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四. 협곡의 그림자
“벌써 저녁이네요. 당장 협곡으로 가기는 어렵겠지요?”
지평선을 물들인 불그스름한 낙조를 보며 아무개가 으응, 하고 어물어물 답했다.
“쉴 만한 데로 가야겠네요. 대협곡 인근에 번화한 성도, 인적 드문 산속 동굴. 어디가 좋아요?”
아무개는 후자를 선호했다. 사람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외딴곳에 단둘이면 더욱 좋았다.
쉭, 쉬익-
아무개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검은 뱀이 쉭쉭 거렸다. 아무개는 생각을 고쳤다. 단둘은 아니구나.
“번화한 곳······ 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괜찮으신가요? 아무개 님은 사람 많으면 불편하시잖아요.”
“저녁을··· 해결하려면, 그쪽이··· 낫잖아.”
후에 외딴 산골로 옮겨가더라도 우선은 번화가로 가는 게 옳다.
“하면 주단으로 가겠습니다.”
그러고는 술사가 손을 내밀어서, 아무개는 일순 굳어 버렸다. 이거··· 잡으라는 뜻이지?
“땅굴에 떨어질 적에 부적을 거의 소모해서 남은 게 몇 안 되어요. 당분간 아껴야 할 듯싶어서요.”
축지술을 쓰려는데 부적이 얼마 없다. 그러니 손을 잡자는 서설에 아무개는 삐걱이며 힘겹게 팔을 움직였다. 한데 그 순간, 술사의 소매에서 튀어나온 뱀이 머리를 척 들이밀었다.
눈치 없고 뻔뻔한 행태에 아무개의 눈이 샐쭉하니 가늘어졌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걸까. 찔끔한 뱀이 슬그머니 도로 숨어 버렸다.
불청객을 쫓아낸 아무개는 만족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즉시 축지술이 펼쳐지고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술사님··· 그 뱀도, 책임지려고··· 데려온 거지? ···나처럼.”
“으음. 그렇죠? 제가 청현수의 위치를 밝히지 않았다면, 이분이 혼자 남을 까닭이 없었으니 말예요.”
청현수를 찾아낸 건 술사였으나, 그는 비밀을 약조 받았고 신뢰를 저버린 건 운해 하씨 측이었다. 이무기의 씨가 마른 것도 그들 소행이고. 하니 술사가 입에 올린 책임이란,
“또··· 도의적 책임, 이야?”
여전히 술사의 손을 잡은 채. 아무개가 그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렇게, 모든 걸 책임지려다가는······ 온 세상을 책임지고 말 거야.”
저물어 가는 노을 탓일까. 삿갓이 드리운 그늘 때문이려나.
“그런 건··· 신이나 할 수 있잖아.”
늘상 미묘한 듯 웃는 술사가 어렴풋이 말아 올린 입꼬리를 경직시켰다.
“술사님은··· 사람이라고, 그랬잖아.”
그가 하 종주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며. 아무개는 자꾸만 줄어드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이었다.
“나는, 술사님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손에서 힘을 풀었다. 빠져나가려는 아무개의 손을 술사가 붙잡았다.
그는 무심결에 아무개를 붙들고는, 그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듯 기묘한 시선으로 얽힌 손을 내려보았다. 그의 입가에 의식적으로 꾸며 낸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짐이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실이잖아.”
이 세상은 아무개를 봉인 혹은 토벌해야 마땅한 삿된 존재로 여겼다. 그런 걸 책임지려다간, 온 세상을 적으로 돌려야 할는지 모른다.
“있잖아, 술사님··· 꿈장수한테 베갯잇을 받고··· 내가, 만약 악몽에서 벗어나게 되면···.”
⎯ 웬 놈이냐!
뇌리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의념(意念).
⎯ 이리 불길한 것이 어이하여 예까지 왔단 말인가.
⎯ 썩 꺼지지 못할까!
아무개는 힐끔 눈동자만 굴렸다. 굵직한 목재에 험상궂으면서도 해학적으로 새겨진 얼굴. 마을 어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승이다. 길목 양쪽으로 하나씩 세워진 장승 몸체에는 각기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 쓰여있었다.
