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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58)화 (58/138)

58화

마음을 정한 소년 신령은 이장을 통해 마을 주민들을 불러모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신령 노릇을 그만두고 떠나리라고.

당연 반발이 쏟아졌다.

“설마··· 농담이시죠?”

“이러지 마세요. 신령님께서 떠나시면 저희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우왕좌왕하던 언성이 점차 높아졌다. 그들의 기세에 소년 신령이 주춤했으나, 곁에 선 유랑술사를 힐끔하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긴.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인생 맡겨놨나? 각자 알아서들 사세요.”

“그간 먹여 주고 입혀 준 은혜도 모르고!”

격앙된 비난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소년도 정색하고 말을 놓았다.

“놀고 있네. 대신 나랑 우리 가족 피를 죄다 뽑아 갔으면서. 모기떼가 어디서 선심 쓰는 척이야?”

강압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간곡한 애원이 흘러나왔다.

“신령님, 신령님. 부디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셔요. 가엽게 여기시어 자비를 베풀어 주셔요.”

“······싫어.”

소년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난··· 희생 따위 안 할 거야. 어인 감언이설에도 넘어가지 않아. 할 말 다 했으면 이만 간다?”

홱 돌아서는 소년 신령을 붙잡고자 주민들이 다가왔으나, 백지 부적이 날아들었다. 부적이 붙은 이들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거기. 제가 그어 둔 선을 지켜 주세요.”

술사가 생긋 웃었다.

“선을 넘으면 십 리 밖으로 보내드릴 거예요.”

주민들이 엉거주춤 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접근이 불가할 뿐 입은 멀쩡히 뚫려 있었다.

“신령님 뜻이 정 그러시거든, 마지막으로 저희 아이에게 한 번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누군가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을 잡고 외쳤다. 그러자 다른 이들까지 덩달아 아우성쳤다.

“저도! 저희 아버님도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도···!”

뒤쪽에서 자꾸 몰려들자 떠밀려 엎어지고 선을 넘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들에게는 어김없이 부적이 날아갔다. 술사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를 멀찌감치 축지시켰다.

선에 밀접한 사람들은 신령에게 치유받을 최후의 기회마저 날려 버릴까 불안해했다. 혹여 운 나쁘게 금을 밟거든 즉시 십 리 밖으로 나가떨어진다. 아무리 서둘러 돌아와도 그 무렵 신령은 이미 떠나고 없을 터.

앞 열의 사람들이 뒤에 선 무리를 밀어냈다. 신령에게 접근하려는 인파와 선을 밟지 않고자 안간힘으로 버티는 자들 간에 몸싸움이 속출했다.

“그만두지 못하겠나!”

난리 통에 뒤늦게 당도한 이장이 언성을 높였다.

“우리끼리 다퉈서 대저 무얼 어찌하겠단 겐가! 왜 이리들 생각이 짧아!”

주민들을 매서운 눈길로 훑으며 호통친 이장이 유랑술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보게, 술사 나리. 우리 신령님은 두고 조용히 떠나시오.”

남의 마을 사정에 괜히 참견해서는, 하고 들으란 듯 중얼거린 이장에게. 술사는 여느 때처럼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못 하겠다 하면. 어쩌시려고요?”

“괜히 일을 번거롭게 만들지 말게.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다만··· 내 제안을 듣지 않으면, 자네 일행에게 큰 화가 미칠 게야.”

“······아무개 님을요?”

한데 이장의 겁박을 접한 술사는 참으로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동료의 안위를 근심하는 걱정도, 비겁한 술수를 부린 이장을 향한 분노도 아닌, 모호한 미소. 그 표정을 굳이 해석하자면 ‘미심쩍음’에 가까웠다.

“저로서는 통 상상이 되질 않아서··· 만일 당신이 아무개 님께 해코지할 수 있다면, 굉장히, 무척, 놀랍겠어요.”

“못 믿겠나? 평범한 인간들이 술사를 제압했다니.”

승기를 잡았다 여긴 걸까. 이장이 콧등의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떠들었다.

“썩 대단한 일도 아닐세. 술사란 족속이 아무리 대단한들 육신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잖은가? 자네들 식사에 수면약을 섞었네. ······같은 약을 먹은 자네는 어찌 멀쩡한가 모르겠다만, 상관없네. 다른 쪽은 확실히 잡았으니.”

이장은 술사의 어깨너머, 먼 협곡 어드메를 턱짓했다.

“보이나? 자네 일행을 잡거든 흰 천으로 기신호를 주겠다 했네.”

술사는 느리게 뒤를 돌았다. 협곡 위에서 하얀 천을 펄럭이는 장정과 곁에 선 무리들. 그들 사이에 아무개가 있었다. 협곡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걸쳐진 채로.

