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三. 최후의 용
재효는 퍼석해진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수면에 비친 물그림자가 되어 흔들리는 제 모습이 싱숭생숭했다.
소영도 낯빛이 어둑했다. 조반을 들고 다음 목적지인 대협곡으로 떠날 채비를 하면서도 반쯤 넋을 놓고 있었으니.
“상태가 썩 좋지 않네요.”
어린 후배들에게 심마가 깃들려는 조짐을 간파한 술사가 제안했다.
“두 분은 한동안 쉬는 게 어떨까요?”
“아, 아닙니다!”
혹여 저희를 두고 가려는 걸까. 소스라친 소영이 서둘러 해명했다.
“별일 아닙니다. 이 정도쯤은 거뜬하니 괜찮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또 누가 흉신을 감시하려 들겠어요? 쓰러질 때까지 버틸 거예요!”
재효도 덩달아 어깨를 펴고 장담했으나, 딱 봐도 허세였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술사는 어린 후배들이 긴장하여 바짝 기강을 세워도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무리할 필요 없어요. 적당히 힘 빼고 살아요.”
그의 설렁설렁한 태도에 어깨를 도로 옹송그린 재효가 한껏 늘어져서는 투덜거렸다.
“흉신을 두고 누가 심각하지 않겠어요? 술사로서 마땅히 감시하고 경계할 의무가 있는데.”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윗사람에게 넘겨 버려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나잇값을 해 보겠어요.”
소영과 재효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평소라면 이처럼 가벼운 몇 마디 말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을 터. 하나 흉신의 악몽을 간접적으로나마 겪고, 어릴 적 친우가 변심한 것을 직접 목도하자 심적으로 동요가 일었다. 오랜 세월 함께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빈틈이 생겼음을 즉각 눈치챘다.
“잠시 저희끼리 의논해 봐도 되겠습니까.”
술사에게 허락을 구한 후. 소영은 재효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흉신을 지척에 두고도 배를 까고 잘만 퍼질러자던 재효였으나, 오늘은 달랐다. 밤새 뒤척이다 간신히 잠드는가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깨기 일쑤였으니.
잠 못 이룬 원인은 여럿이나,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무래도 흉신의 악몽이었다. 아무개는 잠이 들면 반드시 악몽을 꾼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기상 직후에는 악몽의 여파로 다소 흉포해진다는 것도.
한데 그 악몽이란 게··· 이 지경일 줄은 몰랐더랬다. 한 많은 삶의 굴곡진 불행을 진액으로 짜내어 목구멍에 강제로 쑤셔 넣고 삼키는 기분. 꿈장수의 안배에 따라 마당놀이를 관람하듯, 거리를 두고 관찰한 소영과 재효도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이 썼다.
한데 아무개는 악몽의 당사자 안에 갇혀 온갖 고초를 함께 겪는다지 않는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을 이리 시달려야 한다면··· 나는 진작 미쳐 버렸을 거야.”
솔직히 흉신이 저리 버텨내는 게 신기하다고. 재효는 막역지우에게 털어놓았다.
소영도 공감했다. 만일 흉신이 추후 불온한 행보를 보인다면, 앞장서서 토벌대를 조직할 것이다. 하나 설혹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마음 한구석에서 참작하려는 여지가 남아 있을 테지.
아무개가, 흉신이 옳다는 게 아니다. 단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라도··· 나 자신조차 그보다 나을 수 없으리라 절절히 깨달았을 뿐.
한데 이리 뒤숭숭한 내심을 수습하기도 전에 하필 금비설의 추악한 뒷면을 목도하였다. 흉금을 털어놓던 벗의 변심에, 사람에 환멸이 났다. 이대로는 예전처럼 타인을 선의로 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휴식이 필요하다 결론지었다.
“선배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소영과 재효는 나란히 술사 앞에 섰다.
“아무래도 저희가 자만했던 것 같습니다.”
흉신은 유랑술사만 따른다. 이들 중 무력행사 없이 흉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는 술사뿐이다. 무력을 동반한 제압 또한 마찬가지다. 사대귀인 유랑술사 급이 아니면 어려울 테지.
