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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38)화 (38/138)

38화

각기 십육방위로 뻗어 나간 선형은 여타 장해물의 방해 없이 공중을 갈랐다. 빛의 선이 그어질 때마다 주위에 작고 동그란 구형이 별자리처럼 허공에 콕콕 박혔다.

“선은 방위를, 점은 제가 지정한 위치를 표시해요.”

술사가 빈손을 들어 주먹을 쥐듯 오므리자 멀찍이 뻗어 나간 선과 점이 좁혀졌다. 공간이 오그라들듯 순식간에 축소한 그것은 딱 산봉우리를 뒤덮을 정도의 규모로 촘촘히 모여들었다.

“여러분 머릿속에 있는 다환의 지형과 제가 표시한 점의 위치를 대조해 보시고 골라가면 돼요.”

“······굉장하다.”

재효는 진심으로 경탄했다. 축지술이 까다로운 연유는 첫째로 목적지까지 정확한 거리를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리 설정에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강 한복판에 도달해 허우적대거나 비탈진 절벽에 떨어져 추락하는 수가 있으니. 혹여나 인간의 접근을 허하지 않는 신령의 영역에 다다를 경우, 역으로 술법이 튕겨 나가 졸지에 미아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빈번히 벌어지는 사례들이다. 때문에 축지술은 시전자의 시야가 닿는 범위로 한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먹도 종이도 필요치 않은 이 가상의 지도는 유랑술사가 다환 전역을 오가며 직접 작성한 것. 그가 선정한 지점은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된 셈이다.

“옛날에 만든 거라 요즘 실정과는 다를 수 있어요. 하지만 큰 점은 주요거점으로 삼은 곳이라 자주 오가는 편이에요. 거긴 믿어도 될 겁니다.”

“대선배. 정말 멋지고 대단하고 엄청난데······ 이거 우리도 쓸 수 있긴 해요?”

축지술이 난해한 이유 두 번째. 영력의 무지막지한 소모.

당연하지만, 멀쩡한 땅을 접어 이동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수호단을 복용한 소영의 최대 거리가 육 리였잖은가. 이 정도면 그냥 걸어가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유랑술사가 아무리 세심하게 다환 전도를 제작했어도 이를 사용할 영력이 없으면 그림의 떡이나 매한가지인 셈.

“주요 거점 위주로 제 영력을 미리 채워 둘게요. 필요하실 때 사용하세요.”

재효는 다시 한번, 술사의 뒤로 찬란한 후광이 비치는 환상을 보았다.

“대선배. 난 정말 답 없는 바보 멍청이였어요. 앞으로는 대선배가 메주로 술을 빚어도 믿고 마실게요.”

비급서? 법보? 이건 그런 수준에서 논할 경지가 아니다.

감격이 지나친 나머지 숭배하려 드는 재효를 진정시키며. 술사는 두 후배에게도 비석에 영력을 불어넣게 했다. 주인인 유랑술사가 허가한 사용자를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다. 지문처럼 각기 다른 영력의 성질은 그 자체로 식별력이 있으므로.

“이제 직접 사용해 볼까요. 아무개 님, 마음에 드는 점 아무거나 골라 보세요.”

“······나?”

아무개는 망설였다. 그간의 경험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고르면··· 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시범용으로 잠깐 써 보는 것뿐이니까요.”

“······그, 래도···.”

“하하. 설마 멀쩡한 땅이 무너지기라도 하겠어요? 자신감을 가져요. 정 불안하거든 큰 거점 위주로 고르세요.”

술사가 웃으며 농담조로 권하자 마침내 결심한 아무개는 구석의 점 하나를 골라 검지로 살짝 건드렸다.

같은 시각, 비석에 손을 대고 있던 소영과 재효는 단전에서 손을 거쳐 비석으로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어마어마한 영력에 어지럼증마저 느꼈다.

눈앞이 각양각색으로 물들고 다리가 휘청였다. 비석에 기대어 가까스로 버텨 내길 잠시. 다시 눈을 뜨자 그들은 여전히 동일한 형태의 비석에 손을 짚고 있었다. 하나 주변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따스한 햇볕이 머리 위에 내리쬐고 졸졸 시냇물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평화로운 숲속. 느닷없이 나타난 인간에 놀란 토끼가 수풀 속으로 줄행랑쳤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쉽죠?”

술사가 손등으로 비석을 가볍게 두드렸다. 삽시간에 영력을 바닥까지 털린 재효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 풀썩, 바닥에 무릎을 찍고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우득.

드득, 우드득⎯

불길한 소리가 귀청을 두드렸다. 다급히 고개를 쳐들고 주변을 살피려 했으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쩌적, 땅이 갈라졌다. 지면이 벌어진 균열 사이로 훤히 드러난 나무뿌리가 우드득, 끊어졌다.

“이런.”

술사의 나직한 탄식과 함께, 발 디딘 대지가 무너졌다. 일행은 동시에 추락했다.

“으아아악···!”

“하하. 떨어지네요.”

