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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42)화 (42/138)

42화

“운해만의 다른 이름이 승룡만이죠. 지역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신수의 씨가 말랐는데. 괜찮으십니까?”

소영이 방위대장을 향해 물었다. 검지에 나무 새를 앉혀놓고 시선을 교환하던 대장이 무심히 답했다.

“글쎄요. 제가 아는 청현수는 늘 저리 고요한 모습이었기에. 딱히 놀랍지 않군요.”

소영은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오묘한 기분에 잠기었다. 저자는 어찌 이리 태도가 건성일까. 고향의 일인데도.

“귀인께선 예 오시면 이무기 사령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셨습니까?”

방위대장의 물음에 술사가 팔짱을 끼고서 생각에 잠긴 음성으로 긍정했다.

“운해만의 이무기는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니까요. 아무한테나 여쭤보려 했지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이제 다른 방도가 찾으러 가십시다.”

긴가민가하던 소영이나, 이번에는 확실히 이상하다 여겨졌다.

소영 자신이 고향 강암의 명소에 온다면, 하물며 신수를 잉태하는 영험한 장소라면, 술사로서 도저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 못 배겼을 텐데. 이자는 아닌 척 서둘러 벗어나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켕기는 구석이 있는 듯이.

“아뇨. 그러지 않아도 돼요.”

서로 얽은 팔등을 톡톡 두드리던 술사의 검지가 멎었다. 무슨 뜻이냐 묻는 재효에게 쉿, 하고 신호를 준 그가 고요한 숲 저편에 귀를 기울였다. 소영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따라 하다 의아해졌다.

숲이 이리 조용할 수 있던가?

새의 지저귐과 벌레 우는 소리, 바람에 등 떠밀려 서로 몸을 비비는 수풀의 마찰. 개중 어느 것도 들리지 않았다.

맑디맑은 청현수처럼 섬뜩하리만치 고요한 가운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서야 간신히 소음 한 가닥을 포착해 냈다. 필부는 인식조차 못 할 작은 소리를 알아챈 까닭은, 소영에게 익숙한 탓이었다.

재효가 바람에 실어 보낸 화살이 공중을 가를 때 들리는, 파공음.

깨달은 순간. 일대에 그늘이 졌다. 서둘러 고개를 젖히자 거대한 동굴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주둥이를 잔뜩 벌린 이무기다.

“피해!”

콰아앙⎯! 이무기의 머리가 지면에 박혀 들었다. 부옇게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소영이 기침하며 물러섰다. 아슬아슬하게 재효를 밀어내고 물러난 탓에 일행들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무기가 거체를 일으켰다. 소영은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 뒤에 숨어 기척을 죽였다. 세로로 길게 쪼개진 거대한 뱀눈이 샅샅이 훑는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커도 너무 크다.

저걸 대체 어찌 상대해야 하나. 막막함에 마른침만 삼키던 중. 위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무사하신가요?”

유랑술사였다.

소영은 머리를 내밀어 소리가 들린 방향을 확인했다. 한데 이무기 사령과 떡하니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거기 계셨군요.”

당연했다. 유랑술사는 이무기의 머리 위에 있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끝낼게요.”

이무기가 혀를 날름거리며 매섭게 돌진했으나 한발 앞서 백지 부적이 날아들었다. 척, 하얀 종이가 이마에 달라붙어 시야를 가렸다. 허둥지둥 부적을 떼어냈을 땐, 이미 장소가 바뀐 후였다.

유랑술사가 소영을 옮겨놓은 곳은 높이 솟은 봉우리였다. 거대한 이무기조차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소영은 숨죽이고 상황을 주시했다. 공격 대상이 돌연 사라지자 이무기가 당황한 듯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운 좋게 또 다른 이를 발견했는지 냅다 달려들었다.

물론 이번에도 유랑술사가 먼저였다.

“잠깐, 대선배···!”

재효가 짧게 내뱉은 외마디는, 유랑술사가 아닌 소영에게 닿았다. 재효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축지술이 먼저 이뤄진 까닭이다.

“재효.”

“어? 소영아?”

