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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62)화 (62/138)

62화

나직한 음성이 동굴 벽에 부딪혀 겹겹이 울렸다. 아이는 어안이 벙벙했고 아무개도 마찬가지였다.

죽어? 전낭의 원주인이? 그자가 화양 율씨였던 걸까. 그럼 술사님은··· 전낭을 맡을 정도로 신뢰를 쌓아 온 이가 죽은 건가.

그의 왼손이 보였다. 관통된 상처를 돌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방치한 검붉은 피투성이. 먼 미래에는 흉터로 남을.

「제 인생에서 가장 한심하고, 형편없고, 제정신이 아니던 시절에. 충동적으로 저지를 뻔한 실수를 막아 준 상처예요.」

「제가 직접 찔렀거든요.」

언젠가 왼손의 남은 상흔을 물어봤을 적에 술사가 들려준 대답. 아무개에게는 다소 낯선 그의 무기력하고 맥없는 행태는,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 여파였다.

육신도 형체도 갖추지 못하고 의식만 각성하여 타에 기생할 뿐이나, 아무개는 물속에 잠겨 호흡이 다 한 듯 갑갑해졌다.

어째서 이 순간은 꿈일까. 단지 꿈일 뿐이라, 나는 이토록 무력한가.

지나간 과거임을 안다. 이백 년도 더 전에 종결된 옛일을 꿈의 형태로나마 엿볼 따름이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지쳐 쓰러진 당신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그래? 아무튼, 형님도 조심해. 금씨 놈들이 샅샅이 찾고 있으니까.”

술사는 별다른 대꾸를 않았다. 아이는 조바심이 난 듯 은근슬쩍 운을 뗐다.

“뭣하면 내가 염탐이라도 해 올까? 나 그런 거 잘해.”

“관둬요. 위험한 짓 말고.”

진이 다 빠진 양 축 늘어져서는. 이런 치기 어린 소리에는 즉각 대응한다. 걱정과 염려라는, 거지 고아에겐 생소한 반응에 아이가 한층 들떴다.

“왜? 형님도 알면 좋잖아. 형님이 화양 율씨는 아니어도 그쪽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금씨 놈들이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

“주단 금씨가 무얼 하든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아요. 너도 괜히 위험한 데 발 들이지 말아요.”

쫓기는 처지거든 추격자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는 게 당연지사일진대. 그는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이에 아이의 심념이 확고히 굳었다.

“형님은 정말로 율씨가 아니구나?”

그가 망국의 반역자도, 금씨의 원수도 아님을 확신하자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다. 이후 아이는 걸핏하면 동굴에 찾아와 일방적으로 떠들어 댔다.

술사의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그는 아이가 오든 말든, 무얼 하고 뭐라 말하든, 덤덤하기만 했다. 아이는 서운하지도 않은지 꿋꿋하게 들락거렸다. 아마 덜 자란 어린 눈에도 보여서가 아닐까. 그가 고의로 무시하는 게 아님을.

아무개가 아이의 망막을 통해 들여다본 술사는, 외부의 변화에 신경 쓸 여력 자체가 없는 듯싶었다. 눈에 띄는 활동을 하는 건 아니나, 넋 놓고 하루하루 흘려보내지도 않았다. 그는 비술사로선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 고군분투했다.

“형님은 밥 먹었던가?”

주막에서 남은 보리밥을 얻어 맨손으로 퍼먹던 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아무개는 속으로 답했다. 아니. 이번 꿈에서 술사님이 무얼 먹는 걸 본 적이 없어.

“안 먹은 것 같은데···.”

바가지에는 밥이 반절 가량 남아 있었다. 차게 식은 꽁보리밥을 물끄러미 보던 아이가 결심한 듯 당차게 동굴로 향했다.

“형님. 이거 먹을래?”

술사는 평소처럼 너른 바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 보리밥 바가지를 내려놓으며 묻자 그가 얼굴에 덮은 삿갓을 치우지도 않고 거절했다.

“됐어요.”

“이익··· 요새 구걸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다들 살기 팍팍해서 엄청 눈치 준다고!”

유례없는 가뭄이 몇 년간 내리 이어졌고 민란과 북방 이민족의 침략으로 온 땅이 전란에 시달렸다.

안 그래도 농지가 남아나질 않는 판에 반년 전부터는 날씨마저 미쳐 돌아갔다. 연중 온난하던 다환이 어느 날엔 쪄 죽을 듯 덥고 또 어떤 날엔 얼어 죽을 듯 추워졌다. 전에 없던 하늘의 변덕에 헛소리꾼들이 멸망의 날이 도래하리라 복창했다.

“이제는 구휼미를 내려 줄 나라님도 없잖아.”

한참 떠들던 아이가 시무룩이 덧붙였다. 모두가 혼란스럽고 각자도생하기 바쁜 시절. 거지 꼬마가 밥을 나눠 준 건, 대단한 호의이자 엄청난 결심이었다.

“남은 거지가 나밖에 없어서 이거나마 얻었지. 전처럼 여럿이서 구걸 다녔으면 진작 내쫓겼을걸.”

