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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47)화 (47/138)

47화

호명성 인근에서 다수의 술사가 공세를 퍼부을 적에 아무개는 그들을 압도했더랬다. 지나가던 평범한 행인조차 술사인 종가 한복판에서도 압도적인 위력을 보일 수 있을는지는 모르나, 단둘보다는 분명 나을 테지.

두 사람은 곧장 실행에 나섰다.

“아앗! 왜 때려?”

“발뺌하지 마. 네가 먼저 했잖아.”

둘씩 짝을 지어 경계하던 방위대원들이 소리 죽여 다퉜다. 대장이 함께 있는데도 장난질할 정신머리가 있다니. 불만스레 여긴 대원이 주의를 주려던 찰나, 뒤통수를 퍽 얻어맞았다. 씨근덕거리며 뒤돌아본 대원은 모른 척 시치미 떼는 동료의 가슴팍을 툭 밀쳤다.

“···?! 갑자기 뭐하냐?”

“너야말로. 지금 시답잖은 장난을 하고 싶으냐? 이게 재밌어?”

“무슨 헛소리야? 네가 먼저 쳐놓고 어디서 화풀이야!”

방위대장은 산발적으로 언성을 높이는 수하들을 서늘히 주시했다. 감히 종주님께서 지척에 계신데도 소란을 피우다니. 촛불 빛이 닿지 않는 가장자리의 어둠에 숨어 난장인 놈들을 어찌 손봐야 할까, 고민하던 순간.

퍽⎯ 쿠당탕!

시비가 붙어 밀려난 대원이 문에 부딪혔다. 대문이 열리고 바깥의 환한 빛이 들어와 넘어진 대원의 얼떨떨한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참다못한 대장이 수하들의 기강을 잡고자 결심할 무렵.

도깨비 감투에 몸을 숨긴 채 소란을 부추긴 두 사람은 문 틈새로 빠져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건물 사이사이로 강풍이 거세게 스치었다. 네모 각진 구석에 기대어 무릎을 세워 모은 채 웅크린 아무개는 두 팔에 묻은 고개를 슬쩍 들었다. 건물 전체를 훑는 대기의 불쾌한 동세. 부연 흙먼지를 동반한 매서운 회선풍. 보통 사람들은 무심코 넘겼겠으나 아무개는 아니었다.

창가에 걸린 주렴이 미동조차 않았으니.

한여름 된더위 속에서도 녹지 않는 눈사람만큼이나 기이한 일이었으나, 아무개는 연유를 알았다. 이곳은 초도의 자물쇠로 닫힌 공간. 바깥바람이 뚝 끊어지듯 드나들지 못하는 것은, 저 공기가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란 뜻이다. 누군가 개입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

술사 놈들 짓이다.

아무개는 느릿하게 일어나 주렴을 걷어 올렸으나 직후 눈살을 찌푸렸다.

거꾸로 매달린 염재효와 눈이 마주친 탓에.

도로 내릴까. 손에 쥔 주렴의 구슬을 알알이 매만지며 고민하니 염재효가 허공을 두드렸다. 초도가 단절시킨 공간에 충격이 가해지자 경계면에 엷은 파문이 일었다. 혹여 들킬세라, 재효는 소리 내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안타깝게도 아무개는 독순술에 능하지 못할뿐더러 거꾸로 뒤집히기까지 하니 영 알아먹기 힘들었다.

아무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답답한 듯 가슴을 치던 염재효가 위로 쑥 들려 올라갔다. 아마 석소영이 지붕에서 녀석을 잡아 주었을 테지.

소통 방식을 바꾼 걸까. 이번에는 창가에 푸른 귀화가 타올랐다. 쉼 없이 일렁이는 불꽃으로 특정 모양을 만들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 아무개는 녀석들이 대관절 무슨 말을 하고픈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주렴을 쥐고 골똘히 지켜본 끝에 겨우 해석해 냈다.

ㅅ危

시옷과 위태할 위. 시옷이 위태로워?

“······삿갓?”

시옷이 아니라, 삿갓인가?

아무개는 주렴을 놓고 돌아섰다. 차르륵, 주렴 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 감옥 끝에 다다른 아무개는 소환부를 감은 손으로 철창을 잡아당겼다. 끼이익⎯ 쇠로 엮은 창살이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휑하니 늘어난 쇠창살 사이로 나가려 하니 보이지 않는 벽이 재차 가로막았다. 소환부를 감싼 오른손은 무형의 벽을 뚫고 나갔지만, 거기까지. 부적이 없는 손목부터 도로 막혔다.