먼저 와 있던 소영이 맞이하자 어리둥절해 하던 재효는 팔에 붙은 백지 부적을 떼어내며 상황을 파악했다.

“알았다. 대선배 혼자 해결하시려는 거구나.”

목표를 둘이나 놓치고서야 제 위에 선 누군가를 알아챈 이무기가 벌레 쫓듯 머리를 흔들었다. 바닥과 나무 따위에 부러 몸을 비벼 대는 게,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소영과 재효도 헉할 만큼 격한 몸부림이었다. 결국 숨어 있던 하 가문의 방위대장마저 모습을 드러냈다.

“귀인, 도와드리겠습니다!”

“비···, 방··· 괜찮으니 기다리고 계세요.”

재효의 옆으로 새로운 이가 당도했다. 물론 방위대장이다.

광대에 붙은 백지 부적을 떼어내는 방위대장의 낯이 가관이었다. 소영은 유랑술사가 그에게 하려던 말을 돌이켜보았다. 비? 방? 무슨 얘길 하려다 만 걸까.

비켜, 방해된다?

“왜 이리 화가 나셨어요.”

유랑술사가 이무기의 기다란 몸체를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땅에 발을 디디며 묻는 그에게 돌아온 답은 키아아악⎯! 거친 울음과 채찍처럼 휘둘러 오는 꼬리였다. 꼬리 채찍은 그 규모가 상당하여 일대 지형이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진대도 술사는 가볍게 피해 냈다.

“성지에 침입해서? 하지만 청현수에 들어가진 않았잖아요. 멀리서 보기만 했는걸요.”

검은 꼬리가 지나간 궤적을 따라 나무들이 우지끈 부러지고 쓰러졌다. 빗자루로 쓸듯 사령의 꼬리가 스쳐 간 자리엔 남아나는 것 없이 깔끔했다.

꼬리를 지척에서 아슬아슬 비켜 간 삿갓 너울이 풍압에 마구잡이로 젖혀지고, 술사의 등 뒤로 수목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며 이파리를 소낙비처럼 우수수 떨구었다. 삿갓이 날아가지 않게끔 한 손으로 깊이 눌러쓴 그가 낮게 읊조렸다.

“···말을 안 하네.”

지면을 정리한 이무기가 술사를 향해 울부짖으며 접근했다. 몸을 숨길 지형지물이 거구에 쓸려 간 상황. 술사는 삿갓 그늘 아래에 시선만 들어 이무기를 마주 보았다.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이무기. 쩌억 입을 벌리자 길게 이어진 동공이 시꺼먼 어둠을 드리웠다. 이러다 정말 송곳니에 찍히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치 가까워졌을 때.

유랑술사가 사라졌다.

봉우리에서 아래쪽 상황을 주시하던 세 사람이 퍼뜩 몸을 일으켰다. 사라졌어? 어디야, 어디로 가셨지? 당혹하여 서로 우왕좌왕하던 찰나.

“······! 저기?!”

가장 먼저 발견한 재효가 검지를 세워 가리켰다. 그 손끝이 향하는 쪽으로 몸을 돌린 소영과 대장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유랑술사는 그들이 자리한 봉우리와 이어지는 절벽에 서 있었다. 수직으로 깎은 듯 가파른 절벽에 서서 너른 지면과 수평을 이룬 그가 사뿐 발돋움했다.

훌쩍 뛰어내린 인영이 이무기 위로 떨어졌다. 사령에 비하면 팥알처럼 작은 그가 육중한 거체의 정중앙에 착지한 순간.

콰아아앙⎯!

운석이 떨어져 내린 듯한 폭음과 함께 깊은 구덩이가 팼다. 한 번, 두 번, 세 번. 쾅, 쾅, 콰아앙! 검푸른 비늘 위에 선 술사를 중심으로 굉음이 연달아 울리며 대지가 움푹 꺼졌다.

부옇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술사가 발 디딘 허리 부가 지하 깊이 박혀 버린 이무기. 그 자리를 중심으로 세 차례 파문을 그리며 넓게 팬 대지.

허리 꺾인 이무기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파죽지세였다.

