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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59)화 (59/138)

59화

“으, 흐아아악!”

곳곳에서 산발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 몸이 회복되었다 여긴 자들이 뒤늦게 방치된 상흔을 목도하고 충격에 빠졌다. 가짜신령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그러게 말예요.”

좌중에게서 여전히 등 돌리고 선 술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꿈장수는 어째서 이리 번거로운 술수를 써 가며 여러분을 속였을까요.”

협곡 주민이라면 누구든 크고 작은 상처로 신령의 치유를 받아 본 적 있다. 자연적으로 나은 쪽은 그나마 천행이었다. 방치하여 악화된 상처를 확인한 이들은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혼란의 도가니 속. 이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그의 품에서 둥글게 말린 붉은 천이 반쯤 흘러나와 위태로이 대롱거렸다.

그런 이장을 향해. 검은 뱀이 시위를 당긴 듯 튀어 나갔다.

술사의 소매 안에서 줄곧 웅크리고 있던 검은 뱀은 이래 봬도 영물이었다. 비록 아직은 미숙하여 인간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대강 분위기를 짐작할 깜냥은 있었다.

뱀은 적의를 품고서 숨죽인 채 상황을 엿보았다. 그러던 중 기회를 틈타 현 소란의 원흉이자 무리의 대장으로 추측되는 이장에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으앗!”

구렁이만 한 뱀이 느닷없이 불쑥 나와서는 매섭게 쏘아 대자 이장이 소스라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여파로 아슬아슬 걸려 있던 붉은 천이 툭,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갔다. 지면 위로 붉은 색감이 넓게 펼쳐졌다.

그것은 신호였다. 이장과 마을 장정들 간에 정해 둔 지시 사항. 적흑백청 네 가지 색감으로 표시하는데 이 중 적색은 최악을 의미했다. 술사와의 협상이 틀어질 대로 틀어져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

잘못된 신호를 받아들인 협곡의 장정들은 예정대로 행했다. 아무개를 절벽 너머로 밀어낸 것이다.

줄곧 그들을 주시해 온 술사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촤르르륵⎯ 백지 부적이 날아오르며 협곡의 깊은 골을 따라 유영했다. 허공에 하얀 실을 촘촘히 바느질하듯 이어지는 백지의 행진. 그 대열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부적이 모두 소진된 것이다.

술사에게서 미소가 사라졌다.

***

확연히 낮아진 시야. 답답하리만치 좁은 보폭.

아무개는 자각했다. 또 꿈이구나. 새로운 악몽의 시작이다.

어처구니없었다. 잠들기 전의 형편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꿈장수를 따라 베갯잇을 찾던 중 졸음이 쏟아졌고, 기절 직전에 약이 듣니 마니 하는 대화가 들렸다. 추측건대 협곡 놈들이 식사에 약을 타고 뒤를 밟았으리라. 함정에 퐁당 빠진 것이다.

이리 쉽게 당해 준 자신이 기가 막혔다. 당장 일어나 반격해도 모자를 판에 악몽이나 꾸다니. 헛짓거리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너무 한심해서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하나 아무개의 심경이 어떠하든. 언제나처럼, 악몽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번 악몽의 주역은 어린아이였다. 꼬질꼬질하고 해진 소맷부리에 부르튼 손등. 작은 발을 재게 놀려 산속을 누비는 모양새가 무언갈 찾는 듯싶었다. 뱃가죽이 꺼지다 못해 아플 지경이니 필시 먹을거리를 구하려는 심산일 테지.

버섯이라도 없나. 나무 밑동을 샅샅이 뒤지던 중 이질적인 것이 눈에 띄었다. 아이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발견했다.

낙엽 사이로 보이는 신발을.

“······?!”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으나, 나무가 등을 받쳐주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거세게 벌떡였다. 아이는 가쁜 숨을 고르며 떨리는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갖신을 신고 미동조차 없이 고요히 누운 그것은, 아마도 시신이렷다. 산 사람이라면 제 몸에 낙엽이 저만치 쌓이기 전에 진작 털어 냈겠지.

요동치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킨 아이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시신의 왼손에는 은장도가 박혀 있었는데 손바닥에서 손등으로 관통해 흐른 피가 검게 굳은 채였다.

아무개는 이 꼬마가 무엇 하러 시신에 접근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배가 너무 고프니 인육이라도 먹으려는 건가?

다행히 시신의 얼굴은 삿갓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깊이 안도했다. 아무리 강심장을 타고 났다 한들 이리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기는 버거울 테니. 거리를 좁히고 바짝 다가선 아이가 시신의 옷을 뒤졌다.

아무개는 드디어 이해했다. 이 녀석, 도둑질할 셈이구나.

