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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49)화 (49/138)

49화

“저기, 대선배.”

답지 않게 어물거리며 재효가 아무개를 힐끔댔다.

“이래 봬도 여기는 상황이 나은 편이에요. 다른 쪽, 교각 부근은 엉망진창이거든요.”

“아, 그래요?”

틀에 박힌 평이한 어조의 응답. 초도의 자물쇠를 망가뜨릴 적과 유사했다. 도무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상황에 따라 지정된 행동을 뽑아내듯 건조한 태도.

그 무심한 반응에도 아무개는 어깨를 움칫했다. 엉망진창이라는 재효의 발언에는 다소 억울함마저 들었다.

소영과 재효의 짐작과 달리 아무개는 작정하고 상해를 입히려던 게 아니었다. 술사님이 위험하다니. 서두르는 중에 길을 막아대는, 거슬리는 것들을 치웠을 뿐.

심지어 그때조차 손속에 사정을 두었더랬다. 아무개는 자신의 불운이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가지 치는 것을 경계했으므로. 괜히 자신이 나서서 뜻하지 않게 일을 키울까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피해가 작지 않겠네요. 치료비라도 챙겨드려야겠어요.”

그래서 술사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안 돼. 나 때문에 술사님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어.

“어디 가세요?”

봉을 고쳐 들고는 굳은 기세로 나아가는 아무개를 술사가 불러세웠다.

“혹시나 해서······ 죽이지는··· 않았어.”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죽음에 달할 지경은 더러 있겠으나. 무어, 여긴 종가 한복판이잖은가. 적기를 놓친 불운한 사망자는 나오지 않을 터다.

“그러니까··· 지금, 확실히 죽일게.”

재효는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오늘이라도 당장 흉신을 봉인해야 하나 고민될 지경이었다.

“어찌 그러시나요? 기껏 살려 놓으시고는.”

술사의 물음에 아무개는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죽이면··· 치료비가 안 들잖아.”

이런 미친.

부상자는 치료비가 드니까. 치료가 불필요한 사망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참신한 발상에 재효는 기가 막혔다.

“아무개 님.”

흉신에게 성큼 다가간 술사가 고개 살며시 기울였다. 웃음기가 가신 진지한 음성으로 그가 부연했다.

“죽이면 치료비는 안 들지만, 장례비가 들어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아무개가 아, 하고 작게 탄성했다.

“······그렇구나.”

피할 수 없는 배상에 직면한 흉신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재효는 유랑술사에게 흉신을 맡기자는 결정이 옳았던가 되짚어 보았다. 그래도 될는지. 혹 정신 나간 놈에게 미친놈을 맡기는 꼴이 되는 건 아닐지.

“대선배한테 어떤 제약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자의로 벗어날 수 있으면 진작 나오지 그러셨어요.”

위험천만한 줄 알고 흉신까지 불러왔더니 이게 뭐냐고. 구시렁거리는 재효에게 술사가 되물었다.

“제약이라니요?”

“소영이랑 얘기했던 거예요. 대선배가 하도 화를 내지 않으니까. 혹 타인을 다치게 해선 안 되는 제약이라도 있나 했더랬죠.”

“상상이 풍부하시네요.”

으잉?

“제약 없어요? 한데 어찌 수모를 당하고도 가만있었더래요?”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어서?”

“······.”

“농담이에요. 하하.”

농담 아닌 것 같은데.

떨떠름한 낯의 후배를 두고 술사가 나붓이 걸음을 옮겼다.

“사정이 있어 감정을 자제하고 있어요. 노사우비공경(怒思憂悲恐驚) 등 부정적인 심사 위주로요.”

흔히 사람이 지닌 감정을 일컬어 칠정(七情)이라 한다. 술사는 이중 기쁨을 뜻하는 희(喜)를 제한 나머지를 모두 억누른다 한 것이다.

성내지 아니하고, 우울해하지 않으며, 근심치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놀라지 않고, 겁을 내지도 않는다.

“저 홀로 그리하겠다 마음먹을 뿐이라, 제약이라기엔 다소 거창하지요. 무어 다행히 큰일 없이 마무리되었네요.”

큰일이 없다니? 재효는 어이가 가출하는 심경이었다.

“대선배, 저기 쓰러진 사람들 안 보여요?”

축지로 단숨에 뛰어넘은 탓에 작게 멀어진 교각을 가리켜 묻자 술사가 고개를 뒤로했다.

“잘 보여요.”

“저걸 보고도 큰일이 없다고요? 중상자가 한둘이 아닌데? 심각하게 다쳤잖아요!”

“심각하다니요?”

무심코 반문한 술사가 한발 늦게 아아, 하고 동조했다.

“후배님들께는 중상으로 여겨질 수 있겠네요. 패왕이 우위를 점하고부터 이렇다 할 격전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죠.”

재효는 일순 말문이 턱 막혔다. 유랑술사는 이백여 년의 난세를 겪어 온 자였다. 그에게 피로 물든 교각 따위는 심심찮게 뵈는 흔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겪어 왔기에. 접점 없는 삶이 빚어낸 몰이해 속에서 그들은 정실에 다다랐다. 술사는 곧장 바구니에 갇힌 뱀을 꺼내 주었다. 이무기 허물을 뒤집어쓰고 운해를 위협하던 뱀이 술사의 소매로 기어 들어갔다.

빼곡히 들이찬 솟대에 둘러싸인 정실. 대숲처럼 우거진 기다란 막대에 앉은 나무 새들을 향해 술사가 입을 열었다.

“보고 계시죠?”

그는 뱀이 머리 내민 소맷자락을 보란 듯 들어 올렸다.

