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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45)화 (45/138)

45화

뭐라고?

재효가 기함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랑술사의 행적이 어디까지 닿은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네요.”

너울 내린 삿갓이 방위대장을 향했다.

“제가 종주님께 청현수를 찾아드리긴 했으나, 비밀에 부치겠다 약조 받았답니다. 한데 부외자가 어찌 아시는 걸까요.”

사르륵 너울이 흘러내렸다. 비스듬히 갈라진 면사로 술사의 한쪽 눈이 드러났다.

“역시 이무기가 사라진 건 당신네 짓인가요?”

유랑술사와 어린 종주가 만났을 당시. 청현수는 전설로나 여겨지던 밀지였다. 이를 찾아낸 술사는 종주에게 비밀을 약조 받았다.

하나 어린 소년이 백발노인이 된 작금. 용의 고향에는 이무기는커녕 실뱀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이립이 채 못 된 방위대장마저 청현수를 익히 알고 있다. 이 간극이 뜻하는 바를 모를 자는 예 없었다.

“하 종주님이 약조를 어겼구나! 다른 사람들한테 청현수를 알려 준 거야!”

확신에 찬 재효가 벌떡 일어났다.

“인간이 드나들고 상서로움이 퇴색된 영지(靈地)가 어디 한둘이야? 댁들이 쓸데없이 오락가락하니 청현수가 영험을 잃었겠지!”

“······쓸데없는 소릴 해 버렸군요.”

대장이 수신호 하자 방위대원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나무 수갑을 찬 술사의 양팔을 잡고 일으켰다. 호송하듯 끌고 가는 모양새에 재효가 바락 했다.

“대선배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재효가 나섰으나 문밖에서 감시하던 자들이 막아섰다. 재효는 방해꾼들 어깨너머로 사라지는 유랑술사를 보고는 분에 차 씩씩댔다.

재효의 등을 도닥이며 소영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도로 갇혀 버렸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대선배는 왜 가만히 당해 주는 거래?!”

큼직한 손으로 재효의 입을 덮은 소영이 문가를 눈짓했다. 동시에 재효에게만 들리도록 은밀히 속닥였다.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공간을 닫는 초도의 자물쇠.

방위대는 유랑술사의 손과 문고리에 이중으로 초도의 권능을 사용했다. 하나 지금은 평범한 자물쇠조차 채우지 않았다. 유랑술사를 과하게 의식했거나, 소영과 재효를 신경 쓸 필요 없다 여긴 것이다.

어떤 이유건 간에 둘에게는 기회였다.

“물론 얌전히 기다려도 된다. 같은 오대세가의 일원인 우릴 건드리긴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선배님께서 우리가 걱정할 위치는 아니기도 하고.”

“갑자기 왜 떠보고 그래? 언제부터 그런 이유로 몸 사렸다고.”

재효가 눈썹 산을 추켜올리자 창밖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초도의 자물쇠로 닫아걸었을 적엔 불가했던 일이다.

“이 자식들 구린 구석이 많은 것 같은데. 탈탈 털어 주자고.”

갇히기 전, 몸수색 과정에서 법기와 무구를 압수당했다. 하지만 딱 하나 그들이 가져가지 않은 게 있다. 가져갈 수 없었다는 쪽이 정확하리라. 보이질 않았으니.

재효는 알맹이를 빼앗기고 텅 빈 화살집 밑바닥을 살살 돌렸다. 바닥면이 열리더니 스르륵, 무언가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겉보기론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재효는 확신을 갖고 허공을 잡아 올렸다. 두루마기처럼 몸에 걸치자 작달막한 신형이 사라졌다.

가온 염씨의 역사적인 법기. 도깨비 감투다.

십여 년 넘게 호흡을 맞춰 온 동료는 서로 의중을 알아차렸다. 재효가 소영의 등에 매달린 채 도깨비 감투를 두르자 둘이 함께 사라졌다. 소영은 그대로 창틀을 넘었다.

오로지 완력만으로 소영은 건물 외벽을 암벽 등반하듯 오르내렸다. 등 뒤에 사람 하나가 매달려도 거뜬했다.

