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내가······ 이상하게 지으면··· 어떡해?”
“염려하지 마셔요. 저는 아무개 님이 이름을 어찌 지으시든 결코 토 달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당사자 의견은 들어야겠지만요. 그리 덧붙인 술사가 뱀이 깃든 오른팔을 살살 흔들었다.
밤중의 산은 아닌 듯 소란하다. 평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둥그런 동굴 형상을 따라 조각난 밤하늘을 보니 오늘따라 달이 유난히 밝았다. 식사를 다 마친 그들은 부엉이 울음을 주악 삼아 차를 마셨다.
“옛 시인들은 술잔을 들어 달과 문답을 나누었다는데. 저는 술을 즐길 수 없네요. 풍류와는 연이 없나 봐요.”
술사가 잔에 차를 따랐다. 부옇게 올라오는 다관의 김이 그의 얼굴을 흐리게 감추었다. 아무개는 합환주 한 잔에 취해 버린 술사를 떠올렸다. 술이 약하다 하였지.
“대신··· 다도는 잘하잖아.”
행주를 쥐고 찻잎을 담아 다관을 돌리는 손길이 능숙했다. 아무개는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머금었다. 술사가 달여 낸 차는 씁쓸한 맛이 없고 부드러웠다. 차를 내어 준 그 본인처럼.
“옛날에 신세 진 은사님께 배웠어요. 그 무렵엔 하루 세 번씩 꼬박 차를 마셨죠.”
아무개는 잔을 입가에 댄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술사가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에 촉각이 곤두섰다.
“은사님이··· 차를, 좋아하셨나 봐···?”
“네에. 목욕한 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재밌다 하셨어요.”
······이게 뭔 소리야?
“···은사님이······ 독, 특··· 하시네.”
“하하. 편하게 말하셔도 돼요. 괴짜라고.”
아니··· 소올직히 내심 그 단어를 떠올리긴 했지만, 대놓고 콕 집어 언급할 마음은 없었는데.
간혹, 아니 종종 드는 생각인데. 술사는 일견 공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막상 입바른 소리에 거침없었다. 온화한 미소로 너그러이 포용하면서도 특유의 나긋나긋한 어조로 짚을 건 확실히 지적하니 그 괴리감이 상당했다. 가끔은 누군가 복화술로 대신 말하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무어 괴짜라고는 하나 은사님을 거론하는 술사는 여느 때보다 느슨히 안색이 풀어졌다. 그의 미소는 태반이 습관처럼 굳어진 것으로 빈껍데기인 양 했으나, 이번은 진심에서 비롯된 형색이었다. 술사의 연배를 고려하면, 괴짜 은사님은 일찌감치 고인이 되셨겠지.
궁금해졌다. 술사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몽환전주가 초대한 꿈속에서 잠시 엿보았지만, 그땐 여장을 한 데다 언행에 제약이 있었잖은가. 실지로 어린 그가 어찌 말하고 행동했을는지. 지금처럼 늘 웃었는지. 사소한 것들이 알고 싶었다.
“아무개 님.”
잔을 내려논 술사의 손이 아무개를 향해 다가왔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크고 곧은 손.
화살이 미간으로 날아들고 검날이 번뜩이며 생채기를 내도 눈 한 번 깜짝 않던 아무개는, 위협이라곤 없는 무해한 손길에 질끈 눈 감아 버렸다.
“머리. 이대로 두실 건가요?”
그의 손끝이 축축한 머리칼을 건드렸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도록 꼬옥 눈 감은 아무개가 조심스레 실눈을 떴다.
“아직 젖었네요.”
술사는 물기에 엉겨 들러붙은 머리칼을 손가락 새로 문질러 흐트러뜨렸다. 그러고는 돌연 머리에 얹힌 수건을 잡아 일어나선 아무개를 마주했다. 이어서 양손에 수건을 쥐고 물기를 훔쳐내는 그 행태에 아무개는 바짝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였다.
“하하, 너무 오지랖인가요?”
스스로도 과하다 싶었던 듯 술사가 멋쩍게 웃었다.
“실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는데, 통 말릴 생각이 없어 보여서요. 이러다 고뿔 들겠어요.”
술사의 손길이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아무개의 고개도 차츰 기울어졌다. 탁, 탁. 정리를 마친 술사가 수건을 거둬가도 죄인처럼 푹 숙인 머리는 올라올 기미가 뵈질 않았다. 술사는 팔등에 수건을 걸치고서 검지로 아무개의 귓바퀴를 가볍게 톡, 튕겼다.
“거봐요. 벌써 귀가 발개졌잖아요.”
“······!?”
소스라친 아무개가 펄쩍 뛰며 물러섰다. 단숨에 평상 반대쪽 끝까지 다다른 아무개는 한껏 달아오른 귀를 손으로 가리고서 기함했다.
아니, 아니야. 이건 추워서 빨간 게 아니라고!
“목까지 붉어졌네요. 이불 덮어드릴까요?”
평상을 정리한 술사가 바위 위에 놓아둔 이불을 가져와 깔았다.
