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44)화 (44/138)

44화

“일리 있네요. 생포에 집착하지만 않았다면, 저희 손을 빌리지 않고 진작 이무기를 처리할 수 있었을 거예요.”

“왜 그렇게나 산 채로 잡길 원했을까? 요?”

아차 싶었던지 재효는 ‘물론 죽이는 게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되도록 살리는 편이 좋다고도 생각하지만!’ 하고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야 이무기를 죽이는 게 상식적이니까? 요?”

“······상식이라.”

유랑술사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추를 채운 손목을 걸쳤다.

“종주께서 말씀하셨죠. ‘의식이 끝날 때까지 안으로 뫼셔라.’고.”

재효는 기억을 되짚어 봤다. 그들을 가두기 직전, 하 종주가 그리 명했었다.

“산 제물. 이무기가 필요한 의식이 아닐까요?”

비록 실체는 작디작은 새끼 뱀이었지만. 겉보기로는 승천을 앞둔 이무기였으니.

“의식? 산 제물을 필요로 하는 의식이 있던가?”

“잘은 모른다. 그런 종류는 금기로 취급되곤 하니까.”

재효와 소영은 다시금 술사를 돌아보았다. 마침 훨씬 풍부한 지식을 갖춘 대선배가 지척에 있었으니.

“으음. 짐작되는 바가 있긴 하지만요.”

소영과 재효가 한층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술사는 대강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으나, 두 후배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서슬에 졌다는 듯 술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를 평생 묻고 살 수 있나요?”

“물론이죠!”

재효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당장 응했으나 소영은 신중했다. 평생이라니, 그만큼 무거운 주제라는 의미잖은가.

“······가문과 선조의 언약에 걸고 비밀에 부칠 것을 맹세합니다.”

“엉? 뭐, 뭐야. 왜 그리 심각해?”

뜻밖에 소영이 진지하여 당황한 재효도 곧 따라서 비밀엄수를 맹세했다. 입에 발린 평범한 약조가 아니다. 오대세가는 가문의 이름으로 신령과 언약을 맺은즉, 그들의 뿌리이자 근원인 신령과의 언약을 지금 맹세와 동등하게 여기겠다는 뜻이므로.

이를 아는 술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혹시 왕 살해 의식을 들어보셨나요?”

“왕이요!?”

기겁하는 재효에게 네에, 왕이요. 하고 술사가 답했다.

“왕을 죽임으로써 그 능력을 물려받는다는 미신이에요. 편의상 왕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왕에 비견될 만한 권능을 가진 위대한 존재를 뜻하죠. 일종의 상징적 표현이에요.”

“뭐야. 그런 게 실제로 가능해요?”

“저로선 벼락을 백만 번쯤 맞는 게 훨씬 쉽다고 생각하지만··· 아예 불가능하다고는 못 하겠네요. 특정 조건과 상황이 맞으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 봤어요.

“신령이란, 현상이 의지를 가지는 것이라고.”

「신령이란 무어일까.」

망각의 강을 거슬러온 과거가 현재에 덧씌워졌다.

「나는 현상이 의지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한단다. 꽃이 피고 지는 현상이 의지를 갖추고 자아를 형성하여 꽃의 신령이 되는 거지.」

「그럼 이 ‘현상’과 ‘자아’는 동일할까? 만일 ‘자아’가 사라진다면, ‘현상’은 어찌 될까?」

「남겨질까, 함께 소멸할까?」

불현듯 떠오른 나긋나긋한 음성을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술사가 후배들에게 답했다.

“왕 살해 의식이란, 신령의 자아를 소멸시키고 남겨진 현상의 의지를 갈취하는 행위예요.”

선뜻 받아들이기도 납득하기도 힘든 개념이라서. 재효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신령을 죽여서 힘을 물려받는다는 거죠?”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지금처럼 술사들이 평생 수련에 매진할 리 없습니다. 훨씬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까요.”

