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48)화 (48/138)

48화

아무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릿수와 무기, 상대 전력과 지형지물을 빠르게 파악한 후 다시 술사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내가··· 혼내 줄까?”

미간을 좁히고 제법 심각하게 물었으나 유랑술사는 파핫,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괜찮아요. 비록 이 사람들이 저를 속이고 이용하고 가두고 산제물로 쓰려 했지만. 어쨌든 실패한 모양이니까요?”

······? 전혀 안 괜찮은데···?

아무개는 바닥으로 뛰어내린 후 제단에 박힌 봉을 뽑아 들었다. 술사는 사양했지만, 놈들을 혼쭐내 주겠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아무개 님, 잠시···.”

사나운 기세로 앞장서는 흉신을 향해 술사가 손을 뻗은 찰나.

우드득.

나무 수갑이 부서졌다.

“······!”

“아, 이런.”

술사가 엄지와 검지 새로 뒤틀린 자물쇠를 집어 들었다. 실수로 남의 물건을 망가트린, 딱 그 정도의 반응이었다.

“이걸 어쩌죠? 중요한 법기일 텐데. 못 쓰게 됐네요.”

감흥 없는 언행이 묘하게 건성이었다. 하나 누구도 무성의한 태도를 지적하지 못했다. 운해 하씨의 술사라면 모두 저 자물쇠의 끔찍함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으므로.

유랑술사 일행은 몰랐으나, 그들은 초도의 자물쇠에 당한 것치고는 비교적 괜찮은 대우를 받은 축이었다. 공간을 닫고 안팎을 유리하는 권한. 이 범위를 미세하게 조절하면 오감마저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니.

운해에선 죄질에 따라 자물쇠로 감각을 제한했다. 느닷없이 시청각을 빼앗긴 사람은 적응 이전에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만다. 추가로 촉각까지 제한하면, 보고 듣고 느낄 수도 없는 무감(無感)한 고독의 감옥에 갇히는 형국이다. 오죽하면 초도의 감옥보다는 사형이 낫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돌까.

그런 초도의 권능을 무의식중에, 뜻하지 않은 과실로 망가트리다니. 자물쇠의 위력을 아는 만큼 그에 비례한 공포가 사위를 잠식했다. 단지 그 장면을 목도한 것만으로 하씨 술사들은 전의가 대폭 꺾여 버렸다. 종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신, 대관절 정체가···!”

“그게 중요한가요?”

유랑술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너울이 스륵 흘러내리며 그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저는 평범한 술사예요. 우연히 근방을 지나가는 길이었죠.”

“아니. 오늘에서야 확신했습니다. 귀인께서 결코 사람일 리 없다는 것을요.”

아무개는 봉을 바로 쥐었다. 하 종주의 잘못된 생각을 손수 고쳐 줄 심산이었다. 열 손가락이 사라지고 나면 그의 비뚤어진 편견도 바로잡히겠지.

술사가 아무개를 넘어 손 내밀었다. 종주가 흠칫 물러났으나, 그 손은 종주의 목이 아닌 어깨 위 나무 새를 붙잡았다.

“아까부터 종소리가 시끄럽네요. 슬슬 그만하죠.”

나무 새에게 말을 건넨 술사가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콰직, 새가 산산조각 났다.

“뭐야, 이게.”

재효는 허탈해졌다.

“이리 쉽게 해결할 수 있다니. 우리는 지금껏 무얼 위해 난리 친 거야?”

흉신을 풀어 준 후 벌어진 참상 탓일까. 재효는 허무하다 못해 죄책감마저 들었다.

하씨가 잘했다는 건 결단코 아니다. 놈들이 먼저 고약한 수작을 부렸으니 된통 당하는 것쯤은 감수하라지.

하나 아무리 마음의 무게가 기울어진 채라 한들 사지 멀쩡한 유랑술사와 내장을 쏟아내며 허덕이던 놈들을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흉신을 꺼내 주지 않았을 텐데.

“제가 너무 늦게 알아차렸죠. 처음부터 신호를 주셨는데도.”

술사가 손을 펴자 부서진 나뭇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는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듯 살벌한 아무개의 뒤에 서서 종주를 마주했다.

“말은 전해야 하는데 새들이 종일 감시하고. 돌려 말하니 답답한 작자가 통 못 알아먹고. 종주께서도 참 난감하셨겠어요.”

그가 탄식처럼 읊조리자 하 종주가 동조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무기를 빼돌리긴커녕 잡아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하마터면 또 무익한 살생을 저지를 뻔하였지요.”

“하하. 살짝 변명하자면, 종주께서 너무하셨어요. 이무기를 살려 달란 청을 그리하시니 누군들 알아차렸을까요.”

어?

뭔가 이상했다. 나무 새를 박살 내고부터 예리하게 벼려졌던 분위기가 눈에 띄게 풀렸다.

하 종주가 유랑술사를 이용해 이무기를 잡고는, 막상 이무기의 실체가 밝혀지자 그를 대신 산제물로 쓰려 했잖은가. 한데 지금 그들의 대화는 마치··· 종주가 처음부터 이무기를 살리려 했다는 듯이 들렸다.

