷자락에 붙은 나뭇잎을 가볍게 털어냈다.

“걱정 말아요. 앞으로 대지진은 없을 거예요.”

“형님이 어찌 알고 장담해? 며칠 전만 해도 멀쩡하던 땅이 난데없이 갈라지더니만, 저기 위쪽에 엄청 큰 협곡이 생겼다는데.”

아이가 협곡이 위치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들이 선 동굴 입구에서도 길게 갈라진 대지 일부가 보이고도 남았다.

쿨럭. 돌연 사레가 들린 듯 술사가 기침했다. 아, 그게 말이죠, 으음··· 무얼 해명하려는 양 횡설수설하던 그가 이내 단념한 듯 탁한 숨을 내쉬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어디로 가는데?”

“구체적으로 정한 건 아니라. 일단은 고향으로 가 볼까 싶네요.”

아이는 눈치챘다. 술사는 잠시 잠깐 외출하겠다 설하는 게 아니다.

아예 떠나겠다는 뜻이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 돼요.”

용기 내어 꺼낸 청이 단칼에 거절당했다. 아이는 울컥했다.

“왜 안 되는데? 내가 거지라서? 더럽고 냄새나고 밥만 축내는 쓰레기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나랑 같이 가면 네가 위험해서 그래요.”

“어디든 형님이랑 같이 있는 편이 나한텐 훨씬 안전해!”

“그렇지 않아요.”

아무개가 아연해질 만큼, 술사는 단호하게 끊어 냈다. 눈앞이 흐릿해진 아이가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같이 다니던 놈들 모두 금씨네 공사판에 가 버렸어. 밥 주고 잘 곳도 내어 준다 하니 죄다 가 버렸다고. 이제 나만 남았단 말이야.”

“······.”

“안 물어봐? 왜 나만 안 갔는지.”

“사정이 있겠죠. 너는 영리하니까.”

거지 고아에게 영리하다니. 난생처음 들어 본 칭찬에 아이의 가슴팍이 저려 왔다.

왜 하필 마지막 순간에야 그런 말을 해 주는 걸까. 목구멍까지 단단한 덩어리가 차올라 숨을 헐떡이는데, 술사의 음색이 머리맡에 와 닿았다.

“어린 여자아이가 공사판에서 일하기는 쉽지 않겠죠. 단체로 생활하다 보면 성별을 들킬 위험도 커질 테고.”

“······!”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움직이자 눈가에 고인 물기가 후두둑 낙하했다. 술사는 덤덤한 낯으로 아이를 응시했다.

“나는 술사예요. 제어력을 잃은 술사.”

그래서 위험하다고 한 거예요.

“통제 불능의 힘은 없느니만 못하니까. 단언컨대, 현시점에서 다환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곳은 내 주변이에요.”

이해되시나요? 그리 묻는 술사에게. 아이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작 그리 말하면 좋았잖아.”

서운해도 이해는 할 수 있는 것과, 그저 서운하고 원망스럽기만 한 것은 천양지차이니.

“형님 실험이라는 거··· 힘을 통제할 수 있는지 해 본 거야?”

“네에. 완벽하게 실패했지만요.”

“하하, 그게 뭐야. 웃기네.”

아이는 울면서 웃기다고 했다. 모순된 형용이다.

“그 힘의 제어라는 거. 언제쯤이면 되는데? 언제가 돼야 형님 주변이 안 위험해져?”

“글쎄요. 지금으로선 저도 확신이 어렵네요.”

“······안 위험해지면, 그때는 같이 가도 돼?”

술사는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삿갓 그늘 아래 옅은 색조의 눈은 동공이 수축하듯 작은 점으로 모여드는 형상마저 선명했다.

“뭘 믿고 같이 가려는지 모르겠네요. 나랑 동행한들 지금보다 나아지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아무개는 술사가 그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가 참 박하다 싶었다. 하나 술사는 견해가 사뭇 다른 듯 혹평을 이어갔다.

“나는 뜻하는 대로 이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실패에 찌든 머저리죠.”

“형님은 머저리야? 잘됐네. 나는 거진데.”

거지가 머저리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세상이 험할수록 여자, 노인, 아이가 힘들어진다던데. 나는 셋 중에 둘이나 해당하잖아. 어디서든 똑같이 힘들 거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아이를 물끄러미 보던 술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 번 패배한 이가 내보이는 항복의 표시였다.

술사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납작한 나뭇잎 하나를 주워들었다. 잇새로 물어 검지에 피를 낸 그가 잎맥이 보이는 뒷면에 환(還) 자를 쓰자 검붉은 획을 따라 은은한 빛이 스며들었다. 술사가 아이에게 나뭇잎을 건넸다.

“일이 생기거든 이걸로 날 부르세요.”

“어떻게 쓰는데?”

“술자에게 돌아오는 귀환 속성을 부여했어요. 앞면에 뭐든 아무거나 쓰면, 나뭇잎이 내 쪽으로 올 거예요.”

“난 글 쓸 줄 모르는데?”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심려치 마세요. 대충 점이나 찍으면 됩니다.”

너무하네. 아이는 툴툴대면서도 나뭇잎을 조심히,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사용할 때 네 피를 소량이라도 섞어야 해요. 그래야 술식이 대상을 확정할 수 있어요.”

어린 여자아이가 구태여 더러운 행색을 가장해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한 곳을 찾으면··· 그때 올게요.

술사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축지술이다.

아이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가 이내 나뭇잎을 보며 샐샐 웃었다. 술사가 머물던 동굴에 면포를 숨기고 보금자리를 꾸미기도 했다. 하루하루 저물어 가는 나날을 그저 버티는 게 아닌, 기다리는 설렘이 추가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주단 금씨 술사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여느 때처럼 주막에 들러 구걸하던 아이를 시꺼먼 그림자가 둘러쌌다. 왼팔 상완에 주단 금씨 문양의 완장을 찬 술사들이었다.

“아직도 주단에 거지가 남아 있을 줄이야.”

주모가 시선을 피하며 물러났다. 금씨 술사들이 건네는 전낭을 받고서는 아예 반빗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이는, 아무개는 깨달았다.

팔아넘겼구나.

거지가 방문하면 선심 쓰듯 식은 밥 한 덩이라도 던져 주던 예전과 달랐다. 각자도생하기 바쁜 시절. 바닥난 인심에 점잖은 이들조차 거지를 못 본 척 없는 취급해 주는 게 최선일 지경이었다. 거지가 집 근처에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두 눈을 부릅뜨고 몽둥이부터 찾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한데 유독 이 주막의 주모는 전만 못해도 그럭저럭 잘해 주었더랬다. 어째 께름칙하다 싶으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 넘겼는데······

‘이거 봐, 형님. 내 말이 맞잖아.’

아이가 입속으로 작게 되뇌었다.

‘이유 없는 선의는 없다니까?’

형님이 이상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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