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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40)화 (40/138)

40화

“이 자식님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셨어요?”

본격적으로 성이 난 재효가 존대와 하대가 뒤섞인 괴상한 소릴 해 대자 소영이 서둘러 붙잡았다. 재효를 등 뒤로 밀어 넣은 소영이 대신하듯 앞으로 나서자 이죽거리던 매부리코 대원은 소영의 커다란 그림자에 묻혀 버렸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상대에게 무심코 움찔해 버린 그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곤 금세 어깨를 폈다.

“왜, 뭐. 할 말 있나?”

“저희가 문중에 들어가면 흉··· 아무개 씨는 어찌 됩니까?”

“아무개 씨?”

정황상 아무개가 누군지 대강 눈치챈 매부리코 대원이 무슨 말 같잖은 이름이냐며 한차례 비웃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따위 내 알 바인가? 정 갈 데 없으면 문 앞에서 기다리시든가.”

“아니, 이 작자가 정말!”

재효가 기어코 활화산처럼 분노를 터트리려던 찰나. 방어 진형이 갈라지더니 내부에서 또 다른 술사가 나타났다.

“대장님···!”

방위대원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제히 인사를 올렸다. 다 같이 허리를 굽히자 홀로 곧게 선 대장이 군계일학인 양 돋보였다. 유랑술사 일행을 한껏 무시하며 설왕설래하던 매부리코 대원마저 움칫 굳어 버렸다.

과연 대장은 다른 걸까. 아무개가 보기에도 근방의 하씨 술사 중 그의 기도가 가장 날카로웠다. 특히 눈길을 끈 부분은, 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새였다. 나무를 깎아 만든 새.

“대장님, 이건 제가···.”

“종주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매부리코 대원이 변명하려는 듯 깔짝였으나, 사뿐히 무시한 대장이 유랑술사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서두를 뗐을 뿐이나 방위대원을 포함한 하씨 술사들은 물론, 소영과 재효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 일이 대종회의 수장께서 친히 관심을 표할 급의 사건이란 말인가?

“여러분 덕분에 저희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문책하는 대신 만회할 기회를 드릴 테니 되도록 와 주시길 바란다 하셨습니다. 특히 유랑술사님.”

한 인물을 콕 집어 지목한 방위대장이 덧붙였다.

“일행 중 최대전력인 당신께서 불참하신다면, 석씨와 염씨의 어린아이들만으로는 힘들지 않겠냐는 말씀도 전하셨습니다.”

아무개는 팔짱을 꼈다. 이건 거의 반협박 아닌가.

먼저 실수를 저지른 탓에 입장이 궁색하긴 했다. 하나 운해 하씨 측에서도 구실 삼아 유랑술사를  끌어들일 만큼 전망이 밝지 않은 듯싶은데. 협조를 구하면서 저리 건방을 떨어도 될는지.

“남는 일행분에 대해서는 안심하십시오. 이분, 아무개라 하셨나요? 문제 되지 않도록 저희 측에서 철저히 관리하겠습니다.”

어째 말하는 꼬락서니가··· 꼭 인격체가 아닌 것을 다루는 듯했다.

“여러분께서 맡은 바를 신속하게 수행할수록, 일행과 재회도 앞당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둘러 종용하는 기세에 유랑술사가 흐음, 하고 목을 낮게 울렸다.

“술사님.”

이대로는 한나절이 다 가도록 꼬박 대치 중일 듯하여 아무개가 끼어들었다.

“저기··· 난 괜찮아.”

아무개가 말하는 것조차 신기한 듯. 어깨에 나무 새를 앉힌 방위대장이 흘낏 돌아봤지만, 안중에 없었다. 반면 유랑술사가 삿갓 아래로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눈길은 무진 신경 쓰였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내가··· 사고 칠까 봐 그러지? 그치만······ 나는, 유품을 장군한테 전달할 때까지··· 잘 참았어.”

이번에도 얌전히 기다릴 수 있어. 그리 주장하는 아무개를 향해 삿갓이 슬쩍 기울어졌다.