“돈이 있는데 왜 구걸해요.”

간만에 돌아온 긴 대답에 아이가 화색을 띠었다.

“지난 일로 배운 게 있거든. 앞으로는 돈 없는 척, 평소처럼 구걸하고 지내다 너무 힘들 때만 조금씩 꺼내 쓸 거야!”

“빨리 써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응? 어째서?”

아이가 어리둥절해 하자 삿갓 안쪽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술사가 삿갓을 고쳐 쓰며 부연했다.

“가뭄에 전란에 날씨까지. 온갖 문제로 농사가 힘들다면서요. 쌀값이 점점 더 비싸질 거예요. 같은 은전으로 살 수 있는 양이 줄어들겠죠.”

“그런가? 하면 어떡하지?”

“면포처럼 화폐 대용으로 쓸 수 있고 보관이 용이한 현물을 비축해 두는 편이 좋을······”

한창 말을 잇던 술사가 바가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췄다. 슬며시 눈썹 한쪽을 찌푸린 그가 바가지를 얼굴 가까이 들고 냄새를 맡았다. 긴가민가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더니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상하지 않았어요?”

“무슨 소리야, 형님. 이 정도는 상한 축에도 못 들지! 난 곰팡이 핀 부침개를 한 판 다 먹고도 멀쩡했다구. 모르는 산나물이나 열매도 잘 먹는걸?”

배를 한껏 내밀고선 통통 두드리며 자랑하자 술사가 엷은 한숨을 재차 흘렸다. 바가지를 내려놓은 그가 간만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술사가 동굴 밖으로 나서자 아이가 서둘러 뒤따랐다. 주변을 휘 둘러본 술사가 찔레나무 열매를 따서 아이에게 주었다.

“영실입니다. 해독작용을 하니 여러 증상에 다양하게 쓸 수 있을 거예요. ······부인병에도 효과가 있으니 알아 두세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술사는 동굴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와 효능을 일일이 설명했다.

아이는 우리 형님,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구나! 하고 순순히 감탄했다. 아무개는 이 녀석이 과연 알려 준 것들의 일 할이라도 기억할는지 궁금했다.

“고마워, 형님!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게.”

아이가 낭랑하게 외쳤다. 동굴로 되돌아가던 술사가 무심히 답했다.

“네가 날 도울 일이 있을까요.”

“켁··· 아픈 곳을 막 찌르네?”

어둑한 동굴로 들어간 술사는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바위에 도로 몸을 뉘었다. 그 바위 뿌리에 기대어 앉아 술사가 따준 영실을 꼭꼭 씹어 먹으며 아이가 웅얼거렸다.

“혹시 모르잖아? 내가 언젠가 형님한테 도움이 될지도.”

“됐어요.”

“에이이, 사양하지 말고. 응?”

거머리보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아이에게 지친 걸까. 술사가 단념했다.

“그러든지요.”

“좋았어!”

술사를 이겨 먹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아이는, 잠시 후 조용히 덧붙였다.

“나는 어리고 가진 것 하나 없는 고아에 거지인 데다,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살이지만··· 그래도 형님은 꼭 도와줄게.”

“힘든데 억지로 도와줄 필요는 없어요.”

“에이, 내 주제에 그럴 깜냥이 어디 있어? 그냥, 기회가 오면 도와주겠다는 거지 무어.”

그날 아이는 바위에 기대어 앉아 깜빡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는 술사의 조언에 따라 은전을 면포로 바꾸었다. 멀리서 보니 거지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던 다리 밑에는 여전히 금씨 술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개구멍으로 들어가던 찰나.

우르르릉⎯!

산자락이 무너지는 굉음이 울렸다. 공포에 잠식되어 혼비백산한 비명이 저자를 휩쓸었다.

아이도 다를 바 없었다. 골목 구석에 웅크려 한참을 벌벌 떨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른 일이 더 없자 슬그머니 밖으로 기어 나와 보았다.

“끄, 끝났나?”

“또 지진이야? 다 끝난 게 아니었어?!”

“소리만 요란하고 땅은 흔들리지 않았네. 지진이 아니라 산사태겠지. 주단은 금씨가 알아서 잘 막아 줄 터이니 염려들 말게. 대지진으로 다환이 죄 뒤집힐 적에도 주단에는 피해가 없었잖은가?”

“피해가 없긴 개뿔이! 며칠 전만 해도 저어기 북쪽에서 느닷없이 땅이 갈라지더니만, 웬 협곡이 생겨서는 윗마을 아랫마을 뚝 끊겼구먼!”

인의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재해에 불안과 혼란이 온 거리에 가득했다. 공황에 빠진 인파 속에서 아이가 돌연 떠올렸다.

“산사태? 그럼 형님은···?”

아이는 소스라친 나머지 몸을 숨기는 것도 잊고서 전심전력으로 산을 탔다.

도착하고 보니 다행히도 동굴이 무너지거나 하는 사고는 없었다. 아이는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쳐 불렀다.

“형님⎯!”

빈 동굴에 아이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형님···?”

곁에서 끈질기게 보채지 않으면 시체처럼 꼼짝도 않던 이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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