개의치 않았다. 물 샐 틈 없이 완고한 벽과 쥐구멍이라도 뚫린 벽은 공략 난도가 다르니.

아무개는 오른손으로 닫힌 공간의 사이 면을 어루만졌다. 안팎을 단절시키는 미세한 경계. 그 부분을 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감각과 동시에 강풍이 창을 타 넘어 실내로 몰아쳤다. 주렴이 요란하게 나부끼고 아무개의 머리칼과 옷자락도 한껏 휘날렸다. 콰직, 초도의 자물쇠에 금이 갔다.

옥에서 나오자 복도 끝에서 감시하던 보초가 기함했다. 좌우 양쪽에 하나씩. 목청 높여 동료를 부르는 그들 중 오른쪽을 택했다. 한 차례 발돋움만으로 보초 앞에 다다른 아무개는 관자놀이에 주먹을 박아넣어 손쉽게 제압한 후 놈의 창을 강탈했다.

좌에서 우로, 또다시 좌측으로. 길이 꺾일 때마다 막아서는 자들이 튀어나왔다. 창대로 머리를 후려치고, 휘두르는 팔목을 잡아당겨 무릎으로 안면을 가격하고, 넷이서 한꺼번에 덤빌 적엔 불 꺼진 화로를 발로 넘어뜨려 흩어지게 유도한 후 각자 처리했다.

어느 누구도 발목을 잡지 못했다. 걸음을 늦추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흉신이 지나간 자리마다 쓰러져 널브러진 인영이 흔적처럼 남았다.

댕⎯ 댕⎯ 댕⎯

위험을 알리는 종이 연신 울렸다. 초도와 마찬가지로 용의 자식인 포뢰(葡牢)의 상을 본뜬 종은 맑은소리를 멀리멀리 울려 퍼지게 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아무개는 고개를 젖혀 지붕 위를 올려보았다.

“···어디야?”

대답이 돌아오기 전. 한 번 더 물었다.

“술사님. 어디 있어?”

평소 아무개의 어눌하고 느릿한 어조에 익숙한 소영은 그 재촉에 조금 놀랐다. 무심한 듯한 겉보기와 달리 얼마나 서두르는지 알 수 있어서.

“의례당입니다. 교각을 넘어 외곽으로 빠져야 합니다!”

낡은 이 층짜리 원형 건물이라고 덧붙였으나, 그 전에 아무개가 움직였다. 제대로 들었을까. 고민할 시간에 서두르자 판단한 소영은 재효를 엎고 벽을 타 내렸다.

돌풍이 그쳤다. 아무개의 위치를 알아내고자 불러낸 것이니 더는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재효는 흉신 또한 초도의 자물쇠로 감금되어 있으리라 예상하고 바람을 널리 퍼트렸다. 공기 중에 실어 보낸 영력이 단절되는 자리를 감지하고 접근해 보니 역시나. 그곳에 아무개가 있었다.

종소리를 들은 방위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소영은 그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아무개는 이미 교각을 지나 건너편으로 멀어졌다. 도깨비 감투를 썼으니 들키지 않으려거든 기척을 숨겨야 하건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써서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하나 언제부턴가 소영도 방위대도 차츰 걸음이 느려졌다. 교각 입구에 다다를 즘엔 멈춰 버리기까지 했다.

쓰러져 신음하는 자들로 발 디딜 곳이 없었으므로.

“이, 게··· 대체···!”

선두에 선 대원들이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 연신 구역질하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난간에 처박혀 머리부터 피투성이가 된 자. 복부 자상에서 꾸역꾸역 쏟아져나오려는 창자를 힘껏 누르는 자. 다리와 팔 관절이 반대로 꺾여 덜렁거리는 자. 창에 나란히 뚫려 기둥에 박힌 세 사람이 꼬챙이에 꿰인 물고기처럼 바르작거리는 것까지.

근접전에 탁월한 소영은 대강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예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알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진득한 피 웅덩이를 내디딜 적마다 상황이 그려졌다.

열을 지어 모여든 방위대원. 통행로인 교각을 거점 삼아 방어진을 구축했지만, 손쉽게 뚫려 버린다.