“이분은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청구할 사항이 있으시다면,”

소환부를 꺼내 든 그가 빈 바구니에 내려놓았다.

“여기로 보내 주세요.”

오늘 운해 하씨에서 입은 피해를 죄다 값으로 매겨도 저 부적 한 장만 못 하리라. 재효는 씁쓸한 심상을 삼켰다.

과연 유랑술사가 하 가문에게서 소환부를 받아볼 수 있을까. 사대귀인 유랑술사 일 회 이용권이잖은가. 썩어빠진 문중의 어른들이라면, 훗날을 대비해 고이 간직하길 선호할 테지.

단순한 심증이 아니었다. 교각에 널브러진 자들은 재효에게 낯선 면면이었으니.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인 오대세가에서 재효가 모르는 얼굴이라면, 호적에 이름 올린 자손이 아니라 수련생 출신이란 뜻이다.

하기야 방위대 선봉처럼 낮고 위험한 자리에 귀한 자제를 배치할 리 없지. 종회에 압력을 넣을 뒷배가 없는 이상, 그네들의 피는 헐값이 될 터였다.

“이만 돌아가지요.”

유랑술사가 빙글 돌아섰다. 즉시 부적이 날아들고 축지술이 펼쳐졌다.

다시 눈을 떴을 적엔, 멀리 다섯 손가락 형상의 기암 봉우리가 깃털 같은 구름을 걸치고 우뚝 서 있었다. 소영의 본관이자 석씨가 터를 잡은 강암 일대였다.

“자아, 도착했어요.”

본디 몽환전이 있던 주경에서 넘어오려 했건만. 도중에 샛길로 빠져 돌아온 탓에 본래 목적지인 강암이 되려 어색하게 다가왔다.

“헤어질 시간이네요.”

작별을 암시하는 술사에게 재효는 후련한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소영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불쑥 제안했다.

“이왕 오신 김에 저희 집에 들르시지 않겠습니까?”

술사가 멈칫했다. 고민하듯 아무개에게로 눈길을 옮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초대는 감사하나, 아무개 님의 악몽을 하루빨리 떼어내야 해서요.”

“저희는 한동안 본가에 머물 예정입니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거든 편히 방문해 주십시오. 저는 운해 하씨와 달리 흉신··· 아무개 씨의 출입을 금하지 않을 겁니다.”

“하하. 고마워요.”

술사가 손을 흔들며 아무개와 함께 사라졌다. 그의 축지는 정말이지 신출귀몰했다.

“어휴, 피곤하다. 소영아 우리도 어서 가서···.”

“참, 깜빡했는데⎯”

“으아아악!”

방금 사라진 술사가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자 재효가 비명을 질렀다. 조그마한 후배가 경기를 일으키니 술사가 난처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놀라셨나요?”

“어우야, 괘, 괜찮아요. 무슨 일이신데요?”

“받으세요.”

술사가 내민 것은 소환부였다.

“그간 고생하셨어요. 별건 아니지만, 혹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부르세요.”

그럼 이만, 하고 술사가 다시 떠나갔다. 남겨진 두 사람은 얼떨떨한 채로 부적을 손에 쥐었다.

“···이거 하나만 있으면 노후 걱정은 없겠지?”

“판매 계획은 없다만.”

“알아, 알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둘은 손가락 모양의 기암괴석을 향해 너털너털 걸어갔다.

“대선배는 괜찮으려나. 우리가 흉신을 풀어 준 바람에 일이 커져 버렸잖아.”

“괜찮을 거다. 운해 하씨 측에서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진 않을 테니. 그들이 먼저 사대귀인을 제물로 쓰려다 역으로 당했잖나. 수치가 있다면, 알아서 내부 단속하고 쉬쉬하겠지.”

“그치? 대선배는 사대귀인 중에서 민중에게 제일 인기 있잖아. 하씨네가 허튼수작 부린 게 알려지면, 되레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들고일어날지도 몰라.”

그런데, 하고 운을 뗀 재효가 휙 돌아서 소영의 앞에 섰다.

“너 아까부터 이상해.”

재효가 길을 막아서자 소영이 덩달아 멈추었다. 재효가 소영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리 조용해? 그야 넌 원래도 과묵한 편이다만, 평소랑 느낌이 달라. 꼭 딴생각에 빠진 것 같아.”

소영이 침묵했다. 무시가 아니라 신중히 말을 고르는 중임을 알아서. 재효는 보채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예상대로 조금 뒤 소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효. 혹시 하 종주님께서 선배님께 사용한 진법을 기억하나?”

“의례당 바닥에 그려놓은 거 말이지? 자세히 보지는 못했는데, 왜?”

“어쩐지 눈에 익어서 계속 생각해 보았다. 한데 방금 막 떠올랐다.”

소영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건 소환진이다. 술사가 언약 맺은 신령을 불러들이는.”

“얼레. 그 진법에 아무것도 안 떴잖아?”

“그래.”

소영이 결론지었다.

“선배님과 언약을 맺은 신령이 없다는 뜻이다.”

쏴아아··· 바람이 너른 들판을 쓸어내리며 정적을 메웠다. 당황한 재효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안 돼! 신령과 언약을 맺지 않으면, 술법을 사용할 수 없잖아?!”

경악성이 널리 메아리쳐 울렸다.

“종주께선 선배님이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겠다 하셨지.”

붉게 노을 지는 하늘을 등에 업은 소영이 낯을 굳혔다.

“내 짧은 지식으로는 통 모르겠다. 신령과 언약을 맺지 않고도 술법을 쓰는 존재가 무엇일는지. 하나 분명한 사실은···.”

“대선배가 보통 사람은 아니란 거네.”

재효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손에 구겨진 소환부가 바람결에 팔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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