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소년 신령은 지금껏 존재조차 깨닫지 못한 동거자의 의념을 처음 접했다.
⎯ 놀랍습니다. 정말 예까지 오셨군요!
나비의 사념은 꿈장수의 목소리로, 꿈장수처럼 호들갑스레 뇌리를 울렸다.
⎯ 한데 어쩌죠? 아쉽게도 여기엔 베갯잇이 없습니다요.
이때 아무개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또 사기 쳤어?
발끝에서 미미하게나마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퍼져 나왔다. 의도가 분명한 살기를 숨길 생각도 않는 아무개를 의식한 나비가 두 날개를 가쁘게 팔랑였다.
⎯ 여기 말고, 바깥! 마을 밖으로 조금 더 가야 있습니다!
머릿속을 쨍하게 울리는 의념. 한쪽 눈을 설핏 찌푸린 아무개가 나비를 덥석 잡아챘다. 어차피 이 모습도 환상으로 만들어 낸 것일 터. 자제할 필요성 따윈 느끼지 못했다. 날개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몸통을 으스러트릴 셈으로 움켜쥔 찰나.
“신령님. 계십니까?”
누군가 문가로 접근했다.
“곧 정오이지 않습니까. 혹 손님들께서 함께 진지를 잡수실는지요?”
“어? 어, 그··· 그래! 어여 서두르거라! 술사님들 허기지시겠다.”
당혹한 소년 신령이 일거리를 주어 아랫것을 보내 버렸다.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바깥 동향을 살핀 소년은 하인의 기척이 멀어지자 겨우 안도했다.
⎯ 무튼, 정말입니다! 이번엔 진짜로 있습니다요!
아무개의 손 틈새로 날개 한 자락을 비죽이며 나비가 요란하게 주장했다. 창백한 주먹에 짜부라진 나비를 가만 보던 술사가 아무개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어쩔까요.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믿어 보실래요?”
“······술사님이 원하면··· 그래.”
아무개가 손을 풀어 주자 나비가 비실비실 날아 삿갓 위에 털썩 안착했다. 파르르 떨리는 날개가 안도하는 양 했다.
“지체할 필요는 없겠죠. 지금 바로 가 볼까요?”
“잠깐, 나도 데려가 주세요!”
소년 신령이 술사의 팔에 덥석 매달렸다. 아무개는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소년의 열 손가락을 가지치기하듯 하나하나 분지르는 상상을 하며 팔짱을 꼈다. 술사는 소년을 내치지 않았다.
“당신을 데려가는 건 어렵지 않아요. 다만 이곳을 벗어난 후 어찌 지낼지 계획이 있나요?”
“그건··· 정 안 되면 까짓거 농사라도 짓죠, 뭐!”
이놈 말하는 본새 봐라. 아무개는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농사는 뭐··· 쉬운 줄 알아···?”
좀 전에 사람 부리는 꼴을 보니 제 손으로 밥 한 번 지어 본 적 없는 듯한데. 이런 놈들이 꼭 농사를 우습게 보지.
“손에··· 흔한 굳은살 하나, 없으면서······ 남이 보살펴 주는 생활에··· 익숙한 놈이······ 퍽이나?”
온당한 지적에 소년은 말로 얻어맞은 듯 움츠러들었다. 하나 곧 턱을 치켜들고 바락댔다.
“그럼 직업 알선이라도 해 주시든가요! 어차피 여기 남아 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냐고요!”
뭐 맡겨놓은 듯 당당한 행태에 아무개는 기가 찼다. 여전히 술사의 팔을 동아줄마냥 간절히 잡은 꼴이 심히 거슬렸다. 상상 속에서 열댓 번은 꺾어 버린 저 손가락을 실제로도 부수고 싶어졌다.
“무어, 나도 맨입으로 도와 달라는 건 아니에요. 대신··· 내 피를 줄게요! 혹 다치거나 하면,”
“안 돼요.”
소년이 어떤 헛소리를 지껄이든 잠자코 들어 주던 술사가. 처음으로 도중에 말을 끊었다.