시신은 무서웠으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주린 배였다. 운 좋게도 아이는 시신에게서 전낭을 건져 냈다. 두 손 가득 묵직한 전낭에 아이가 헤벌쭉 웃었다. 아마 이 꼬마의 생에 이렇듯 많은 돈을 쥐어 본 적은 처음이리라.

아이는 즉시 하산했다. 너른 대로 양측에 줄지은 음식점에서 흘러나온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식점으로 향하던 아이는, 입구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곧장 돌아서 멀리 골목 구석에 위치한 낡은 주막으로 들어갔다.

아무개는 이 꼬마가 제법 똘똘하다 싶었다. 누가 봐도 거지꼴을 하고서 번듯한 가게에 들어가 돈을 쓴다면 필시 의심을 살 테지. 비슷한 형편의 몰골이 종종 보이는 허름한 주막이 분란을 피하기에는 용이하다.

아이는 국밥을 마시다시피 하며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간만에 배를 채우고 기분 좋게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아이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어이, 꼬맹이.”

주막을 나선 아이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저보다 배는 더 큰 성인 남성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너 지난번에 큰형님 전낭 훔쳐 간 놈이지.”

“이 동네 거지들은 전부 금씨네 공사판에 불려가지 않았던가? 왜 이 녀석 혼자 남아 있지?”

“이번엔 또 어디서 누구 돈을 훔쳤길래 주막에 다 오셨나.”

그들이 몸을 뒤지려 했다. 아이는 전낭을 빼앗기지 않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혈관이 도드라진 팔뚝을 세게 물어뜯자 머리 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어이 피를 본 사내가 씩씩대며 아이를 넘어뜨렸다. 작은 몸에 발길질이 쏟아졌다.

이 꼬마 안에 갇히지만 않았더라도 저놈들 멱을 땄을 텐데. 꿈속에서 한없이 무능한 아무개는 그저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

“오호, 이게 웬 횡재냐?”

“비단에 금사로 자수까지 놓았네. 전낭만 해도 값어치가 상당하겠는걸?”

빼빼 마른 아이의 몸에서 홀로 불룩한 전낭은 금세 들통났다. 전낭을 뺏어 든 장정들이 히죽 웃었다.

“꼬맹이. 이걸로 네가 물어뜯은 팔 치료하러 가마.”

“인심 썼다. 전에 훔쳐 간 건 없던 일로 쳐 줄게.”

툭, 툭. 쓰러진 아이의 옆구리를 발 앞코로 어루만져 준 건달패가 떠났다. 홀로 남은 아이는 주먹을 까득 움켜쥐었다.

“웃기지 마. 그 전낭은 너희 형님이 갖고 있던 쥐꼬리만 한 돈이랑 비교가 안 된다고!”

놈들 앞에서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지난번 도둑질을 자백하는 꼴이니까.

눈가에 열이 올랐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으나, 뜻밖에 아이는 꾹 참아 냈다. 아이는 씩씩거리며 다짐했다. 다시 돈이 생긴다면, 결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꼭꼭 숨겨 둬야지. 멍청하게 다 들고 다니지 않을 거라고.

아이는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절뚝이며 산을 올랐다. 시신을 발견했던 그곳으로.

아까 확인하고도 미련이 남은 걸까. 아이가 시신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던 중 문득 아이의 눈길이 시신의 얼굴을 덮은 삿갓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아무개는 내심 놀랐다.

설마, 정말로?

머뭇머뭇하던 아이가 이내 결심한 듯, 삿갓 쪽으로 손 내밀었다. 전낭에 돈이 많았으니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했을는지 모른다. 동곳이나 관자, 귀걸이 따위 말이다.

천천히, 느릿느릿, 그러나 분명히. 뻗어 나간 아이의 손마디가 삿갓 가장자리를 건드렸을 때.

시체가 손목을 붙잡았다.

“아아아악⎯!”

아이는 죽을 듯 비명을 질렀다. 서둘러 손목을 빼내려 했으나, 시체가 단단히 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바위 틈에 낀 양 미동도 않았다.

“······이건 안 돼요.”

시체가 말했다.

아니. 아무개는 정정했다. 처음부터 시체가 아니었던 게지. 이자는 산 사람이다.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은 듯 지독히 가라앉은 음색. 아무개의 속이 기묘하게 울렁였다. 왜일까. 어째서 목소리만 들었음에도 이런 기분이 들지?

탁, 손목이 풀리자마자 도망가려던 아이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눈물을 뚝뚝 떨구며 낙엽 위를 뒹군 아이가 겁을 집어먹고 바르작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동안 시체는 몸을 바로 일으키고서 삿갓을 고쳐 썼다. 툭툭, 옷자락에 들러붙은 낙엽을 털어낸 그가 아이를 향해 고개 돌렸다. 아무개는 기함했다.

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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