소영의 지적은 타당했다.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쉽고 편한 길을 선호하니까. 그 길이 누군가의 시신으로 쌓아 올렸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동족인 인간마저 갈아치울 부품으로 소모하는 형국에.

“일단, 무작정 죽인다 해서 힘을 계승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대대손손 저주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걸요.”

두 후배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그랬다. 왕 살해 의식이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만, 원한을 품은 신령에게 저주받거나 앙갚음 받은 이야기는 지방마다 종류별로 골고루 있더랬다.

“자길 죽인 존재에게 제힘을 넘겨준다니. 그리 너그러운 생명이 세상천지 몇이나 되겠어요.”

신령이 소멸하기 직전, 가해자에게 저지를 만한 일이 무얼까. 제힘이 타에 넘어가지 않도록 손 쓰는 것? 분노에 차 만물을 파괴하고 보복하는 것?

혹은, 현상 그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는 것?

“위험성이 너무 높죠.”

“하지만 위험하다고 가만둘 리 없습니다.”

술사의 설명에 소영이 재차 반박했다.

“인간은 탐욕적입니다.”

“맞아요.”

술사가 삿갓을 재차 고쳐 썼다.

“그래서 주제넘은 욕심을 부리다 처참하게 실패하죠.”

생각해 보세요.

“신령의 자아라는 그릇이 현상을 담고 있어요. 이때 자아가 사라지면? 현상이 쏟아져 버리겠죠.”

“현상이 쏟아지는 게 큰일인가? 요?”

번쩍 손을 들고 질문하는 재효에게 술사가 미소 지어 주었다.

“인간은 보통, 절대적으로, 신령보다 그릇이 작아요.”

작은 바람, 흙 한 줌조차 개인보다 깊은 세월을 간직했다. 결국 망망대해를 손바닥만 한 찻잔에 담아내려는 꼴이다.

“사방팔방 흩어지는 현상을 인간의 그릇에 담기는 어렵죠. 설령 일말이나마 성공한다 해도 태반은 넘쳐흐를 테고요.”

“어차피 왕 살해 의식 따위를 강행하는 자는 누군가를 죽여 이익을 도모하잖습니까. 그런 수준의 윤리의식을 지닌 자라면, 구 할 구 푼이 무의미하게 버려진다 해도 성공이라 여기지 않겠습니까? 제 그릇에 일말이라도 담아냈다면 말입니다.”

이번에는 소영이 의문을 표했다. 술사는 하룻강아지를 보듯 다정한 웃음을 띠며 부연했다.

“현상이라고 하니 썩 와 닿지 않는 모양인데. 실례를 들자면, 태풍 같은 거예요.”

바람의 신령을 죽여 그 힘을 얻고자 한다. 애초에 죽이는 게 가능하긴 할까 싶지만, 일단은 그리 가정하고 천신만고 끝에 천운이 도래했다 치자. 이제 풍력을 받아들일 차례다. 하지만······

“힘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자아의 통제를 잃은 현상, 태풍에 휘말려 스러지겠죠.”

재효는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쏟아지는 현상을 받아내는 작업은 분무기로 뿌린 물을 잔에 오롯이 담아내는 것과 같은 신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 불가능한데. 대선배는 어째서 종주님이 왕 살해 의식을 시도한다 짐작했어요? 이거 성공 사례가 있긴 해요?”

“······아주 없진 않아요.”

재효는 저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술사가 삿갓을 깊이 눌러썼다.

“제가 아는 성공 사례는, 신령이 강력한 의지로 한 개체에 직접 힘을 주입했어요.”

핵심은 신령의 의지와 받아들이는 자가 지닌 그릇.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것.

“신령의 의사만 확고하다면, 앞서 말씀드린 난제가 다수 해결되죠. 그쪽에서 연약한 인간을 배려해 주면 되니까요.”