“살고 싶어서, 피를 내어 주기 싫어 떠나는 거잖아요. 그럼 함부로 쓰지 말아야죠.”
“아니, 나는··· 마을 사람 수백보다는 술사님 두엇한테 주는 게 훨씬 나으니까···.”
우물쭈물하는 소년에게 술사가 차분히 타일렀다.
“협곡 밖엔 훨씬 많은 사람이 살죠. 위기가 닥칠 때마다 피를 바쳐 모면하려다간, 지금과 비할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피의 권능이 알려질 거예요.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차라리 협곡이 그리워지겠죠.”
술사는 부드러운, 그러나 단호한 태도로 소년의 손을 떼어냈다.
“진정으로 여길 떠나고자 하거든, 이제부터 피와 관련된 건 전부 잊으세요.”
그리 못 하겠다면 당신을 데려갈 수 없다고. 술사가 조건을 걸었다.
뻔뻔하게 잘만 들러붙던 소년이 굳은 듯 입을 닫았다. 삶에 근간이 되어 주고 자신을 남다른 존재로 만들어 준 특별한 권능을 버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
“생각할 시간을 드려야 할 듯싶네요. 아무개 님은 어때요?”
술사가 손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돌아섰다.
“우리, 잠깐 헤어질까요?”
안 그래도 밤을 새워서 피곤하실 텐데. 이분이 고민하는 동안 마냥 기다릴 수는 없고.
생각을 정리하듯 혼잣말처럼 읊조린 그가 이어 말했다.
“베갯잇을 구해서 한시라도 빨리 주무시는 게 좋겠죠? 효율적으로 움직이려면 한 명은 베갯잇을 찾고 한 명은 남아서 여기 일을 봐야겠네요.”
아무개는 가만히 선 채로 눈만 도르르 굴렸다. 그 행동을 들여다본 술사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싫어요?”
싫다.
한데 구체적으로 무어가 어찌하여 싫은고 하니 아무개도 모를 일이었다.
술사님과 떨어지는 것? 그야 좋지는 않으나, 영영 이별하자는 것도 아닌데. 잠시 잠깐으로 이리 거부감이 들까.
술사님이 저 꼬마를 챙겨 주는 것?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손 내미는 것은 유랑술사가 늘 하는 일이잖은가. 새삼 불쾌할 까닭이 있을까.
“······베갯잇··· 내가 가져올게.”
아무개는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둘로 나뉘는 편이 더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다. 하나 사람이 득실거리는 마을에 술사 없이 홀로 남을 경우,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장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아무개는 떠나는 쪽을 택했다.
“하면 저는 여기 남아서 이분 문제를 손볼게요.”
소년 신령은 자신이 버려지지 않는다는 확신에 얼굴을 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참 감사한데··· 무얼 손보시겠다는 건가요? 제가 마음을 정하면 함께 도망치는 게 아닌가요?”
“원하신다면야. 한데 몰래 도망칠 필요가 있나요? 죄인도 아닌데.”
작별인사도 하고, 그간 마음에 담아 둔 것도 풀어내고, 따로 가져갈 물품이 있다면 챙기고. 야반도주가 아니라 한낮의 이사처럼, 할 거 다 하라는 술사의 권유에 소년의 눈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 그래도 되겠어요?”
“왜 안 되겠어요. 제가 있는데.”
소년 혼자서는 몰래 도망치는 것도 버거울 테지만, 술사는 달랐다.
“중요한 건 당신이죠. 얼마나 결심을 강하게 굳혔는가, 말이에요.”
소년의 말수가 도로 줄었다. 고개를 떨구는 모양이 객관적으로 안쓰러웠으나, 아무개는 탐탁지 않을 따름이었다. 저놈이 결심만 빨리해도 술사님과 함께 베갯잇을 가지러 갈 텐데.
“사람들이······ 울고불고 매달리면··· 흔들릴 정도의, 마음이면··· 지금 말해.”
괜히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말고. 그런 속내를 담아 내뱉자 소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어느 정도 대화가 일단락되자 술사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워 팔을 걸친 그가 노는 손으로 삿갓 가장자리를 어루만졌다.