“안녕하세요, 장군님.”
술사가 장승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장승도 그에게만은 험악한 낯을 풀고 근엄하면서도 호의적인 자세를 취했다.
⎯ 그대는 널리 선행을 베푸는 술사가 아닌가.
⎯ 주단에 온 것을 환영하네. 그대라면 언제든 기쁘게 맞이함세.
⎯ 한데 어찌하여 저리 삿된 것을 가까이하는 겐가.
장승들이 아무개를 보고는 도로 눈을 부라렸다.
⎯ 근묵자흑이라 하였네. 백로가 까마귀와 어울릴 수는 없는 법이야.
졸지에 백로가 된 술사가 난감한 듯 설게 웃었다.
“이분은 아무개라 합니다. 저와 함께하는 일행이시지요.”
⎯ 허어, 참. 변방의 장승에게조차 이름을 떨친 선인이 어쩌다 저런 것과 얽히었는가.
⎯ 자네 혼자라면 모를까. 이리 흉악한 것은 결단코 마을에 들일 수 없네!
장승들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강경했다. 술사가 한 차례 더 운을 띄었다.
“제가 책임지고 보증해도 어려울까요?”
⎯ 허허. 알 만한 이가 어찌 그러시나.
⎯ 내 당장에 저 악독한 것을 내치지 않음은, 그대의 체면을 보아서일세.
아무개는 몹시 불만스러웠다. 나무토막들이 무어라 지껄이든 전혀 개의치 않았으나, 자신 때문에 술사님이 저자세로 나오는 건 심히 못마땅하였다. 해서 술사의 소맷자락을 잡고 살며시 당겨 주의를 끌었다.
“술사님··· 가자.”
“네?”
“동굴··· 이랬나? 아무튼···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
기실 아무개는 원래부터 동굴이 좋았더랬다. 인산인해는 끔찍하게 싫으니까. 다만 술사님의 편의를 위해 참아 볼까 하였을 뿐.
술사는 아무개를 물끄러미 보더니 의중을 재확인했다.
“그럴까요? 아무개 님 동굴로 가고 싶어요?”
“으응··· 난 사람 많은 곳은 별로···.”
“그러지요, 그럼.”
술사가 아무개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동시에 축지술이 펼쳐지며 정돈된 너른 길 대신 무성한 수풀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커다란 손이 머리칼을 가볍게 스치며 멀어졌다. 아무개는 그가 제 머리를 쓰다듬은 건지 단순히 축지 때문에 접촉한 것인지 헷갈렸다.
“이 근방으로는 어지간하면 오질 않아서, 저도 썩 잘 아는 편은 아녜요. 해서 드릴 만한 선택지가 두 가지뿐이네요.”
다환 전역을 오가는 술사는 구석진 산간오지를 두루 꿰고 있었다. 하나 대협곡 주변 지리는 비교적 미숙하여 주단과 동굴 두 가지 안밖에 제시하지 못했다.
“의념을 보낼 정도로 강한 장승은 드문데. 주단 금씨가 상당히 공을 들인 모양이에요.”
어둑한 밤의 산을 오르며 술사가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요.”
“······어?”
조근조근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악곡인 양 음미하던 아무개가 당혹했다. 술사님이 왜 사과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주단으로 곧장 축지할 것을. 시선을 피하고자 변두리로 온 건데 하필 장승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성큼성큼 앞서가던 술사가 돌연 우뚝 멈추었다. 아무개는 그 등에 코를 박을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술사님···?”
그의 눈길이 숲속에 가 닿았다.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웬 쇳덩어리가 나무줄기에 박혀 있었다. 형태나 모양으로 보아 장도인 듯한데 확실치는 않았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받아 잔뜩 녹이 슨 탓에.
“···술사님? 왜···?”
먼 어딘가를 헤매다 돌아온 듯. 술사의 눈에 뒤늦은 현재가 담기었다.
“저게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은 몰랐네요. 자, 거의 다 왔어요.”
술사가 다시 앞장섰다. 아무개는 그를 뒤따르며 나무에 높이 박힌 쇳덩어리를 흘깃했다.