“이쪽에서 신호를 주면, 자네 동료를 협곡으로 밀어 버릴걸세. 저 위치에서 추락하면 시신도 보전하기 힘들지.”

동료를 살리려거든 신령님을 두고 꺼지게.

이장이 덧붙여 말했다. 뒤돌아선 술사의 삿갓에서 흘러내린 너울이 바람결에 들떴다.

“식사에 약을 타셨구나.”

술사가 입을 열었다.

“수면약이라 하셨죠? 그 외에 다른 건 없나요?”

나직이 확인하는 술사는 지극히 평이한 어조였다. 돌아선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감정을 읽어 내기도 어려웠다.

“수면약 뿐일세. 치명적인 극독 따위를 썼다간, 정녕 돌이킬 수 없을 테니.”

이장의 험상궂은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라고 술사와 척을 지고 싶겠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런 게지.”

누군들 무섭지 않을까. 술사와 잘못 척을 졌다간, 마을 전체가 통째로 매장될는지 모른다.

다만 신령을 잃는 것이 더욱 두려울 뿐.

“많을 걸 바라지 않아. 신령님만 두고 가게. 자네 일행은 한숨 푹 자고 개운히 일어날 걸세.”

그에 소년 신령은 풀이 죽어 작게 웅얼댔다.

“죄송해요, 술사님.”

“뭐가요?”

“아마 하인이 매수됐을 거예요. 그놈이 영감님께 알려 줬겠죠. 제 부주의 탓에 동료분이 위험해지셨어요.”

“하하. 위험이라뇨.”

술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지극히 예사로운 언행에 이장의 낯이 설핏 굳었다.

“방금 아무개 님 눈썹이 들썩였어요. 곧 깨어나실 듯하네요?”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개가 일어나기만 하면, 뒤에 버티고 선 장정들 따윈 얼마든 상관없단 듯이.

하지만 소년 신령은 믿기 어려웠다. 아무개와 그를 붙잡은 장정들은 멀찍이 떨어져 손톱보다도 작게 보였다.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도 어려운 거리에서 한 사람의 이목구비를 정확하게 파악하다니, 가당키나 한가? 자신이 부채감을 느끼지 않도록 술사가 배려했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할게.”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다. 소년 신령은 주민들을 향해 단언했다.

“애원하고 협박해도 소용없어. 오늘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무슨 수를 써서든 떠날 테니.”

살고 싶으니까. 술사와 그의 동료에게는 유감이나, 저리 태연자약하니 보다 흉금을 털어놓아도 될 성싶었다.

“그간 함께해 온 정이 있으니··· 지금 가능한 한 피를 내어 주도록 할게. 분배는 알아서 하도록 해.”

마지막 선심이다. 소년 신령은 항시 패용하는 단도를 꺼내 들고 소매를 훌훌 걷었다. 여느 때처럼 피를 뽑아내기 위해.

“···⎯!”

하나 소년은 어찌하지 못하고 경직돼 버렸다. 걷어 올린 손목과 팔뚝에 무수한 자상이 남아 있었기에.

“이··· 이 무슨···?”

“신령님 존체에 어찌 흉터가 있는 게지?!”

주민들이 소스라쳤다. 하나 누구보다 놀란 것은 당사자인 소년 신령이었다.

소년은 태생적으로 흉터가 생길 수 없었다. 전신에 흐르는 피가 세상 무엇보다도 현묘한 치료약이니. 피를 내어 치유해 주는 동안에도 자꾸만 상처가 아물어 계속 칼을 대는 게 예사였다.

하물며 흉터라니?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아, 역시.”

충격으로 굳어 버린 좌중에게 홀로 자약한 음색이 흘러들었다. 유랑술사였다.

소년 신령은 뻣뻣한 목을 힘겹게 가누어 술사를 향했다.

“역시··· 라니요?”

“아까 나비, 꿈장수를 보셨죠? 그분이 어찌하여 당신께 붙어 있는가 의아했습니다만, 이제 알겠네요.”

가파른 협곡 절벽에 시선을 못 박은 채. 술사가 실상을 밝혔다.

“당신은 신령이 아니에요.”

당신의 피에 누군갈 치료하는 효과는 없어요.

전부, 꿈장수가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죠.

술사의 해설에 아연해진 소년 신령, 아니 가짜신령이 넋을 놓았다. 대신해 주민들이 반발했다.

“그럴 리 없소! 이, 이 내가 바로 산증인일세! 나흘 전만 해도 신령님께서 종아리 상처를 치료해 주셨······!”

언성을 높인 중년인이 보란 듯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드러난 다리에는 피딱지와 고름이 엉긴 상처가 여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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