“협곡 밖으로 나가 본 적 있나요?”
“···아뇨. 한 번도 없어요. 어릴 적부터 주변 어른들께서 절대로 마을을 벗어나면 안 된다 하셔서요.”
몇몇 인원이 물자를 공급받고자 주기적으로 협곡 밖을 드나들지만, 자신은 예외라고. 그리 덧붙이는 소년의 이야기에 아무개는 의문이 들었다.
“물자를··· 공급받는 거야, 강탈하는 거야···?”
“그게 그거 아닌가요?”
“······.”
도적 소굴에서 평생을 살아 온 신령님이란.
무의식중에 한심하다는 내색을 밖으로 흘려 버린 걸까. 소년 신령이 제발 저린 듯 변명했다.
“그··· 어쩔 수 없어요. 협곡에는 빛도 잘 들지 않아 농사가 어렵거든요. 겨울철에는 당장 내일 먹을 것도 부족한 형편이다 보니. 잘사는 분들께 얻어 오는 수밖에···.”
“왜··· 이런 데서··· 살아? 그냥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영감님이나 다른 어른들 모두 밖은 위험하니 안 된다고만 하시는데. 제 또래 중에는 아무도 안 믿거든요.”
협곡 밖을 다녀올 적마다 질 좋은 물품을 잔뜩 짊어지고 오는데 누가 위험하단 경고를 믿을까. 차라리 협곡 바깥세상은 전설 속 무릉도원이라는 편이 좀 더 믿음직하겠다.
“······왜 다들 여기서 아등바등 버티는지 모르겠어요.”
⎯ 그 이유는 제가 압니다요!
때맞춰 나비가 끼어들었다. 아무개는 아무도 네게 안 물어봤으니 닥치라고 조언하려 했으나, 꿈장수의 수작질이 먼저였다.
⎯ 이 마을이 어찌 형성되었는가. 그 뿌리부터 살펴보면 말입죠~
벽과 지붕으로 둘러싼 실내가 허물어지고 낯선 광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옛날옛날 어느 날. 하루아침에 돌연 대협곡이 생겼답니다.
너른 땅이 요동치며 쩌적 갈라졌다. 꿈장수가 자아내는 생동한 환상을 처음 겪어 본 소년이 기겁하며 비명을 내지르는 가운데. 급변한 지형의 여파가 순식간에 스쳐 갔다.
협곡은 남과 북,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양단했다. 주민들은 임시로나마 다리를 놓고 교류를 지속했으나, 윗마을에 도자역이 창궐하고 말았다.
윗마을의 생존자들은 역병을 피해 도주했다. 하나 주변 지역에서 도자역이 퍼지게 내버려 둘 리 없다. 동, 서, 북 세 방향이 막히자 그들은 협곡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남쪽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으니.
흩어진 도망자들이 다리로 몰려들었다. 가느다란 흔들다리가 쏟아지는 인파에 삐걱대며 출렁였다. 윗마을 주민들이 다리를 반절 가량 건널 즈음, 아랫마을 쪽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각자 날붙이를 손에 들고서.
그들은 다리를 지탱하는 밧줄에 슬근슬근 톱질했다. 윗마을 주민들이 아우성치며 서둘러 내달렸다. 그럴수록 다리는 한층 위태롭게 흔들렸고 인파에 떠밀려 추락하는 자들마저 생겼다.
마침내 선두에 선 이가 다리 끝에 도달했으나, 지면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다. 아랫마을 주민들이 날붙이를 들이밀며 넘어오지 못하도록 위협한 탓이다.
서로 실랑이하는 사이 투둑, 밧줄이 끊어지고 다리가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다리 위의 사람들이 협곡의 어두운 그늘로 속절없이 떨어졌다.
건너편에서 다리를 건너고자 기다리던 윗마을 주민들은 망연자실했다. 앞으로는 끊어진 다리, 뒤로는 역병. 벼랑 끝에 선 이들이 결심했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자고.
⎯ 이것이 협곡 마을의 시초입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