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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39)화 (39/138)

39화

뜻밖에 상황은 평화로이 종결됐다. 신원이 확실한 소영과 재효 덕이었다.

“어라, 쟤네 걔들 아니야? 강암 석씨 막내딸이랑 가온 염씨에서 내놓은 꼬맹이.”

“누가 내놓았다는 거야! 내 발로 직접 나왔거든!?”

버럭 성을 내는 재효의 반응에 여타 술사들 사이로 미묘한 기운이 번졌다.

“석씨랑 염씨 애들이라고?”

“그럼 우리 가문에서 문책할 수도 없잖아.”

“어차피 우리 선에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보고나 올리자. ······이무기 포획은 실패했다고.”

실패. 그 단어에 술사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재효는 뜨끔해서 화내려던 걸 멈췄다. 정황상 저들이 열심히 지은 밥에 재를 뿌린 게 자신인 듯하니.

“일단 같이 가 줘야겠다. 보고할 때 증인이 필요하지도 모르니까.”

“나랑 소영이는 상관없는데···.”

재효가 유랑술사와 아무개를 힐끔 곁눈질했다. 생각이 통한 소영이 입을 열었다.

“저분들도 동행해야 합니까? 증인이 필요하신 거라면, 재효와 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음. 혹시 모르니 일단은 다 같이 가지. ······대체 어쩌다 저런 걸 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만.”

저런 거, 라고 일컫는 상대의 시선은 정확히 아무개를 향했다. 소영과 재효가 면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유랑술사가 손을 내저었다.

“너무 걱정 말아요. 혹 책임을 추궁당하거든 연장자인 제가 감당할 테니까요. 상황이 이리된 건 제 탓이기도 하고요.”

“······? 아니야, 술사님. 여기로 온 건··· 나 때문이잖아.”

남들이 뭐라든 어떤 눈으로 보든. 안중에도 없던 아무개가 유랑술사의 말에는 즉각 고개 들고 반론했다.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거점 중 하필 여길 선택한 건 자신이었다고. 현 사태는 제 불운이 만들어 내었다고.

유랑술사는 하하 웃었다.

“아무개 님은 사양했는데 제가 괜찮다며 부추겼잖아요. 그러니까···.”

유랑술사가 가볍게 손을 젓자 백지 부적이 그들 사이를 갈지자로 휙휙 날아갔다. 숙련된 검객의 칼끝처럼, 날을 세운 종이가 거미줄 형태의 포박술을 넘나들자 잘린 그물 조각처럼 술식이 후두둑 끊어져 떨어졌다.

“제 몫이죠.”

손쉽게 진법에서 벗어나 착지하는 네 일행을 보고 다른 술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우리가 한 주 내내 준비한 포박술을, 저리 쉽게 파훼한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상대를 향해 재효가 어깨를 한껏 젖히며 부러 헛기침해 주의를 끌었다.

“당연하지!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대귀인 중 일인이자 대~선배이신 유! 랑! 술! 사! 님이시라고! 우리는 대선배에 비하면 배냇짓하는 갓난애나 다름없지~!”

“······하, 하하.”

유랑술사의 웃음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무개의 착각만은 아닐 성싶었다.

수치심은 어찌하여 타자의 몫인지. 지나치게 으쓱해 한 재효의 행태에 나머지 일행은 심히 어색해지고 말았다.

하나 효과는 확실했다. 그들을 둘러싼 술사 무리에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술렁거림이 일었다.

“유랑술사라고?”

“삿갓에 백지 부적. 인상착의는 소문과 같은데.”

“염씨 석씨가 아주 헛소리를 하진 않을 거 아냐.”

훨씬 조심스러워진 태도로. 그들이 일행 앞에 다가왔다.

“저어··· 정말로 유랑술사십니까?”

아무개의 등에 붙은, 거미줄 엇비슷한 포박술을 옷에 붙은 머리카락인 양 한 올 한 올 떼어 주던 술사가 음?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 다들 그렇게 부르시긴 하죠.”

생긋 웃으며 나온 대답에 술렁임이 배로 늘었다.

왁자한 난리판이 벌어지기 직전. 누군가 마지막 일행을 향해 시선을 줬다.

“한데 저건 대체 뭐야···?”

“엄청 불길한데······ 저런 걸 종가에 데려가도 될는지 모르겠네.”

“유랑술사가 달고 다닐 정도면, 모종의 이유가 있겠지?”

불안한 시선들이 아무개를 향했다.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해 보아도 유의미한 결론은 도출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윗선에 결정을 떠넘기기로 했다. 두 조로 나뉘어 각각 유랑술사 일행의 앞뒤로 배치한 그들이 가문으로 이동했다.

“뭐? 너희 모두 운해 하씨 소속이었어?”

뜻밖에 붙임성이 좋은 재효는 그새 지척에 있던 술사와 말을 텄다. 운해 하씨는 재효의 가온 염씨, 소영의 강암 석씨와 마찬가지로 오대세가에 속하는 일족이었다.

“왜 가문 문양을 빼고 다닌 거야? 네가 말해 주지 않았으면, 도착할 때까지 몰랐을걸. 옷은 또 왜 그 모양이고?”

“나도 몰라.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이라. 소속이 알려져선 안 된다고 가문 표식이 들어간 장신구는 전부 빼고 옷도 허름한 거로 나눠 줬어.”

“응? 알리면 안 된다며. 나한테 말해 줘도 돼?”

“뭐 어때. 어차피 본가에 도착하면 다 알 텐데.”

하씨 술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모르겠다. 이무기 하나 생포하겠답시고 온갖 궂은일을 다 시키더니. 이제는 땅굴까지······ 이리 시간 낭비 인력 낭비할 바엔, 차라리 직접 족치는 게 낫겠어.”