“허허. 제가 너무 에둘러 말씀드렸지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들키지 않으려거든 저희만 아는 이야길 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아마 오늘이 귀인을 뵙는 마지막 날이겠지요. 염치 불고하나······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이무기가 구렁이만 한 뱀임을 모를 적에. 종주는 늙은이의 남은 생을 운운하며 재차 요청했더랬다. 당시 재효가 과하다 여긴 그 청은, 사실 유랑술사와 종주가 과거에 나눈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한 것이었다. 친구인 뱀을 걱정한 소년이 청현수의 위치를 물으며 귀인에게 올린 청원.

종주는 뱀을, 이무기를 살려 달라 넌지시 요청한 것이다. 어릴 적 제 친구를 도와줬을 때처럼.

“수십 년 전의 일을 소상히 기억하기는 어려워서요. 덕분에 썩 궁금하지 않은 고해를 들어 가며 옛일을 복기했네요.”

종주는 그 얘길 꺼내면 술사가 과거를 떠올려내리라 짐작했다. 하나 둘은 입장이 달랐다. 종주에게 그날은 대화 한 마디, 푸른 하늘과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섞인 내음까지 잊지 못할 추억으로 아로새겨졌으나, 유랑술사에게는 도움을 청해 온 무수한 이들 중 하나였으므로.

“무어, 제가 서두르다 이리되었죠.”

여느 때의 유랑술사라면, 종주의 어설픈 거짓과 은근한 함의를 담은 언사에 주의를 기울였을 터였다. 하나 이번엔 달랐다. 사정이 급박하여 사소한 거슬림 따윌 무시한 탓이다.

“새로운 감시자가 오셨네요.”

부서진 새를 대신하듯 또 다른 나무 새가 무너진 지붕에 내려앉았다. 동그랗게 뚫린 구멍에서 안쪽을 내려다보는 새의 그림자가 하나둘 늘어났다.

“어쩔까요. 더 싸우실래요?”

술사가 대수롭잖게 물어볼 즈음, 방위대장이 종주에게 다가왔다. 수하에게 받은 보고를 귀엣말로 전하자 종주의 동공이 잘게 요동쳤다. 흔들리는 그의 시선이 아무개에게로 향했다.

“······아닙니다. 동행 분께서 한바탕해 주신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고자 예서 중단했다는 명분이 통하고도 남게 되었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날게요.”

유랑술사가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나아가는 길을 따라 방위대원들이 슬금슬금 물러섰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통로를 걸어가던 그가 고개를 뒤로했다.

“아무개 님?”

하 종주의 그릇된 심상을 바로잡아 주려던 아무개가 움찔했다.

“용무가 남았나요?”

“······아니.”

누가 봐도 용건이 남은 얼굴이었으나 입술은 부정했다. 휙- 봉을 반 바퀴 돌려 등 뒤로 세워 잡은 아무개가 술사를 따라나섰다. 탁탁 바닥을 내딛는 소리가 묘하게 경쾌했다. 입구를 향해 가며 술사가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운해 하씨가 고작 비서 한 권에 이리 큰일을 벌이다니 놀랍네요. 신뢰할 만한 출처였나 보죠?”

“물론입니다.”

이제 와 무얼 숨기겠냐는 듯 종주가 한숨 섞인 말을 토해 냈다.

“영화단주의 서고에서 빼돌린 것이니까요.”

사대귀인, 영화단주.

“필적이 영화단주와 동일합니다. 단주께서 직접 작성하신 비급서란 뜻이지요.”

“영화단주라···.”

대지의 군주를 보필하는 자. 오대세가와 무력 수위를 나란히 하는 영화단의 주인.

다환인이라면 모두에게 익숙한 직함을 입에 담으며. 술사가 의례당을 벗어났다.

입구에서 재회한 두 후배는 미묘한 낯으로 선배와 흉신을 맞이했다. 후배들 뒤로 쓰러져 널브러진 방위대의 몰골을 본 술사가 작위적인 탄성을 내뱉었다.

“와, 난리네요. 아무개 님이 손쓰신 건가요?”

진정 놀랐다기보다는, 이러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엔 의례 이리해야 한다는 듯 성의 없는 감탄이었다. 한데도 아무개는 불에 덴 양 화들짝 놀랐다.

“······그게··· 술사님이 위험하대서, 서두르느라··· 조금.”

고개를 숙인 아무개가 더듬더듬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그 행태를 본 재효는 인지력에 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교각을 한 폭의 지옥도로 탈바꿈한 흉신과 방을 된통 어지르고 눈치 보는 소동물 같은 아무개. 이 사이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극이 자리했다.

“저를 구하러 와 주신 거예요? 생경하네요, 이런 거. 감동적이어요.”

쓰러져 나뒹구는 대원을 빙 돌아가며 술사가 덧붙였다.

“한데 다음부터는 좀 더 힘을 빼셔도 될 듯싶어요. 저도 나름 강한 편이니까요. 물론 아무개 님에 비하면 연약하지만요.”

···? 연약해? 누가?

재효는 대선배를 향한 존경심도 잊고 반박할 뻔하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