“저는 그런 걸 염려하지 않았는데요.”

보란 듯이 과장된 한숨을 내쉰 유랑술사가 소매 안으로 손을 넣었다.

“하는 수 없지요. 금방 다녀올 테니.”

뒷면에 환(還) 이라는 글이 반투명하게 아른거리는 부적. 소환부를 한 장 꺼내 든 그가 아무개의 손에 쥐여 주며 당부했다.

“누가 괴롭히거든, 저한테 이르세요.”

아무개는 멀뚱멀뚱 눈을 끔뻑였다. 이르라니, 무슨···?

“아셨지요?”

첫 심부름 보낸 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하씨는 물론 석씨와 염씨마저 차게 식고 말았다.

그러나 유랑술사는 확답을 듣겠다는 듯 부적을 받아 든 아무개의 손을 감싸 쥐고 시선을 바로 마주했다. 아무개가 얼결에 고개를 주억이자 그가 웃으며 손을 떼었다. 등을 돌리는 술사의 옷자락을 아무개가 덥석 붙잡았다.

“저기, 술사님···.”

한 손에는 소환부를, 다른 손으론 상대의 소맷자락을 꼭 쥐고서. 아무개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술사님도···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일러.”

딱히 이상한 소릴 한 것 같진 않은데. 유랑술사는 아무개가 처음 보는 얼굴을 했다. 입가에 아슬아슬 희미한 흔적만 남은 미소. 웃지 않는 눈.

그런 낯을 하고서 고개를 모로 기울인 술사가 되물었다.

“제가 정말로 이르면 어쩌시려고요?”

아무개는 왜 그리 당연한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답했다.

“내가··· 혼내 줄게.”

유랑술사가 아무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촌각이 흐르고, 돌연 딴사람이 된 듯 그가 작위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듬직하네요.”

“······빈말 아니야···.”

“네에, 감사합니다. 대신 혼을 내 주시겠다니.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아요.”

아무개의 손에서 옷자락을 슬슬 잡아 뺀 술사가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따 봬요.”

마지막으로 상냥하게 웃어 준 그가 방위대장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방어진을 구축했던 하씨 술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둘러쌌다.

“따라오시오.”

확실히 유랑술사가 곁에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놈들 태도 변화가 확연했다. 아무개는 방위대원에게 포위되어 죄인처럼 이동했다. 그런데.

“······여기는?”

칸칸이 나뉜 방과 창살. 그 안에 웅크린 사람들과 밖에서 감시하는 자들.

아무리 봐도 감옥 같은데?

벌써 소환부를 쓸 때가 도래한 것인가. 유랑술사에겐 틀림없이 선견지명이 있으렷다. 괴롭히면 이르라 하였거늘. 본격적으로 사고 치기도 전에 감옥에 처넣는 건, 반론의 여지 없이 분명한 괴롭힘이잖은가?

“가문 내외의 술사들을 격리하는 곳이외다.”

황금 기둥, 곳간 한 채짜리 종잇장을 매만지며 고자질을 신중히 고려하던 아무개에게 술사들이 설명했다.

“운해 하씨의 시조이신 개운공께서 용을 만나 언약을 맺은 역사적인 날. 이를 기념하고자 용의 자제들께서 선물을 하사하시었지.”

“여기는 초도(椒圖) 님께서 주신 선물을 보관하는 곳이에요. 닫기를 좋아하던 그분께서 주신 아홉 자물쇠 중 여덟이 예서 쓰이지요.”

“초도 님의 자물쇠로 걸어 잠그면, 공간을 닫을 수 있습니다. 닫힌 영역은 안팎에 서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요. 어떤 대단한 술법을 사용한들 마찬가지입니다.”

개구리와 소라가 섞인 듯한 형상의 초도를 본뜬 자물쇠를 손에 들고서. 철창문을 활짝 연 술사가 미안하다는 투로 곰살맞게 굴었다.

“일행이신 유랑술사 및 세가 자제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셔야 하는데. 감옥 방을 내어드려 죄송해요. 윗분들이 안전에 민감하셔서···.”

