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청현수는 정기가 충만하여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그곳에 친구를 무사히 보내 주었으나 아이는 여전히 근심 걱정했다. 낯선 곳에서 친구가 잘 지낼는지. 청현수가 아무리 영험하다 하나 게 머무는 것만으로 회복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 아이는 청현수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였는데, 유랑술사 홀로 찾아내 축지술로 데려간 탓이다. 아이가 거듭 청을 올리자 고심하던 술사는 비밀을 약조한 후 길을 가르쳐 주었다.
“온 집안이 들썩이도록 울고불고 난장을 피우던 아이가 돌연 잠잠해졌지요. 늘상 끼고 살던 뱀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슬픈 내색 한 점 없고, 봉분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기이하게 여긴 어른들이 아이의 뒤를 밟았다. 그렇게 청현수가 발각되었다.
“초기에는 새로운 이무기와 언약을 맺고자 했을 뿐입니다.”
술사란 신령과 언약을 맺어 그들의 힘을 빌려오는 존재. 강한 권능을 얻기 위해선 한층 더 강력한 신령과 언약을 맺어야 함이라.
“술사라면 누군들 그 욕망을 이해 못 할까요. 하물며 당시 적극 나선 건 용의 힘을 물려받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문중에서 괄시당하던 이들 말입니다.”
누군가 말렸다. 청현수에 함부로 드나들지 말고 묻어 두자고. 가문의 조사께서도 단 한 번밖에 출입을 허락받지 못한 까닭이 있지 않겠느냐고. 지맥이 겹겹이 숨긴 영지를 빈번히 오가면 현기가 줄어들리라고.
안타깝게도 이러한 염려는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짓밟으려는 행태로 치부되었다. 당신네는 이미 용의 축복을 받았으니 새로이 신령과 연을 맺을 필요가 없지. 그러니 잘난 척 쉬이 혓바닥을 놀릴 수 있잖나. 제 일이 아니니까.
이북의 주인, 혹한의 대제가 진노하고부터 용의 영력이 나날이 쇠하였다. 해가 갈수록 용의 은총을 입지 못한 아해가 늘더니 한 뿌리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뚜렷한 계층이 생겨 버렸다. 용의 힘을 얻은 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로.
“명문 술사 가문에서 태어나 모두 같은 길을 걸어갈 적에. 시작할 자격부터 박탈당한 분노는 몇 마디 말로 설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요.”
함께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해도 모자랄 판에 갈등과 내분이 첨예해졌다.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 종주 직에 오른 그는 수십 년간 해결되지 못한 난제를 풀고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권의 비서를 손에 쥐게 된다. 왕 살해 의식이 수록된 비급서를.
“권능을 잠시 하사받는 게 아니라, 신령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니. 곧 죽을 날을 앞둔 늙은이들이 어찌나 애가 탔겠습니까. 답답한 육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거늘.”
그즈음부터 이무기 사냥이 시작되었다. 초창기엔 다 자란 성체를 노렸으나, 그들이 사라지고 차츰 더 작은 개체로 넘어갔다. 분명 종회에서 비밀리에 논의가 이루어졌거늘 어디서 말이 새어나간 겐지. 남몰래 청현수를 드나드는 치가 늘었다. 홀로 이무기를 처리할 능력이 못 되는 그네들은 단독으로 죽일 수 있는 작은 뱀을 표적 삼았다.
가끔 사람은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떠밀리고도 이를 제 의지라 착각할 때가 있다. 이 시기의 광기가 그러했다. 위에서 시작하고 아래서 동조했다. 원치 않던 자도 다들 그러니 혹 뒤처질까 조급증이 일어 참가했다. 부질없다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저는 해 보고서 남에겐 그러지 말라니. 언어도단이잖은가.
결국 청현수가 품은 생명은 금세 동이 났다. 풍문으로 돌던 왕 살해 의식에 성공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했지요. 늦게나마 비급서를 불태웠습니다만, 다른 분들은 여직 정신을 못 차린 듯합니다.”
청현수가 비어 버리고 알껍데기조차 보기 힘들어진 시기. 당장 승천해도 이상치 않을 이무기가 느닷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기어이 업보가 돌아왔구나. 탄식하며 대책을 논하고자 종회를 열었으나, 그가 목격한 것은 주름진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웃는 면면이렷다.
“그간의 패착은 미력한 것들은 잡은 탓이다. 이리 거대한 이무기라면 필시 의식에 성공하리라. 그리 여기더군요.”
참으로 가당찮은 일이라고, 하 종주가 탄식했다.
“마냥 죽여 힘을 계승할 수 있다면, 그간 토벌해 온 악령들 권능은 죄 어데로 갔단 말입니까? 우리가 제거한 사령들은 또 어떻고요?”
종주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겨우 진정된 광기가 이무기를 보고 재발하였습니다. 그 실체는 작은 새끼 뱀임을 밝혀내었으니 드디어 끝이로다 여기었거늘······ 이제는 귀인의 차례가 되었군요.”
