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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41)화 (41/138)

41화

나무 새가 포르르 날아갔다. 자연스러운 날갯짓으로 하늘을 선회한 그것이 노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나무 새가 총총대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팡이를 쥔 나이 지긋한 노인은 나무로 만든 새의 지저귐을 듣기라도 한 듯 그래, 그러냐, 하고 답해 주었다.

“종주님.”

방위대장이 예를 올리자 노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노인, 해운 하씨의 종주는 허허 웃으며 유랑술사 일행을 맞아들였다.

“어서들 오시게. 동도 여러분.”

제 가문의 종주님도 뵙기 힘든 판에 타 가문의 종주님을 만나다니. 긴장한 소영과 재효는 허둥지둥 고개 숙여 인사했다. 유랑술사도 너울을 젖히고 얼굴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니, 그 말은 예전에도 만난 적 있다는 뜻인가?

소영과 재효는 여전히 허리를 직각으로 굽힌 채 의문 섞인 시선을 교환했다. 머리 위에서 허허로운 노인의 웃음이 들렸다.

“제가 저 아이들보다도 어릴 적에 뵈었지요. 아해들아, 어서 고개를 들거라.”

소영과 재효가 넵! 하고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모습에 종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유랑술사를 향해 돌아섰다.

“운해만은 참으로 간만에 오셨지요. 어디,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어깨에 앉은 나무 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종주가 제안했으나 술사는 사양했다.

“아시다시피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서요. 감사하지만, 용건만 간단히 해 주셨으면 하네요.”

빨리 자리를 파하겠답시고 앉으란 권유마저 물리는 술사의 행태에 소영과 재효는 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늙수그레한 노인이 한창때의 청년에게 존칭하는 양상도 어색하기만 한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오대세가 중 일익인 해운 하씨 종주님께 이리해도 되나?

아 물론 저쪽은 사대귀인 유랑술사님이시고, 연세 지긋한 종주님께서 약관이 되기 훨씬 전부터 안면이 있다지만, 그래도!

“허허. 제 기억 속 귀인께선 언제 어느 때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어른이셨거늘. 무상한 세월이 귀인마저 변하게 한 걸까요.”

“시간은 홍안의 소년을 백발 할아버지로 변모시키는걸요. 저라고 자유로울 리 없지요.”

“어릴 적 비 오는 날을 제일 좋아하던 아이가 무릎이 시리다며 꺼리게 될 때까지 귀인께선 그대로이신 것을요. 겉보기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려.”

종주가 손 내밀자 나무 새가 어깨에서 손등으로 총총 옮겨갔다. 검버섯이 피고 자글자글 주름진 손등은 마치 고목 같아서. 새가 앉은 모양이 자연스러웠다.

종주가 손을 떨치자 나무 새가 포르르 날아가 장대에 앉았다. 주변에 비슷한 장대가 여럿 세워져 있었는데 그 꼭대기엔 하나같이 나무로 만든 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솟대다.

“저 아이가 아무개 님에 대해 알려 줬나 보네요.”

방금 날아간 나무 새가 앉은 솟대를 보며 술사가 읊조렸다. 노인이 아무개? 하고 세 음절을 혀끝에 올렸다.

“일행분 성함이 독특하시군요. 그나저나 역시 저 아이를 눈치채셨던 겝니까?”

“땅굴에서부터 지켜보셨죠? 딱히 숨길 생각도 없지 않았나요.”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나 소영과 재효는 새삼 또 놀랐다. 솟대의 새가 땅굴에서부터 주시해 왔다니. 낌새를 전연 눈치채지 못한 것도 놀라운데, 어른들은 상대방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전제하에 대화를 이어 갔으니.

“거동이 불편한 노인네들 눈이 되어 주는 고마운 아이입니다. 물론 귀인의 이목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치 않았습니다만.”

하면 원하시는 대로 당장 본론에 들어가 볼까요.

“오늘 놓친 이무기는 사령(邪靈)입니다.”

하 가문의 술사들은 제법 오래전부터 이무기 사령을 잡고자 힘써왔다. 땅굴은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덫으로, 뱀에게 후진이 불가한 점을 이용하여 긴 대롱 안으로 유인해 가두어 잡듯, 이무기에 걸맞은 규모로 확대한 함정이었다.