쏴아··· 발아래 새파란 바다가 거품을 일으키며 어른댔다. 자칫 삐끗했다간 깊은 바다에 풍덩 빠질 위험천만한 곡예 끝에 처마를 잡고 훌쩍 뛰어올랐다. 소리 나지 않도록 살며시 기와를 밟아 용마루를 넘자 반대편 육로가 보였다. 거대한 수레가 떠나가는데 하얀 천을 덮어 두어 안이 뵈질 않았다.

“소영아, 저 수레.”

재효가 속삭였다. 수레 안쪽은 보이지 않되 마부 곁에 앉은 자는 안면이 있었다. 방위대장.

십중팔구 저기에 유랑술사가 있을 터. 목표를 확인한 소영은 다시 벽을 타고 내려왔다. 지면에 발 디딘 그들 좌우로 전각을 지키는 보초가 서 있었다. 재효가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봐도 보초는 아무것도 못 본 양 가만있었다.

수레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교각 너머 뭍으로, 게서 또 인적 드문 외지로 향했다. 들키지 않게끔 거리를 유지하며 뒤쫓자 외딴 의례당에 다다랐다. 처마에 거미가 진을 치고 지붕 덮은 기왓장에 비실비실 금이 갔다. 낡고 오래된 데 수리도 않고 허름하게 방치해 둔 모양이다.

의례당 앞에 수레가 멈추고 하얀 천이 벗겨졌다. 나무 기둥으로 세운 창살이 빼곡히 들이찬 함거에 유랑술사가 기대어 앉아 있었다.

“미친···.”

재효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을 도로 삼키었다. 보아하니 방문 고리에 쓴 자물쇠를 빼내 함거에 채운 듯싶었다. 하기야 초도의 자물쇠 같은 강력한 법기를 허투루 남발할 수는 없겠지. 수량도 많지 않을 테고. 필요할 적마다 돌려가며 썼으리라.

함거에서 나온 유랑술사가 의례당으로 향했다. 순순한 태도로 유유히 걸어가니 혹 산보라도 온 건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째 감시자보다 피감시자가 여유작작한 겐지. 굳은 낯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방위대원들과는 영 딴판이었다.

소영과 재효는 당혹스러우면서도 발맞춰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도깨비 감투 덕에 외부자 한둘이 끼어들어도 알아채는 이가 없었다.

의례당은 원형으로 지은 이 층 구조로 일 층 천장을 둥글게 틔워 놓은즉. 이 층 난간에서도 아래를 훤히 볼 수 있었다. 문지방을 넘어 실내로 들어서자 어둠이 사위를 집어삼켰다. 정면에 놓인 의례용 제단 주위로 촛불이 은은히 타올랐다.

바닥에는 거대한 진법이 그려져 있었다. 방위대원들은 의금부 나장이라도 된 양 유랑술사를 인도하여 진법 중심에 앉혔다.

“이건 언제까지 쓰시렵니까?”

개중 한 명이 못마땅한 듯 삿갓을 툭 건드렸다. 다른 대원이 질겁하였다.

“이봐, 그만둬!”

“어째서? 실은 네들도 궁금하잖나. 삿갓에 꿀 발라놓은 것도 아닐진대 어이하여 이리 집착하시는지. 혹 소문이 사실일는지.”

“소문? 설마 삿갓이 본체고 육신은 조종당한다는 그거 말인가?”

무겁고 진중한 대기를 찢고 돌연한 웃음이 터지었다. 말리려던 대원조차 더는 관여치 않고 피식대며 제 위치로 돌아갔다. 여전히 남은 건 삿갓을 건드린 방자한 놈뿐이었다.

“삿갓으로 모자라 너울까지 쓰시고. 얼마나 귀한 존안이시기에 그리 꽁꽁 숨기신답니까?”

죽립의 널찍한 챙을 쥐고 벗길 듯 말 듯 손장난에 소영과 재효는 혼비백산했다. 특히 재효는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튀어 나가 저놈의 손모가지를 꽃대마냥 똑 꺾어 버리고팠다.

무어, 삿갓이 본체? 육신은 조종당해? 귀한 존안을 숨겨?