축지로 사령의 머리맡에 다다른 술사가 비늘로 뒤덮인 주둥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 슬슬 대화할 기분이 드실까요?”

눈을 까뒤집은 이무기에게선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곤란한 듯 하하 웃던 술사의 눈가에 별안간 이채가 감돌았다. 이무기를 유심히 살펴본 그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늘 웃는 상인 그에겐 무척 드문 반응이었다.

“벌써 돌아왔다고?”

놀란 하 종주가 서둘러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드르륵, 탁! 문이 열리고 삿갓에 씌운 너울이 가장 먼저 살랑이며 들어섰다. 그 뒤를 소영과 재효, 방위대장이 잇따르자 하 종주가 나서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과연, 귀인께선 남다르십니다. 차 한잔할 여유도 없이 서두르는가 싶더니··· 이리 빨리 돌아오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종주가 껄껄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앞에 선 유랑술사는 이전과 달리 너울을 넘겨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투명한 너울로 한 겹 가리어진 그의 심리를 유추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데 이무기 사령은 어디 있습니까? 법기에 봉인해 오신 겝니까? 하긴, 그 큰놈을 고스란히 데려오긴 힘들었겠지요. 당장 용으로 승천해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었으니 말입니다.”

“종주님···.”

주저하던 방위대장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유랑술사가 먼저였다. 그가 손 내밀자 소매 안쪽에서 뱀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술사의 팔 전체를 친친 감은 뱀은 구렁이마냥 굵고 묵직한 몸체에 먹물처럼 까만 흑빛이었다.

하 종주는 멈칫하며 검은 뱀과 유랑술사를 번갈아 보았다. 설마 하는 기색이 그의 낯에 스치었다.

“이 조그마한 녀석이··· 이무기 사령입니까?”

“이무기는 없습니다.”

유랑술사가 운을 뗐다.

“청현수가 텅 비었더군요. 설마 종주께서 모르진 않으셨겠죠?”

유랑술사는 뱀이 몸 감은 팔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이상하지요. 종주님 말씀처럼 용에 준하도록 성장한 이무기잖습니까. 그쯤 되면 완벽하진 않아도 단순 의사소통은 가능하기 마련인데. 몇 번을 여쭤봐도 답이 없었거든요.”

뱀은 술사의 팔이 제집인 양 편히 기대었다. 좀 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인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노골적인 친애였다.

“그래서 살짝 뒤져봤더니. 보시다시피 옹알이도 못 하는 아기가 나왔네요. 승천하고 버려진 이무기의 허물을 쓰고 다닌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물의를 일으킨 원인을 잡아 다행이군요.”

종주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으나, 세가의 지도자답게 금세 감정을 갈무리하였다. 뱀이 하악 이를 드러내며 경계하자 술사가 살살 달래었다.

“이무기 사령··· 이 뱀이 물의를 일으켰다 하셨죠. 구체적으로 어떤 말썽을 부렸을까요?”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 가문의 문양만 보면 공격하려 들고, 여러 마을을 습격하였다고요.”

“그럼 최근 습격당한 마을 지명을 세 개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 종주는 즉각 답하지 못했다. 찰나의 머뭇거림이 치명적인 타격이 되기 전, 하 종주가 옅게 웃으며 무마하려 했다.

“허어, 참. 나이를 먹으니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큰일이군요. 마을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 금방 기억해 낼 터이니···.”

“신중하게 답하는 게 좋을 거예요. 종주께서 말씀하시면, 바로 나가서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똑같이 물어볼 예정이거든요.”

만약 종주께서 내놓은 것과 다른 대답이 나오면··· 곤란해지겠죠?

유랑술사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었으나, 그럼에도 그 입가의 맺힌 미소가 눈에 선했다. 솟대에 앉은 나무 새가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하 종주가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쾅! 드르륵, 타닥! 사방의 문이 열리며 방위대원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하씨 술사들에게 포위당하자 소영과 재효는 등을 맞대고 섰다.

“역시 귀인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나직이 읊조린 종주가 휘하 술사들에게 명했다.

“의식이 끝날 때까지 손님을 안으로 뫼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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