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57)화 (57/138)

57화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협곡을 벗어날 즈음 소녀 신령이 호통을 쳤다. 자루에 넣기 전에 입을 막아 두었건만 그새 풀린 모양이다. 하기야 혹 숨쉬기 불편할까 느슨하게 묶어 뒀으니.

“모두가 널 내치라 할 때 나만은 믿어 줬거늘. 신의를 이리 배신한단 말이냐!”

“배신이라니, 말이 심하십니다? 이게 다 신령님 살려드리려고 하는 게니 얌전히 좀 계십쇼. 안 그래도 무거워서 힘들구먼요.”

“무, 무겁···! 네놈이 멋대로 일을 저지르고는, 내 탓을 하는 게냐?!”

“아니이, 제가 언제 신령님을 탓했습니까요. 그냥 힘들다고 했습죠. 무어, 말로 타일러서 될 것 같으면 저도 그리하겠는데. 신령님이 워낙 꽉 막히셨어야 말입죠? 죽어 주느니 의무니 하는 헛소리를 더 들어드리기 힘들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헛소리라니, 네놈···!”

소녀 신령을 말문이 막힌 듯 네놈, 네놈이···! 하고 울분을 토하였으나, 곧 한결 풀이 죽은 음색이 자루 안에서 먹먹히 울렸다.

“나라고 죽고 싶을 리 있느냐? 의무를 행하다 보면, 간혹 과하게 피 흘릴 때도 있는 법이니라. 내 부모님과 오라버니들께서도 모두 맡은 바를 수행하다 곁을 떠나셨다. 온 마을 주민들이 나만 보고 살아갈진대. 기대에 부응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머리도 올리지 않은 소녀에게 그 말 같지도 않은 의무를 강제한 것부터 개 같다는 겁니다요. 책임을 나눠 질 생각은 않고 일방적으로 기대만 하는 찰거머리 놈들.”

“책임을 나누다니? 피로 상처를 치유해 내는 건 우리 혈족뿐이다. 그들은 이 책무를 이해할 수 없어.”

“씨이발, 제가 말을 어렵게 했습니까? 제 새끼 무릎에 생채기 났다고 치료해 달라는 머저리들, 생피 뽑아다가 협곡 바깥에 팔아먹고는 입 싹 닫는 사기꾼들을 욕하는 겁니다. 그걸 당연시하는 동네 분위기도 지랄 맞고요! 신령님이 짊어진 책임을 줄여 주진 못할망정, 한 손씩 보태서 더 무겁게 만드는 개자식들······.”

한창 열분을 토하던 중. 멀찍이서 시끄러운 발소리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찾아라! 멀리 가진 못했을 게다!”

“감히 신령님을 납치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사지를 토막 내어 협곡에 뿌려 버려!”

머슴이 나직이 욕을 뱉어 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소녀 신령은 그를 설득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자꾸나. 저들이 가혹한 짓을 못 하도록 막아 주겠다. 네 뜻은 알겠으나 이런 방법이 옳지 않다. ······나를 헤아려 주는 마음씨는 잊지 않겠다.

머슴은 어떤 말에도 대답을 않았다. 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숨을 헐떡이느라 대꾸할 겨를이 없었으니.

하나 그리 애를 썼음에도 뒤쫓아 온 주민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머슴이 몰매를 맞는 동안 소녀 신령은 자루에서 꺼내어졌다. 풀려난 소녀 신령이 주민들을 말렸으나 누구도 듣지 않았다. 머슴을 주도적으로 짓밟던 어느 청년은 귀찮게 들러붙는 소녀를 밀쳐 버렸다.

어두운 밤. 반쪽짜리 달이 지상을 비추는 숲속. 나뭇가지가 드리운 어둠 속에 주저앉은 소녀는 회백색 월광이 비추는 폭력을 무력하게 바라봤다. 쫓아온 협곡 주민들은 대로했다. 분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눈에 뵈는 게 없는 지경으로 순간의 기분이 충실했다. 그네들의 귀에 소녀의 부름은 닿지 않았다.