“무얼 변명하고 그래?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

이곳에서라면 어떤 변고를 일으켜도 싹을 자를 수 있으니.

그리 뇌까리는 술사는 지극히 서늘하였다. 반면 아무개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변명하던 술사는 안절부절못하며 거듭 부연했다.

“그나마 이 방은 높은 분들 전용이라 잠시 머물기엔 나쁘지 않을 거예요. 가구도 갖춰 놓았고, 창문도 있고, 미리 청소해 놔서 깔끔하고······.”

더 들어 주기도 성가셔서. 아무개는 놈들을 무시하고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다. 철컥,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선명했다. 아무개는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초도의 자물쇠를 채우기 전과 후가 판이했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동일한 방이나, 아무개의 체감으로는 산과 바다만큼이나 이질적인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닫는다’는 게 이런 뜻이었던가.

괜히 답답하여 창을 열어젖혔다. 윗사람들 전용이라더니 과연, 탁 트인 바다의 전경이 유려하게 펼쳐졌다. 풍광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모양이다.

아무개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팔이 뻗어 나가던 중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턱, 걸렸다. 아무개의 손이 부딪힌 곳을 중심으로 잔잔한 동심원이 퍼져나가며 풍경이 얕게 일렁였다.

물리력이 통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볼 차례다. 방 한가운데에 선 아무개를 중심으로 짙은 원기가 안개처럼 어둡게 깔리었다. 고급 객실처럼 꾸며 둔 옥 내부 온도가 한층 낮아져 서늘하였다.

하지만 귀기는 창살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했다. 투명한 잔에 담긴 먹물처럼, 감옥 내부만 자욱이 채울 따름이다.

아무개는 무용한 원기를 거두었다. 무릎까지 차오른 흑기가 삽시에 수그러든 가운데. 아무개는 멍하니 서서 숙고했다.

용의 아홉 번째 자식, 초도의 권능이 예상외로 막강했다.

거점지역의 이점이 작용한 덕이겠지. 신령은 흔히 영지라 부르는, 제게 예속된 권역 내에서 본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반동인지 타 신령의 영지로 이동할 경우 힘이 급감해 버리나, 제 영역에서만큼은 신기와 같은 권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해운 하씨와 언약을 맺은 용 급의 대신령쯤 되면 그의 감정과 기분, 상태에 따라 일대 기후가 뒤바뀌기도 했다. 초도는 그 자식이니 용의 영지 일부에서 권능을 인정받았을 터.

어찌할까. 약조한 대로 얌전히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아무개는 만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불운이 그림자처럼 늘상 함께함으로. 언제나 최악의 최악을 염두에 두고 대비해야만 했다. 혹여나 유랑술사에게 다급한 사정이 생겼는데도 갇힌 탓에 손 놓고 있어야 한다면··· 그처럼 끔찍한 일은 다시 없을 테니.

······부숴 버릴까?

단순할수록 강한 법. 위력으로 찍어눌러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 만약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만큼 힘이 부족했던 것뿐이다.

하나 아무개는 금세 계획을 철회했다. 설령 초도의 권능을 압도하여 파괴한다 해도 그 후가 문제였다. 탈출하는 데에 힘을 소진해 버리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부족할 수도 있으니. 되도록 온전히 만전을 기한 채로 탈출해야 한다.

불현듯 소환부가 떠올랐다. 아무개는 품 안에 고이 모셔 둔 부적을 꺼내 들었다. 기능구조는 단순했다. 앞면에 글귀를 적으면, 원주인인 유랑술사에게 되돌아가는 술식.

소환부는 초도가 닫은 공간을 뚫고 귀환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아직 특별한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귀한 부적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

아무개는 소환부를 손바닥에 쥐고서 창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수면에 접촉할 때처럼, 상이한 질감의 표면이 반발했다. 또 수면과 마찬가지로, 그 반항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이전과 달리 쑤욱, 거침없이 창밖으로 뻗어 나가는 손에 아무개의 입꼬리가 스산하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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