우거진 수풀이 점차 옅어졌다. 아무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 중에 소금 내음이 묻어났다. 마침 숲을 벗어나자 좌우로 벌어진 산등선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가 드러났다. 육지 쪽으로 해수가 깊이 파고든 만(灣)이었다.

하 가문의 선조가 자리 잡은 운해만은 승룡만(乘龍灣)이라고도 불렸다. 하늘을 오르는 용을 뜻하는 말로, 이무기가 용으로 화하여 승천할 때 발생하는 현상. 용오름이 종종 목격되던 지역 특성에서 비롯된 명칭이었다.

유서 깊은 용들의 고향으로 들어서던 찰나. 뒤통수에 와 닿는 시선에 휙, 뒤를 돌아보았다. 때맞춰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세 마리의 새가 홰를 치며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 아무개의 눈동자도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왜 그러세요?”

술사의 물음에 아무개는 별일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무로 만든 새가 자신을 주시하더라는 게 딱히 별스러운 일은 아니니.

이 지방의 실질적 주인이나 다름없는 운해 하씨의 종가는 만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경사진 바위산에 절묘하게 터를 잡은 그곳은 사람인(人) 자로 좁아지는 만의 중심에 긴 다리를 놓고 양옆으로 뻗어 나갔다.

바다와 극도로 인접한, 물 위에 지어진 듯 아름다운 전각의 처마가 그리는 능선이 보일 즈음. 안쪽에서 인기척이 몰려나왔다. 전원이 운해 하씨의 소용돌이 문양을 단 술사들이었다. 열을 맞춰 각자 위치로 척척 발맞춘 이동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각 잡힌 모습이 제법 볼 만하여 재효가 오호, 하고 작게 환호했다.

하나 아무개는 마냥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없었다. 저 대열은 아무리 봐도 방어용이니. 자기 집 앞마당에서 방어 진형을 짠 까닭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곱게 넘어가긴 그른 듯싶다.

“멈추시오!”

역시나. 그들은 일행이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도중에 세웠다.

“하무영! 이리 와서 보고해라!”

매부리코의 술사가 한 명을 지목해 불러냈다. 제일 앞장서서 유랑술사 일행을 인솔하던 자였다.

매부리코와 길지 않은 대화가 오간 후, 하무영이 돌아왔다. 전령 역할을 맡은 그가 말을 전했다.

“유랑술사 님, 석 낭자, 염 공자. 세 사람은 저희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아무개를 돌아본 그가 이어 말했다.

“죄송하지만 다른 한 분은 출입이 불가합니다.”

“저희가 한 일행인 건 아시죠?”

유랑술사가 확인차 되묻자 하무영이 긍정했다.

“네. 말씀드렸습니다만, 절대로 출입을 허가할 수 없으시답니다. 이유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아무개가 출입 금지당한 연유라니. 뻔하잖은가. 제정신 박힌 이라면, 누구든 제집에 흉신을 들이고 싶지 않을 테니. 상대측 입장이 이해 가고 납득되어서 도리어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럼 저도 남겠습니다. 한 명만 따로 떨어지는 건 내키지 않아서요.”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유랑술사의 절충안을 받은 하무영이 방위대원들에게로 갔다. 매부리코 술사가 불같이 화내며 언성을 높였다.

하무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유랑술사 일행에게로 돌아왔다. 굳이 듣지 않아도 어떤 답을 가져왔을는지 짐작되고도 남았다.

“······안 된답니다.”

하무영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은지 방위대원과 유랑술사 양측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까라면 까야지만, 그렇다고 유랑술사의 뜻을 거스르자니 미치고 팔짝 뛰려는 게 훤히 보였다.

“방위대라 했나. 거기 직위가 높은가 봐? 비슷한 연배인데 엄청 눈치 보시네.”

재효가 중얼거리자 그새 얼굴을 익힌 하 가문의 술사가 작게 속닥거렸다.

“혜선공파 녀석들이야. 문중에서 발언권이 강한 종파 소속인데, 방위대 내에서 입김이 센 편이지. 괜히 피곤하게 얽히고 싶지 않으면, 일찌감치 피하는 게 나아.”

그리 말하는 모양이 딱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서 재효는 혀를 차고 말았다.

“이 동네도 속 시끄럽구나. 주단 금씨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굽실거리는 하무영이 마땅치 않은 듯. 불퉁하게 쏘아보던 매부리코 대원이 직접 나섰다.

“이것 보쇼. 당신네가 사대귀인이니 오대세가니 떵떵거리느라 착각하나 본데.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든 간에 여긴 운해 하씨 종가요. 운해에 왔으면 하씨의 규약을 따르셔야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나, 아무개는 일갈하는 매부리코 대원의 눈에서 저열한 욕망을 읽었다. 상대를 무시하고 짓밟을수록 자신이 한층 더 높아진다 착각하는 부류의.

“방위대는 저리 지독한 귀기 덩어리를 문중에 들일 수 없소. 아무리 유랑술사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평소 엄두도 못 낼 상대가 특수한 상황에 처해 비교적 약자의 입장일 적에. 이를 빌미 삼아 공격하길 즐기는 듯했다. 예를 들어 사대귀인이라 불리는 유랑술사가 그네들에게 폐를 끼친, 오늘 같은 경우.

“어린애도 아니고 억지 부리지 마시오.”

“허, 참. 우리가 언제 드러눕고 생떼 부리기라도 했어요? 안 되면 아니 된다 한마디만 하면 될걸. 왜 자꾸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고 그래요?”

어린애 소리에 발끈한 재효가 대거리하자 매부리코 대원은 기다렸다는 듯 이거 보라지, 하고 혀를 찼다.

“유유상종이라··· 가온 염씨에서 내놓은 놈이랑 어울리는 수준이라면, 무어 알 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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