“저희 힘이 미진하여 이러한 잡기를 동원하였으나, 귀인께서는 다르시겠지요. 오늘 놓친 이무기를 대신 잡아 주십사 청합니다.”

“이무기가 사령이라 하셨지요? 어떤 피해를 끼쳤나요.”

“어인 영문인지 저희 일족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입니다. 하여 사령을 포획하고자 하는 아해들에겐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완장, 법기, 장신구, 어느 것도 가져가지 말라 당부하지요.”

재효는 오는 길에 말을 튼 하씨 술사를 떠올렸다. 가문 문양을 어찌하여 달지 않았냐 묻자 위에서 지시했을 뿐 본인도 영문을 모른다던.

나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족의 술사를 보호하기 위한 방침인데, 어째서 이유를 알려 주지 않은 걸까.

“그리고요?”

종주의 설명을 들은 유랑술사가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인가요?”

재효가 보기에 하 종주는 내심 당황한 듯싶었다. 소영과 재효도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술사들이 공격당한다잖은가. 사령 토벌의 근거로는 충분하고도 남을 텐데.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몇몇 마을이 습격당했습니다. 피해가 막심하지요.”

종주는 이무기가 하 가문의 깃발을 보고 공격하는 게 아닌가 추측했다. 운해만은 하씨의 근거지이니만큼, 곳곳에 기를 세워 두는 경우가 왕왕 있어 더욱 곤란하다고.

“더불어 이무기는 반드시 산 채로 포획해 주시길 바랍니다.”

“산 채로···.”

“단순 퇴치보다 어려운 일임을 잘 압니다. 상해는 관여치 않겠습니다. 저희 가문에서 치료해 주면 되니까요. 목숨만 붙여 데려오는 게 조건입니다.”

유랑술사는 종주의 요청을 셈해 보듯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소영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채 애써 말문을 텄다.

“주제넘은 행동이 아닐까 걱정되오나, 실례를 무릅쓰고 후학이 질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으니 편히 말해 보게.”

“어찌하여 이무기 사령을 살려 두시려는 겁니까?”

종주는 허허 웃었다. 미숙한 어린 술사를 향한 자애가 주름진 눈매에 깊이 담기었다.

“목숨을 살리는 데에 이유가 따로 필요하더냐.”

소영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상하로 키웠다.

“큰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다면, 굳이 목숨을 취할 까닭이 없느니.”

만일 우리가 살생을 한다면, 이는 미력한 힘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어 그리한 것이리라고. 하 종주가 손주뻘의 아이에게 찬찬히 설명했다.

“우리 가문의 문양에 적대적인 것으로 보아, 필시 곡절이 있는 게지. 귀인께서 이무기 사령을 무력화해 주신다면, 시간을 두고 찬찬히 사정을 알아볼 예정이다.”

재효는 마음이 뭉클해지는 동시에 정문에서 삐딱하게 굴던 녀석들이 생각났다. 특히 매부리코 그놈. 놈이 이 광경을 봤어야 하는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하였거늘. 이 동네는 윗물이 청청 수질인데 아랫물은 구정물이로구나. 대체 뭘 보고 배운 거람.

“알았어요. 요청을 수락하겠습니다.”

유랑술사에게서 동의가 떨어졌다. 하 종주는 기뻐하며 밖에서 대기 중이던 방위대장을 불렀다.

“이 아해를 함께 보낼 터이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뛰어난 실력자이니 발목을 잡진 않으리라 덧붙이는 종주에게 유랑술사는 그러지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하 종주의 인자한 얼굴에 아련한 기색이 스치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귀인께 부탁을 드리는 처지로군요. 앉은 자리가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귀인 앞에만 서면 무력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합니다.”

솟대에 앉은 각양각색의 나무 새가 그들을 주시하였다. 하 종주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친구분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문득 생각난 듯 유랑술사가 안부를 묻자 하 종주가 한층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 오늘이 귀인을 뵙는 마지막 날이겠지요. 염치 불고하나······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연이 있음 직한 어조에 재효가 움찔했다. 이미 얘기가 다 끝나지 않았던가? 무얼 또 부탁하려는 거지?