활활 타오른 광기는 쉬이 꺼지지 않았다. 잿더미 아래 숨은 잔불은 언제든 새로운 땔감으로 옮겨갈 따름이니.
“본디 사람은 환갑도 맞기 힘들지요.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자질의 술사도 길어야 백 년입니다. 하나 수백 년간 죽지 않고 세간에 오르내린 함자가 몇 있지요.”
숨죽이고 훔쳐 듣던 소영과 재효는 종주가 지칭하는 함자를 즉각 알아차렸다. 사대귀인.
“영화단주께선 대지의 군주 다화련의 종복이시니 그분의 은총을 받았으리라 짐작되지요. 만물점주는 저승사자와 직접 조우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오리까.”
하 종주는 유랑술사를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듯 천천히 맴돌았다.
“수호지신이야 이백 년 전에 명맥이 끊겼으니 열외로 두고. 그럼 한 명이 남지 않습니까.”
우뚝. 술사 앞에 다시 멈춘 그가 무릎을 굽혀 마주 보았다.
“당신.”
“······.”
“오직 당신만 내력이 불분명합니다.”
종주가 지팡이 허리께를 잡고 굽어진 손잡이로 한 겹 너울을 걷어 냈다. 주홍빛 촛불에 유랑술사의 얼굴 반절 드러났다.
“술사로서 마땅히 주의할 점이 외양에 현혹되는 것이지요. 인간 형상을 가장한 괴력난신이 차고 넘치는 시대가 아닙니까.”
“제가 그런 괴력난신이라는 건가요?”
소년과 청년에서 노인과 청년으로 재회한 시선이 맞물렸다.
“예까지 모셔 놓고 가타부타할 필요는 없겠지요. 해서 직접 확인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너울을 놓아준 종주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쿠웅, 지팡이가 닿은 끝점에서 은은한 빛이 번져 나가며 진법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부디··· 제 친구를 살려 주십시오.”
웅웅- 영력을 머금은 진법이 낮게 울었다. 그 소리에 가려질 만큼 작은 음성으로, 재효가 소영에게 속삭였다.
“이제 와서 갑자기 친구를 살려 달라니. 종주님이 웬 뚱딴지같은 소릴 하신 대냐? 아니 그보다 대선배는 왜 지금껏 반항을 안 하고 가만있는 거야?”
도깨비 감투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도록 바짝 붙어 있던 재효는 맞닿은 소영의 어깨가 단단히 경직된 것을 느꼈다. 꼭 긴장이라도 한 듯이.
“소영아? 왜 그래?”
“······혹시 들어 본 적 있나?”
더듬더듬. 소영이 답지 않게 말을 끌었다.
“유랑술사가 누군갈 해쳤다는 이야기.”
“아니? 당연하잖아. 금비환네랑 다 같이 덤볐어도 인상 한 번 쓴 적 없는 분인데.”
심지어 유랑술사는 그들이 다치지 않도록 손을 써 주기도 했었다.
“우리가 작정하고 살수를 펼쳐도 선배님께선 한사코 피하셨다. 유랑술사가 타인을 해쳤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
“나도야. 배신하고 통수 친 놈도 봐줬다는 얘기는 들어 봤지만, 누굴 다치게 한 적은 없지?”
그래서 대선배께 이리 무례하게 구는 걸까. 같은 사대귀인인 영화단주에게는 꼼짝도 못 하고 설설 기었을 놈들이. 하여간 사람들은 어째 선의로 잘해 주면 감사하긴커녕 쉽게 여기고 막 대한다니까는.
투덜거리는 재효에게 소영이 의견을 털어놓았다.
“나는 선배님께서 고매한 성품을 가지셨기에. 어린 후배들이 무얼 하든 너그러이 봐주신다 여겼다. 한데 상황이 이리 되고 보니··· 혹 선배님께 모종의 제약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을 공격하고, 거짓을 일삼고, 이용하려 들고, 수갑을 채워 감금하더니 이젠 사람조차 아니라 한다. 자신을 제물로 쓰겠다는 상대에게 화를 내야 마땅할 진대도 그는 웃음으로 넘기었다. 이쯤 되면 단순히 성격의 문제라 치부할 단계를 넘어섰다.
마치 분노가 거세된 듯하지 않은가.
“타인에게 상해를 입혀선 안 된다. 그런 종류의 제약 말이야? 무어, 먼 옛날에는 신령과 교감을 높이고자 살생을 엄금하는 수련법도 있었다 하니 아주 허튼 생각은 아닌···.”
종알거리던 재효는 불현듯 깨달았다.
“잠깐. 그게 정말이면, 이러다 대선배 큰일 나는 거 아니야?!”
밖으로는 방위대가 진을 치고 안으로는 세가의 종주가 버티고 있다. 어린 술사 둘은 발각되는 즉시 옴짝달싹 못 하고 제압될 게 뻔한 전력 차. 이를 좁히려면 어찌해야 할까.
“······흉신.”
막막하던 소영의 뇌리에 음울한 인상이 짧게 스치었다.
“흉신을 데려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