누군가 기어이 날붙이를 들어 올렸다. 푸욱, 살을 관통하는 끔찍한 소리와 비릿한 혈향이 번졌다.

아무개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 환상은 꿈장수의 과거. 협곡 마을의 신령을 모시던 머슴. 과거에 이랬어도 결국은 잘 해결되었을 테지? 저 신령에겐 피로 상처를 치유하는 권능이 있다잖은가.

······한데 어째서 불길한 예감이 들까.

“안 돼!”

비명을 지르며 일어선 소녀가 장정들 틈을 미친 듯 파고들었다. 쓰러진 머슴 곁에 앉아 그의 가슴에 박힌 날붙이에 제 손목을 가져다 댔다. 소녀 신령의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머슴의 옷을 적셨다. 협곡 주민들이 말리려 들자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아다 휘두르기까지 했다. 소녀는 제 팔을 서슴없이 마구 쥐어짜 피를 뽑아 냈다.

하나 기이하게도··· 아무리 피를 흘려도, 상처가 낫지 않았다.

“뭐여. 왜 그대로야?”

“이런 젠장, 신령님 상처도 안 낫잖아?! 원래 피를 내자마자 아물어서 계속 상처를 벌리고 있어야 하는데!”

그네들이 동요했다. 하나 당사자인 소녀 신령만은 못했다.

“왜··· 어째서 낫지 않는 게냐.”

명운이 경각에 달한 머슴이 흐릿한 눈으로 소녀를 돌아봤다. 소녀가 절규했다. 왜 이러냐고, 왜 상처가 낫지 않느냐고, 칼에 베인 손목을 더욱 헤집었다. 주민들이 소녀를 제압했다.

두 팔이 구속된 채 끌려가며 소녀는 울고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 이거 놓아라! 나는 저 미련한 놈을 치료해야 한다.

이럴 리 없다. 무어가 잘못된 게야!

고상한 신령님이 체면을 팽개치고 발악하는 모양새에 머슴이 힘없이 비죽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비가 나풀나풀 춤을 추고 환상이 사그라들었다.

다시 현실로 끌려 나온 아무개는 잠시간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뭐야. 끝?

“······그래서··· 베갯잇은, 어디?”

별 시답잖은 걸 보여 주겠답시고 시간만 날렸다. 아무개는 역정을 내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 앞으로 나비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 거의 다 왔습니다요. 아래를 잘 보십쇼. ······거기, 거기 있잖습니까.

툭. 발 앞코에 무언가 걸렸다. 거뭇한 지면에 유독 하얀 색감이 도드라져 보였다. 신 밑창으로 슥슥 훑어내자 차츰 원형이 드러났다.

백골이었다. 밟은 순간 파삭, 으스러질 만치 삭아 버린.

아무개는 나비의 날개처럼 오색 영롱하게 빛나는 베갯잇을 집어 들었다. 흩어진 갈비뼈 아래 파묻힌 그것은, 시신의 뼈마디가 삭을 동안 홀로 세월을 비껴간 듯 말끔했다.

⎯ 그 애는 고향에서 쫓겨나고 온 데를 전전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부모의 유품을 챙겼습죠.

아무개는 지금껏 이 나비가 꿈장수의 환영이라 여겼다. 몽환전에서 그 모습을 환상으로 꾸며 냈듯이, 지금도 멀리 안전한 곳에 은신하여 수작질하는 거라고.

“너··· 뭐야.”

한데 지금, 나비는 꿈장수를 ‘그 애’라고 칭했다. 마치 타인을 부르듯이.

“너··· 뭔데 꿈장수······ 인 척해.”

⎯ 저는 꿈장수가 맞습니다.

“헛소리···.”

⎯ 정말입니다. 그 애의 외형과 성품을 본떠 만든 게 꿈장수니까 말이죠.

