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팔랑팔랑. 나비가 날갯짓하자 희고 고운 입자가 빛을 발하며 시야를 삼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무개는 신당 내실에 전과 같이 앉아 있었다.
⎯ 협곡 밑바닥으로 기어 들어간 주민들을 간신히 추격의 마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공포가 그들을 잠식했죠.
우리 중 누군가는 도자역에 걸렸을지 모른다.
병을 앓으면서 이를 숨기고 우리네 틈바구니에 섞여들었을는지도.
⎯ 하여 생존자들은 규칙을 하나 정했습니다. 몸에 상처를 내어 서로 피를 보여 주는 것이죠.
도자역에 걸리면 상처가 찢어지고 피 흘리는 대신, 부서지고 깨진다. 이보다 분명한 확인법은 없기에. 협곡에 걸어들어온 자들은 매일같이 자해를 감행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단지 확인 절차일 뿐이었던 자해가. 어느 순간 성격이 바뀌었다.
⎯ 이들은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자 신앙의 힘을 빌렸습니다. 하여 상처의 증명이던 자해는 성스러운 피로 둔갑해 버렸지요.
삿갓에서 날아오른 나비가 허공을 건너 소년 신령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 이 성스러운 피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권능이 깃들었다 합니다.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나비를 돌아보았다. 팔랑팔랑 가벼운 날갯짓이 꼭 웃음 짓는 듯했다.
“신령이 만들어졌네요.”
술사는 긴긴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했다. 아무개는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신령이 만들어졌다고? 인간에 의해서?
“······그런 게, 가능···해?”
“현상이 의지를 가진 것이 신령이라면, 다수의 절대적인 신앙이 의지가 되어 특정 현상을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선후가 뒤바뀌어도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까? 아무개는 회의적인 입장이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협곡 마을 주민들은 평범한 인간의 피를 세상에 다시 없을 치유제로 만들어 냈다지 않는가. 심지어 대대손손 이어지게끔 했다.
“······쉽네. 이러다간··· 개나 소나, 죄 신령이 되겠어.”
“하하. 실제로 개의 신령님과 소의 신령님도 있는걸요.”
술사는 살랑살랑 웃으며 미묘하게 어긋난 소리를 했다. 나비가 보여 준 환상의 충격에 멍해진 소년을 보며 술사가 턱을 괴었다.
“그만큼 과거 윗마을 주민들이 절실했다는 뜻이겠지요. 간절함이 불러온 기적이라 할까요.”
“······그래도.”
얼마나 절절한 신앙이었던 간에 손쉽게 신령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지 않나. 자연 발생한 신령은 기본 수백에서 수천 년, 그 이상에 달하는 세월이 빚어내건만. 고작해야 일개 마을 주민의 염원이 치유력을 지닌 신령을 뚝딱 만들어 냈다니.
“비교적 수월히 태어난 만큼, 한계도 명확할 거예요.”
술사가 부연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기척이 다가왔다.
“신령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하인의 부름에 소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리 들이거라.”
몇 가지 나물 반찬과 멀건 국으로 이뤄진 소박한 상차림이었다. 아마 이 마을 기준으로는 성찬이 아닐까.
딱히 허기진 건 아니라 아무개는 베갯잇이나 찾으러 가려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속을 든든히 하라는 소년의 설득은 귓등으로 들었으나, 술사가 그에 동조하여 아무개도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엉겁결에 상 앞에 앉게 되었다.
제 몫의 국을 떠먹은 아무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거 맛이 좀··· 이상한데.
하지만 술사와 소년 신령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가 예민한 걸까, 아무개는 고개를 기우뚱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팔랑팔랑 앞서 날아가는 나비가 분신하듯 여러 잔상으로 나뉘었다 한데 뭉쳤다. 아무개는 무거운 눈꺼풀을 손등으로 꾹 누르듯 문질렀다.
취한 듯 멍한 머리. 혼곤하여 깊이 궁리할 수 없고 감각마저 제 것이 아닌 양 동떨어졌다. 몸이 축 늘어지고 깜빡하면 즉시 곯아떨어질 듯싶었다. 이런 기분이 처음은 아니다. 외려 익숙하지.
이상한 점은, 아직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 하루 이틀 밤을 새워 봤어야지. 하룻밤 꼬박 지샜으나, 그쯤은 아무개에게 일상이었다.
아무개는 자신이 깨고부터 시간별로 어찌 운신하는가 저술할 수도 있었다. 당장 기습받아도 넋 놓고 당해 버릴 듯 몽롱한 현 상태는, 최소 열흘 밤낮을 꼬박 새워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다다랐을 때나 겪는 단계였다.
쿵- 나무줄기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얼얼한 둔통이 잠시나마 정신을 맑게 일깨웠다.
⎯ 어이쿠, 왜 그러십니까요?
대뜸 자해하니 나비가 쪼르르 날아왔다. 걱정하듯 머리맡을 맴돌았으나, 아무개는 시야에서 얼쩡대는 희멀건 덩어리가 거슬리기만 했다. 이마를 나무에 붙인 채 고개만 틀어 나비를 노려보았다.