창대로 밀어 바다에 빠트리고, 여럿을 나란히 꿰뚫어 던져 버린다. 대원들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빼곡히 들이찬 인원 탓에 신속히 피할 수 없었을 터지. 쓰러트린 자로부터 강탈한 검으로 전열의 배를 가른다. 뒤쪽에서 철퇴가 날아들자 다리 난간을 밟고 선다. 가까이 선 이의 머리를 공 차듯 날려 버리자 철퇴를 대신 맞아⎯···

소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검붉은 피로 가득 찼다.

“서두르자.”

재효가 위로하듯 다독였다.

“뒤돌아보지 마. 괜히 흉신을 불러냈다 후회하지도 마.”

대선배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봤잖아.

“후회하기엔 일러. ······아직은.”

쓰러진 사람들을 피해 다리를 건넜다. 격렬한 전투의 현상은 운해 하씨 술사들이 불러낸 물기로 축축했다.

반대편 뭍에 다다를 즈음 소영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맨손으로 벽을 오르내릴 때도 거뜬했건만. 고통 어린 신음성이 귓가에 진득이 남았다.

재효는 도깨비 감투를 회수했다. 피가 묻은 바람에 더는 쓸 수 없었다.

둘은 서둘러 의례당을 향했다. 난세가 재림한 듯한 교각의 전경을 봐서일까. 불안감이 잠식했다.

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례당을 지키던 조는 방위대장이 각별히 신경 쓴 구성 덕에 흉신을 꽤 버텨 낸 모양이었다. 교각에서 그랬듯 학살··· 에 가까운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는 의례당 앞에서. 이미 쓰러트린 대원들을 발치에 둔 아무개가 이 층 건물을 훑어보았다. 한 손에 봉을 쥐고 휘휘 돌리던 아무개가 덤벼드는 놈을 향해 마주 달렸다. 곧게 찔러오는 검신의 옆면을 봉으로 툭, 치자 칼끝이 갈피를 잃고 휘청였다. 크게 흔들리는 상대의 어깨를 밟아 디딘 아무개가 높이 치솟았다. 한 손으로 이 층 창틀을 붙잡고 반동을 주어 회전하듯 뛰어오르자 그의 신형이 지붕 위로 올라섰다.

아무개는 봉 끝으로 지붕을 후려쳤다. 아무리 낡았다 하나 비바람을 거뜬히 막아 주던 지붕이 와르르 무너졌다. 뼈대만 남은 들보에 중심을 잡고 선 흉신이 의례당을 들여다보았다.

전방에 놓인 제단과 그 위에 걸터앉은 유랑술사. 손목에 채워진 나무 수갑과 초도의 자물쇠. 맞은편에서 술사를 향해 손을 뻗는 하 종주.

아무개는 손에 쥔 봉을 내던졌다. 쉐애애액⎯! 거친 파공음을 일으킨 봉이 제단 위에 퍼억! 꽂혔다. 하 종주와 유랑술사 사이를 정확히 가르고 지나간 봉은 제단에 깊이 꽂히고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여력에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 강렬한 기세에 삿갓 너울의 한껏 부풀며 뒤집혔다.

들보에서 뛰어내린 아무개는 제단에 꽂은 봉 위로 정확히 착지했다. 천장을 지탱하는 굵직한 들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봉에 사뿐 내려앉은 흉신이 냉담한 눈으로 종주를 내리깔아 보았다.

“손 치워.”

경종이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하 종주는 예상 밖의 상황에 굳어 버렸다. 난폭한 흉신은 잠시간의 머뭇거림조차 봐주지 않았다. 아무개는 학처럼 한 다리로 곧게 선 채 남은 발로 종주의 손을 걷어찼다.

“아무개 님?”

유랑술사의 부름에 아무개는 즉각 몸을 돌렸다. 그를 향한 아무개의 표정은 노인공경의 미덕 따윈 말아먹은 좀 전과 판이했다.

“술사님··· 괜찮아?”

봉 위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술사와 시선을 맞춘 아무개가 그의 손목에 채워진 추를 보고 눈썹을 축 떨어트렸다.

그때. 의례당의 문이 터져 나가며 소영과 재효가 들어섰다. 방위대가 아무개를 경계하는 사이 비어 버린 문을 뚫은 것이다.

유랑술사는 제 앞에서 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진 아무개와 그에게 차인 손을 부여잡은 종주. 그들을 향해 원을 그리며 접근하는 방위대와 멀찍이서 문을 열고 등장한 후배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그가 살며시 아무개 곁으로 붙어섰다.

“아무개 님.”

수갑 찬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아 올린 그가 가련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 사람들이 저를 괴롭혔어요.”

······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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