종주가 남은 생을 운운하며 외는 말은, 이무기 사령을 잡는 건에 대한 연장선이라고 보기엔 다소 과한 구석이 있었다. 유랑술사도 마찬가지였던 듯 고개 숙인 하 종주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곧 너울을 내리고 돌아섰다. 그의 뒤를 세 사람이 나란히 따랐다.

재효는 힐끔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드르륵, 양쪽으로 문이 닫히며 고개 숙인 하 종주의 인영이 가로 줄었다. 장대에서 포르르 날아오른 나무 새가 문틈으로 날아와 방위대장의 어깨에 살포시 착지했다.

허리를 들어 올리던 하 종주는 재효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인상 좋은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에 재효는 반사적으로 꾸벅 인사했다. 이내 문이 닫혔다.

“이무기는 무슨 수로 추적하실 겁니까?”

방위대장이 나무 새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저희는 미끼나 덫을 놓고 걸려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만, 귀인께선 그리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시겠죠.”

“네에, 맞아요.”

어느새 유랑술사의 손에는 세 장의 백지 부적이 쥐어져 있었다. 그가 부적을 부채처럼 펼쳐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빠르게 갑시다.”

타다닷, 부적이 일행의 몸에 달라붙고 축지가 시전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어느 깊은 산중에 다다랐다.

“어우야, 대선배. 축지하기 전에 예고 좀 해 줘요. 깜짝 놀랐네.”

“하하. 미안해요. 서두르려다 보니 그만.”

백지 부적 한 장이 유랑술사의 주위를 나비처럼 나풀나풀 떠돌았다. 술사가 가볍게 손을 내젓자 두둥실 떠다니던 그것이 돌연 기세를 바꾸어 벌처럼 쏘아졌다. 휙휙 하얀 잔상이 스쳐 간 자리엔 무성한 풀과 나뭇가지가 우수수 베였다.

“여기는 어딥니까?”

“용들의 고향이에요.”

부적으로 길을 만들어 낸 술사가 소영에게 답했다.

“뱀이 청현수에 몸을 담그고 오랜 시간 수양하여 지성과 자아를 얻으면 이무기가 되죠. 그 이무기가 또 수련하여 용이 되고요.”

유랑술사의 걸음은 일견 여유롭고 느긋하였다. 한데 어째선지 따라가는 처지에선 뒤처지지 않기 위해 거의 뛰어야만 했다. 긴 포복으로 성큼성큼. 다른 자들이 달리는 속도로 걷는 유랑술사의 말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 이즈음일 텐데···.”

그들 모두가 직감했다. 영험한 성지에 다다랐음을.

다환의 술사라면 풍수지리와 지맥을 읽는 데 능통하며, 설령 배움이 부족한 자라도 이리 영기가 가득하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소영은 이 일대가 대륙 깊숙이 파고드는 해양의 기운과 우뚝 솟은 산맥의 기세가 어우러진 탁월한 명소임을 체감했다.

하물며 상이한 기운이 맞물린 자리에 고인 청현수란. 시리도록 맑은 호수는 깊이가 상당함에도 지극히 투명하여 바닥의 자갈과 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한데 기이하게도 청현수엔 어떤 생물도 살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물이끼조차도. 이리 생명이 태동하기 좋은 입지에 어인 일일까.

“이상하네요. 왜 아무도 안 계실까요.”

삿갓이 기우뚱하더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한 마디만을 남기고 술사가 사라졌다. 축지를 펼친 그는 일주향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돌아왔다.

“큰일이네요.”

자못 심각한 어조로 술사가 설했다.

“근방에 뱀은커녕 알껍데기도 없어요.”

“나쁜 일인가요?”

재효의 물음에 술사의 삿갓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물론이죠. 앞으로 이 땅에 새로 태어날 용이 없다는 뜻이니.”

소영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던 청현수의 청아함이 새삼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름처럼 맑고 고요한 청현(淸玄) 호수는 다름 아닌 멸종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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