저거 거꾸로 꽂힌 것 같은데.
두께로 보아 장도의 날이 아닌 손잡이가 나무에 박힌 듯싶었다. 구태여 저리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무슨 상관이랴. 아무개는 관심을 거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으슥한 곳에 숨겨진 동굴을 발견했다.
“저기가 협곡이에요. 날이 밝으면 가죠.”
동굴 입구에서 술사가 멀리 한 점을 가리켰다. 우뚝한 준봉 너머 대협곡이 광활한 위용을 드러내었다.
술사는 너른 바위에 아무개를 앉혀 두고 사라졌다. 해가 서산을 넘어 보랏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그보다 어둑한 동굴에서 멍하니 앉아 있자니 술사가 금방 돌아왔다.
그는 우측 어깨에 둥글게 만 이불을 짊어지고 남은 손에는 초롱을 들었다. 아무개 옆에 이불을 내려놓은 술사가 초롱 손잡이를 역으로 쥐고 동굴에 못처럼 박았다. 나무와 돌이 부딪히면 나무가 부서지는 게 당연지사거늘. 그의 손에 쥐어진 가느다란 나무 손잡이는 바위벽을 두부처럼 부드럽게 뚫고 들어갔다. 캄캄한 동굴을 은은한 초롱 빛이 한 겹 밝혀 주었다.
“뭐가 더 있어야 할까요.”
아무개를 위아래로 스윽 훑어본 그가 성큼 거리를 좁혔다. 바위에 앉은 아무개 앞으로 고개 숙여 다가온 그가 손을 뻗었다. 미약한 초롱불은 넓은 삿갓에 쉬이 가려졌다. 아무개는 제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술사의 손길에 움찔 굳었다.
삿갓 너울이 검은 머리칼에 쓸리고 곧은 손끝이 옷깃을 스쳤다. 쇄골 언저리서 느껴지는 타인의 손길에 아무개의 신경이 곤두섰다. 하나 팽팽히 조여진 긴장감이 무색하게도 술사는 금세 한 발짝 물러났다. 너울 자락이 일렁이며 뺨을 간지럽혔다.
“옷이 필요하겠어요.”
술사가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자 그사이에 끼인 무언가 바스러졌다. 검게 굳은 피딱지다.
그제야 제 상태를 돌아본 아무개는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술사의 손이 닿은 옷깃은 물론, 사지 온통 피로 얼룩졌다. 이 꼴로 돌아다녔다니. 장승들이 기겁하고도 남음이렷다. 심지어 이 중 아무개의 것은 단 한 방울도 없었다.
“식사는 주문해 놓았고. 먼저 씻으실래요? 목욕물 받아드릴까요?”
“어··· 그게 될까?”
여긴 동굴인데. 의문을 담아 묻자 술사가 다시 축지했다. 아무개는 멀뚱멀뚱 그가 사라진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얼마 뒤 동굴 안쪽에서 돌연한 기척이 나타났다. 술사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나무 욕조를 대동하고 서 있었다.
아무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의 사기적인 축지술에 감탄해야 할까, 깊은 산 속 동굴에 뜨신 물 가득한 욕조를 대령하는 생활력에 놀라야 할까.
“식사는 먼저 주문한 손님이 계셔서 기다려야 해요. 그전에 씻으시겠어요?”
아무개는 머뭇머뭇하며 일어났다. 욕조 주변으로 주춤 다가가니 술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문제 있나요?”
“아니··· 문제가 아니라···.”
힐끔 눈치를 보며 욕조 반대편으로 쪼르르 돌아가 숨었다. 초롱불이 미치지 않는 응달에 웅크려 앉아 주섬주섬 소매에서 팔을 빼내자니 술사가 아, 하고 깨달았다는 듯 물었다.
“혹 내외하시는 건가요?”
쿨럭.
먹은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린 아무개가 연신 기침을 토했다. 내외라니, 내외라니!
“부끄럼을 많이 타시네요. 저희 혼례도 열여덟 번이나 올린 사이인데.”
“그, 그건······.”
전부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