다 틀렸다, 이놈아. 그 삿갓은 기폭제다. 허파에 바람 든 양 허구한 날 실실대던 이가 눈 돌아가게 만드는 기폭약. 너네 종갓집 삼백만 평이 눈 깜짝할 새에 초토화되고서야 정신 차리려고!?

“신입이냐.”

재효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기라도 한 듯 방위대장이 다가왔다.

“아니지. 내 신신당부하였거늘 경솔히 신입을 끼워 넣진 않았을 터. 하면 경륜이 쌓일 대로 쌓인 놈이란 말인데.”

삿갓을 만지작거리던 이가 바짝 굳어서는 허수아비처럼 뻣뻣해졌다. 그에게 다가간 방위대장이 어깨 위로 툭 손을 올리고서 뇌까렸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지금 네놈이 이따위 헛짓거릴 해도 될 때 같나?”

“죄, 죄송합니다.”

“네 자리로 꺼져라. 징계는 차후에 할 테니.”

고개를 떨군 대원이 서둘러 물러갔다. 수하의 추태를 목격한 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난데없이 사람을 감금하더니 죄인을 호송하는 함거에 실어 온 것부터 무례였으나, 그건 셈하지 않는 듯싶었다. 유랑술사는 구속된 손으로 비뚤어진 삿갓을 바로 했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네요. 절 데려온 사유도 긍정적인 건 아닐 테지요?”

“감히 제가 말씀드릴 사안이 아닙니다. 곧 종주님께서 당도하실 테니 모쪼록 원하는 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끼이익, 낡은 문짝이 비명을 지르더니 술사와 대장 사이로 한 줄기 빛이 경계선처럼 그어졌다. 차츰 면적을 넓힌 선이 곧 그들을 뒤덮었다.

하 종주가 들어섰다. 흔한 시종 하나 대동 않고 친히 걸어온 그 어깨에는 나무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예를 갖추는 방위대장에게 종주가 명했다.

“모두 걸음을 물리거라.”

“종주님. 안전을 생각하시어···.”

“어허, 내 언제 썩 꺼지라더냐? 좀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는 게 아니냐.”

방위대장은 수하들을 의례당 벽면 가까이 붙여 재배치했다. 그 자신도 물러서자 자연스레 빈자리를 종주가 대신하였다. 방위대원들이 멀어지자 종주가 작게 운을 뗐다.

“귀인께서 이리 누추한 곳에 앉아계신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곧 끝날 터인즉 과히 심려치 마십시오.”

유랑술사가 입꼬리를 휘었다.

“곧 끝난다, 라. 혹 죽으면 어차피 다 끝이라는 뜻이려나요?”

“허허, 어인 말씀이십니까. 절 어찌 보시고?”

“비밀로 약조한 청현수를 까발리고, 남을 이용하고자 마을 습격 따위의 시답잖은 거짓이나 늘어놓는 배은망덕한 협잡꾼?”

유랑술사가 하하 웃고 종주가 허허 웃었다. 둘 다 웃고 있는 데다 실내임에도 어째 오한이 드는 걸까. 소영과 재효는 부르르 떨었다.

“이제 와 모다 변명으로 들리시겠으나··· 청현수는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백발 성성한 노인이 옛일을 회상했다. 그가 유랑술사와 조우한 어린 시절.

“까닭 모를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는 친구를 위해. 청현수를 찾겠다 난리던 아해가 있었지요.”

알에서 갓 깨어나 두툼한 지렁이인 양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뱀이었다. 어렸던 그는 뱀을 살리고자 어른께 도움을 청했으나, 돌아온 답은 무정했다.

버려. 어차피 뱀은 사람보다 일찍 죽는단다. 언젠가는 겪을 일이니 미물에 깊이 정 주지 말거라.

서러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 앞에 삿갓을 쓴 술사가 나타났다. 그는 아이의 청을 들어 고작 반나절 만에 청현수를 찾아냈다. 종회의 어른들은 물론 지방 토박이에 온갖 산천을 드나든 약초꾼조차 모른다던 영지. 운해 하씨 조사께서 우연히 걸음 하시고 이후론 찾을 수 없었다 하여 전설로 여겨지던 그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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