재효가 허우적거리며 내지르는 비명이 지저에 메아리쳐 울렸다. 이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은 술사가 단조로운 어조로 평했다.

가늘게 휘어진 눈매로 어두컴컴한 바닥을 주시하는 그의 손엔 이미 백지 부적이 쥐어져 있었다. 아래를 향해 부적을 날리자 선두를 따르는 철새 무리처럼, 다른 부적들이 먼젓번 것을 따라붙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부적 위로 네 일행이 떨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백지가 층층을 이루며 추락의 충격을 연달아 줄여 주었다. 그들이 부적 더미에 부닥칠 때마다 하얀 종잇장이 깃털처럼 허공에 나부꼈다.

마침내 바닥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재효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였다.

“헉, 허억. 미친······.”

“하하. 멀쩡한 땅이 무너지기도 하네요.”

자신이 한 말을 철회하며 술사가 웃음 지었다.

“아오, 그놈의 불운. 장난 아니네.”

재효는 작게 투덜거렸으나, 공동에 울린 탓에 예상외로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당황하여 흉신의 눈치를 살폈으나, 아무개는 별다른 반응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재효는 자신이 무시당한 건지, 아무개 또한 이 사태가 제 불운으로 빚어졌다 여기어 그런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술사가 지하 동굴 벽면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석 달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그새 굴을 팠나 봐요.”

지하가 뻥 뚫려 있으니 얇은 지반이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게다. 소영은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규모가 상당합니다. 석 달로는 어림도 없을 듯합니다만.”

“술법을 썼겠지. 보통 인력으로는 그 시간에 이리 만들기 힘들어.”

네 사람이 나란히 서도 넉넉할 규모의 땅굴을 보며 재효가 거들었다. 술사도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쿵. 쿠구궁··· 우르르르···

발밑에서부터 진동이 올라왔다. 떨림이 점차 커지며 머리 위로 흙먼지와 작은 돌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뭐, 뭐야? 지진?!”

“점점 다가오는 것 같다. 조심해라.”

이제 막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소영과 재효는 서로 등을 맞대고서 땅굴 양쪽을 앞뒤로 주시했다.

쿵, 쿵콰강! 콰과과광···!

굴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걱정되리만큼 강렬한 충격파에 똑바로 서는 것조차 힘겨웠다. 길게 이어진 땅굴 너머 어둠을 응시하던 재효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짜증이 나서 도깨비불을 먼 공중에 틔우자 푸른 불빛 아래 반들거리는 비늘이 스쳐 갔다.

“키에에에엑⎯!”

이무기였다.

넓은 굴을 가득 채운 이무기가 입을 쩍 벌렸다. 사람 네댓쯤은 거뜬히 삼킬 수 있을 주둥이는 상하로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놈의 정체를 자각했을 땐, 이미 지척에 다다른 후였다.

“뭐하고 계세요.”

경직되어 버린 소영과 재효에게. 술사가 생긋 웃으며 이무기가 들이닥치는 반대편을 가리켰다.

“튀어요.”

“······이런 젠장!”

네 명은 이무기의 한 끼 식량이 되지 않기 위해 달렸다. 재효의 푸른 귀화를 등불 삼아, 무섭게 쫓아오는 이무기를 피해. 가쁜 호흡에 폐가 죄고 종아리가 당길 때까지. 어둠 속을 달리고 달렸다.

어느 순간, 멀리서 좁쌀만 한 빛이 보였다. 출구다.

“한 번에 갈게요!”

목적지가 확정되자마자 유랑술사는 특기를 십분 발휘했다. 벌처럼 날아든 부적이 일행에게 달라붙고 축지술을 펼치자 삽시에 땅굴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급작스럽게 환한 빛을 맞이하자 쿡쿡 쑤셨다. 각자 눈살을 찌푸리거나 손차양으로 가리고, 삿갓을 깊게 눌러 쓰는 등.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로. 한창 달리던 관성에 힘입어 굴 밖으로 튀어나왔다.

“결(結)!”

땅굴을 벗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결박진이 발동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행은 거미줄에 사로잡힌 잠자리처럼, 포박술에 묶여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다.

진법을 발동시킨 술사들이 당황하여 언성을 높였다.

“웬 놈들이냐!”

“사람이 왜 나와? 이무기는?!”

호랑이도 아니건만, 제 얘길 하자마자 이무기가 굴 밖으로 머리를 비죽 빼냈다. 크게 울부짖으며 땅을 할퀸 이무기가 혼비백산한 술사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짙푸른 하늘 너머로 긴 몸체를 유연하게 가동하며 멀어지는 이무기. 그 이무기를 잡고자 속박진을 준비한 술사들. 이무기 대신해 진법에 걸린 네 명의 침입자.

당연하게도 침입자를 보는 술사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재효는 얼떨떨했고 소영은 굳어 버렸으며, 아무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런 난리 통에서도 용케 삿갓을 챙겨 잡은 유랑술사가 난처한 듯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거하게 사고를 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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