“넌······ 뭔데, 여기 있어?”
⎯ 제 자초지종을 알고 싶으십니까?
“······아니. 별로···.”
⎯ 손님께서도 익히 아는 사연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자식 놈은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사고 치고 협잡이나 일삼는 머저리라 마을에서 쫓겨나고 말았죠. 오갈 데 없이 여기저기 전전하다 보니 이곳 협곡 마을까지 당도했습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보여드릴깝쇼? 백번 말하기보다 한 번 보여드리는 게 더 빠르니 말입죠.
“···아니······ 됐···.”
썩 궁금하지도 않은 네 인생사 따위 보여 줄 필요 없는데.
하지만 이미 시야가 뒤바뀌었다. 미처 거절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꿈장수의 환상이 펼쳐진 것이다. 짜증이 치밀어 고개를 홱 들어 젖혔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여기는··· 신당이잖아?
협곡 마을의 유일무이한 기와집. 소년 신령이 머무는 신당.
아무개는 기껏 졸음을 참으며 걸어온 길이 무위로 돌아간 듯해 영 찜찜했다. 물론 이 모든 건 꿈장수가 자아낸 환상일 뿐, 실제 육신은 여전히 협곡을 벗어난 숲속에 있을 테지만.
“제발, 제 말을 좀 들어 주십쇼!”
웬 머슴 놈이 소녀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 얼굴이 묘하게 낯익어 살펴보니 꿈장수였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신령님은 저 같은 필부와 태생부터 다르시니 피를 얼마나 흘리던 괜찮은 줄로 알았습니다. 한데 아니잖아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소녀는 머슴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아마 저 소녀가 과거 협곡 마을의 신령님이었던 모양이지. 피로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은 대를 이어 왔다 했으니. 초면의 외지인에게 다짜고짜 살려 달라던, 경우 없고 버릇없고 생각 없는 소년 신령의 까마득한 조상님일 터.
“신령님이 피 뽑다 정신을 잃었는데 다들 어찌나 태연하신지. 신령님이 깨어나시거든 마저 치료하러 오겠다질 않나. 씨발, 그게 기절한 사람 두고 할 소립니까? 어째서 신령님 희생을 당연시하느냔 말입니다!”
⎯ 협곡 마을에 오고부터 신당에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꺼렸지만, 신령님께서 마음 써 주신 덕이었습죠.
환상 속 머슴의 외침과 나비가 들려주는 꿈장수의 의념이 섞여들었다. 그마저도 망연한 머리는 반쯤 흘려 버렸지만.
“차라리 도망가시죠. 신령님은 쭉 협곡에 계셔서 모르겠지만, 여긴 진짜 이상한 동넵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미쳤다고요!”
“말을 조심하거라.”
소녀가 처음으로 답했으나, 그저 주의를 줄 뿐이었다. 머슴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신령님도 참 이상하십니다요. 어찌하여 저것들이 떼쓰고 억지 부리는 걸 죄 받아 주십니까? 이 망할 것들이 죽어 달라면 죽어 주기라도 하시렵니까?!”
“······.”
“왜 말이 없으십니까. 설마··· 진정으로 죽어 줄 셈은 아니시겠죠?”
소녀 신령이 탁한 숨을 내쉬었다. 피를 뽑아내다 쓰러졌다더니. 확실히 안색이 파리하고 기운이 없었다.
“타당한 사유가 있다면, 이 마을의 신령으로서 마땅히 의무를 행해야지 않겠느냐.”
말이 안 통했다. 벽에 대고 외치는 기분이 머슴을 좌절시킨 모양이다. 홱 돌아선 머슴이 신당을 나섰다. 콰앙! 거칠게 문을 닫고 부러 쿵쿵 발소리를 울리며 유치하게 온갖 티를 냈다.
“씨발. 미친 것들한테 얼마나 세뇌를 당했으면, 애 입에서 그딴 소리가 나와?”
보란 듯 신당을 박차고 나와놓고는. 막상 멀리 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혼자 구시렁대는 말의 반절은 욕설이었다.
“하, 씨. 그 새끼들 겨우 쫓아냈는데. 또 떼거지로 밀려오면 나 혼자선 어림도 없어.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 다쳤으면 자택에서 요양을 하든가, 약을 구하든가, 의원을 뵙는 것이 상식일진대. 이 마을 주민들은 신당을 찾는 게 우선이었습죠. 하여 신령님께선 매일같이 피를 쥐어짜 내야 했습니다.
우뚝 멈춰선 머슴이 신당을 보며 읊조렸다.
“······하는 수 없지.”
방법이 없다. 머슴은 결심했다.
“납치하자.”
아무개는 새삼 어이가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누가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똑같잖은가.
야반도주.
그나마 아버지 쪽은 아씨와 의견이라도 맞췄지. 아들놈은 한 발 더 나갔다. 제멋대로 소녀 신령을 보쌈한 것이다. 과연, 고향에서 쫓겨났다는 협잡꾼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