아무개는 베갯잇을 꽈악 움켜쥐었다. 무어라 지적하고픈데 머리가 멍하다. 너무 졸렸다.

⎯ 저는 몽환에서 태어난 호접입니다.

그것은 몽중몽 속 아씨와 노비가 맞닥뜨린 금역의 나비였다. 절벽을 산삼 군집인 양 속였던.

“······신령이··· 왜, 인간인 척··· 해.”

꿈장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꿈장수란 ‘인간’은 없었다.

모두 몽환의 신령이 지어낸 환영이었으니.

⎯ 실은 베갯잇을 선사할 적에 한 가지 부탁을 더 받았습니다. 남겨질 아이를 지켜봐 달라 했었죠.

“······그··· 머슴···? 죽었잖아.”

좀 전에 나비가 보여 주지 않았던가. 부모가 죽고 고향에서 쫓겨나 협곡에 당도하여 신당의 머슴이 되고, 죽임당하는 것까지.

⎯ 예. 그 아이가 살아가는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부탁받은 대로.

······진심인가?

지켜봐 달라는 게 태평하게 감상이나 하란 소리가 아니잖은가. 제 아이를 보살펴 달라는 뜻일진대. 말씨를 겉핥고 죽기까지 구경이나 해?

이리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과 더 말해 무엇하랴. 아무개는 협곡 마을로, 술사가 있을 신당으로 돌아가려 했다.

한데 눈앞이 어질했다. 다급히 인근 나무를 붙들려 했으나 손이 나무를 관통했다. 아니, 아니다. 애초에 그 자리엔 나무가 없었다. 초점이 어긋난 시야가 잘못 봐 버렸다.

지탱할 구석을 잃은 몸이 풀썩 쓰러졌다. 의식이 가물가물하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시야가 흐려지던 중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언뜻 들렸다.

“나 원,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네.”

“원래 약이 이리 안 듣는 게요? 점심에 먹였다더니 어찌 인제야 쓰러지는 겐지.”

“우리가 썼을 땐 일다경도 못 돼서 죄다 곯아떨어졌어. 저놈이 유독 약이 안 듣는······.”

아무개는 점심 식사의 미묘한 맛을 떠올렸다. 어쩐지 이상하게 졸리다 싶더니. 약이 들어 있었던 건가.

그럼, 술사님은······

“으아악⎯!”

발목을 덥석 낚아채는 손길에 사내가 기함했다. 쓰러진 아무개가 저를 붙잡은 것이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겁을 집어먹고서 아무개는 돌아봤으나, 상대는 미동 없이 잠잠했다. 발끝으로 툭, 툭, 건드려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잠들었네. 약 기운이 들었나 봐.”

“어휴. 기절할 거면 얌전히 쓰러질 것이지. 왜 사람을 놀래킨다냐.”

비명도 모자라 볼썽사납게 주저앉은 꼴이 과히 면구스러웠던 사내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겉으로 투덜대며 발목을 빼냈다.

“···? 뭐야. 왜 이래?”

한데 아무리 용을 쓰고 무진 힘을 줘도 아무개의 손은 풀리질 않았다. 사내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이, 이보게. 나 좀 도와주세!”

“자네 뭐하나. 것도 혼자 못해?”

가까이 있던 장정이 쯧쯧 혀를 차며 다가왔다. 하나 그 또한 아무개의 손가락 하나 풀어내지 못했다.

“뭐, 뭐여. 무신 기절한 놈의 힘이 이리 세다냐?”

사내는 함께 온 모두의 도움을 받고서야 간신히 발목을 빼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아무개를 둘러업는 동안 사내는 인상을 구기고서 바짓단을 접어 올렸다. 잡힌 발목이 시큰거리는 게 영 심상찮았던 탓이다.

“······.”

맨살을 확인한 사내의 머리털이 쭈뼛 서며 오한이 들었다. 두꺼운 발목에 시퍼런 피멍이 들었다. 다섯 손가락의 형상이 선명한 멍 자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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