“누우시겠어요? 물론 아무개 님은 주무시지 않겠지만, 그래도 누워서 쉬는 게 편하잖아요.”
여전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아무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굴을 파듯 이불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던 때였다.
“이런, 문제가 생겼네요.”
술사가 심각함이라곤 조금도 배어나지 않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개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술사가 베개를 들어 보였다.
“베개가 하나밖에 없어요.”
“······술사님이 써.”
아무개는 간단히 해결했다. 자신은 어차피 밤을 지새울 테니까. 등 따시고 배부르면 필시 졸음이 온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불편한 편이 나았다.
“양보해 주시는 거예요?”
아무개는 무심코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평상부터 그들이 깔고 누운 이불, 좀 전에 마신 차와 식사, 심지어 지금 입은 옷까지. 모조리 술사가 대령한 것들이다. 물론 베개도 술사가 챙겨왔다.
그걸 자신이 양보한다는 건,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소리잖은가?
“좋아요. 베개를 양보받았으니 저는 몸으로 갚을게요.”
“······몸, 으로···?”
일순 엄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개는 떠나간 이성을 되찾고자 서둘러 고개를 털어냈다.
그사이 술사는 검지를 고리처럼 걸어 머리끈을 주욱 당겼다. 단단히 조여 맨 끈이 미끄러지고 긴 머리칼이 느슨하게 퍼졌다. 한데 묶은 머리 타래를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은 그가 삿갓을 얼굴에 덮어씌웠다.
반듯이 몸을 누인 후. 술사가 삿갓을 비껴들었다. 한쪽 눈만 겨우 드러난 상태로 그가 아무개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어때요. 팔베개라도?”
아.
아아.
할 수만 있다면,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몸으로 갚는다는 게··· 팔베개야?”
“네에. 몸이잖아요?”
이 남자를 어쩌면 좋지. 아무개는 통탄을 금치 못했다.
너무··· 너무 헤프잖아!
“참, 아무개 님은 내외하셔야 했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의성 짙은 한숨을 내쉰 술사가 팔을 거둬 갔다.
“서방님께서 부끄럼이 많으셔서 곤란하네요. 오늘도 소박맞으려나.”
“내, 내가 언제······ 술사님한테··· 소박을 줬어.”
술사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아무개였으나, 이번만은 억울해서 절로 반박이 나왔다. 하지만 더듬거리는 아무개와 달리 술사는 유창하게 받아넘겼다.
“열여덟 번이나 혼례를 치렀는데. 제게 한 번도 손대지 않으셨잖아요. 십여 년간 한 지붕 아래 살고 아이까지 있는데 동침을 않았다니, 놀라워라. 우리 아이는 대관절 어찌 생긴 걸까요. 황새가 물어다 줬나?”
아무개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술사님, 멀쩡한 얼굴로 잘도 태연하게 헛소리하는구나.
꿈장수를 찾는답시고 저자를 돌아다닐 적에 술사가 벌인 행적을 알았다면, 그가 헛소리뿐 아니라 거짓부렁에도 능함을 진즉 알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아무개는 시력을 잃은 상태였더랬다.
물론 지금도 술사의 ‘개소리’를 ‘헛소리’랍시고 자체 순화해 주는 무지막지한 콩깍지를 꼈으니. 주경에서 두 눈 멀쩡했어도 어떻게든 합리화해 주었으리라.
“그거··· 혼례, 다 꿈이잖아··· 어차피 가짜인데.”
어떤 미친놈이 생판 남에게 부모님 합방을 고스란히 보여 줄까. 꿈장수가 아무리 사기꾼이래도 그 정도 염치는 있었다.
그들은 아씨와 노비가 되어 부부생활을 했으나 십수 년에 달하는 세월을 고스란히 겪지는 않았다. 신령이 읽어낸 노비의 기억을 토대로 제작한 꿈이었으니. 노비의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진 특정 구간을 중심으로,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갈 뿐.
“하하, 알죠. 모두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 것을.”
술사가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예 누우라는 듯이.
아무개는 재차 이불을 파고들어 꼼질꼼질 기어갔다. 아무개가 자리 잡은 걸 확인하고서야 술사는 삿갓을 얼굴 위로 내려놓았다.
“아무개 님은 안 주무시겠죠?”
“으응···.”
“홀로 밤새우면 지루하겠네요. 심심하시거든 저 깨우세요. 놀아드릴게요.”
아니··· 그건 아니지.
아무개는 적극적으로 사리 분별을 하지 않는 망나니였으나, 술사에 한해 지극히 상식적으로 예의범절을 지켰다. 그러니 절대로 안 그럴 테지만, 무료하다는 핑계로 그를 깨우면 어떨지 궁금하긴 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술사님 깨우면······ 뭐 하고 놀아 줄 거야?”
“글쎄요. 종이접기라도 할까요?”
종이접기? 예상 밖의 건전한 놀음에 마땅히 대꾸할 거리가 생각나질 않았다. 머뭇하는 아무개의 침묵을 곡해한 술사가 항변했다.
“저 종이접기 잘해요.”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