쏟아지는 현상을 받아내는 일은 분무기로 뿌린 물을 잔에 오롯이 담아내는 것과 같은 신기였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일.

하지만 분무기가 아니라 주전자로 친절히 따라 준다면? 적절히 양을 조절하여 잔에 넘쳐흐르지 않게 해 준다면.

“그럼 신령이랑 친해지고 적당히 상황을 꾸며서 자발적으로 힘을 넘기게끔 유도하면······.”

중얼중얼하던 재효는 제가 꺼낸 말에 스스로 놀라 입을 텁 막았다. 술사가 하하 웃었다.

“이 의식의 핵심은 왕이에요. 감히 왕에 비견될 권능을 가진 이에게만 성립되지요. 애초에 그런 신령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으며, 그들과 만날 수나 있을까요.”

재효는 선선히 수긍했다. 가온 염씨의 시조께서는 자칭 도깨비 왕이라는 신령과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 후손인 재효는 본 적도 없더랬다. 기껏해야 대전에서 뛰노는 빗자루 도깨비 정도였으니.

“제가 배려라고 하긴 했지만···.”

잠시 멈춘 술사가 나직이 말했다.

“신령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달라요. 그들의 배려가 우리와 같은 방식이리라 여기지 말아요.”

자못 진중한 조언에 재효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왕 살해 의식인지 뭔지 한다 쳐도 우릴 가둔 이유는 뭐야? 설마 방해라도 할까 봐?”

“그럴지도 모르지.”

“어엉? 소영이 너. 방해할 생각 있어?”

석소영은 허리를 곧게 펴고 정좌한 채로 눈을 감았다.

“이무기 사령이 마을을 습격했다는 건 거짓이었다. 그렇다면 하 가문의 술사들이 습격받는다는 얘기도 거짓일지 모르잖나.”

“뭐어, 그럴 수도 있지. 어라? 그럼 뱀은 잘못이 없나?”

재효가 드물게 심각해졌다.

“실은 아까 생각한 건데. 이무기의 습격을 피하고자 가문 문양을 못 달게 했으면, 이유를 숨길 까닭이 없잖아? 오히려 널리 알려야 적극 따르지.”

“하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땅굴을 지키던 자들은 문양을 숨기고 변복하는 연유를 몰랐다.”

“안전을 위해서도 아닌데 굳이 출신을 숨길 까닭이 뭘까? 떳떳지 못한 일을 해서?”

설마, 하고 재효가 읊조렸다.

“뱀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우리 때문에 잡힌 건가?”

저도 모르는 사이 범죄에 가담한 걸까. 절로 와락 인상이 구겨지던 찰나.

“그건 아닙니다.”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구면이 들어왔다. 방위대장이다.

“이무기 허물을 쓴 뱀은 저희 가문 문양을 지닌 술사를 보면 죽일 듯 달려들었습니다. 이 부분은 오해 없길 바랍니다.”

“마을 습격은 거짓이 맞고?”

“종주님께서 귀인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과장을 조금 보태셨지요.”

재효는 감탄했다. 안면에 철판을 깔았나. 거짓부렁이 들통나고도 어쩜 저리 언변이 능수능란할꼬.

“벌써 잊으셨습니까? 가만있던 여러분께도 뱀이 먼저 공격을 감행했잖습니까.”

그랬다. 용의 고향이라는 청현수 인근에서 습격을 받았더랬지.

“가만히라기엔 어폐가 있지요.”

한동안 조용하던 유랑술사가 입을 열었다.

“우리만 해도 낯선 사람이 문 앞에서 어슬렁대면 신경 쓰이잖아요. 하물며 그 뱀은 동족이 모두 사라졌는데. 훨씬 예민하겠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인께서는 그리 두둔하시면 아니 되지요.”

방위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외부의 출입을 거부하며 오직 용을 위한 근원이자 안식이 되어 주던··· 청현수의 위치를 밝혀낸 당사자시지 않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