누가 누굴 감시하겠다는 건지. 정말 어처구니없는 헛소리였다. 기실 소영과 재효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유랑술사에게 또 다른 짐인 것을. 그간 까마득한 선배가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의 응석을 받아 주었음을.
“먼저 억지를 부려 끼어든 주제에. 이제 와 말을 바꾸어 죄송합니다만··· 저희 내면이 흔들리지 않도록 갈고닦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술사가 먼저 휴식을 권했다 하나, 이제 와 발을 빼는 모양새가 염치없어 소영은 답지 않게 주저했다.
“아아, 알겠어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술사는 후배의 사과를 적당히 끊어 냈다.
“딱히 미안할 일도 아닌걸요. 오히려 아무개 님은 좋아하실 듯싶은데. 그렇지요?”
“······어? 으응···.”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제 발로 떨어져 나갔다. 아무개는 헤벌쭉 풀어지려는 입꼬리를 애써 제자리에 붙들어 맸다. 음울한 얼굴에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가 걸리자 섬뜩함이 더해져 재효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럼 대협곡으로 가기 전에 후배님들 먼저 모셔다드릴까요?”
“모셔준다니요?”
“어디서 쉴 계획인지 모르나, 먼 길 가시려거든 제가 축지로 보내드릴게요.”
일순, 재효는 술사의 등 뒤로 탱화마냥 후광이 비치는 환상을 본 듯했다. 신을 영접하듯 양손을 공손히 모은 재효가 진심을 담아 절절히 외쳤다.
“감사합니다, 선배! 아니, 대선배!”
그들이 동행한 이래. 재효가 이토록 진심이 절절 끓어 넘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귀를 추적한답시고 산 넘고 물 건너온 길이 얼마던가.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참으로 까마득했더랬다. 굳이 본가로 돌아가야 할까? 대충 인근 객관 아무 데나 들어가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유혹에 흔들릴 정도로.
“크흡, 대선배. 전 사실 대선배를 존경해 왔어요! 사대귀인 중에는 수호지신 다음으로 제일 좋아했다고요!”
“아··· 네에.”
“정말이에요. 대선배 축지술은 지상에서 따라올 자가 없으십니다!”
선배에서 대선배가 된 술사는 신이 나서 온갖 찬사를 늘어놓는 재효에게서 살짝 물러났다.
“제가 옛날에 축지술 보완용으로 사용하던 게 있어요. 한번 써 보시겠어요?”
소영과 재효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유랑술사가 사대귀인이라 손꼽히게 된 까닭은, 오랜 세월 꾸준히 베풀어 온 선행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명성을 떨친 덕이다. 하여 그의 무력수위는 다른 귀인에 비해 썩 대단치 않으리라는 게 중론이었다.
물론 호명성에서 직접 겪어 본 소영과 재효 같은 이들은 생각을 달리했으나, 기존의 인식이 그러했다. 때문에 일각에선 유랑술사를 다소 낮게 평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모두 입을 모아 그를 최고라 손꼽는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축지술이다. 이는 강암 석씨의 석화(石化)나 가온 염씨의 귀화(鬼火)와 같은, 세가 고유의 전승 술법과 비등하게 고고한 경지에 이르렀다 거론되곤 했다.
가문의 비전 술법은 긴긴 세월 다양한 구성원의 발상과 경험, 도전과 실패가 켜켜이 쌓여 이뤄낸 산물임을 고려할 때. 한 개인이 역사적인 일가 급의 발전을 이룩했다는 건 경이로운 업적이었다.
구구절절 사설이 긴 이유는, 술사의 제안이 그만큼 놀라운 일인 탓이다. 본인의 성명절기를 스스럼없이 공개하다니. 세가 고유의 비전 술법을 타 가문에 알려 주는 것과 동급이지 않나. 술법의 유출을 막고자 옹알이하는 갓난아이에게까지 금언술을 걸고, 과거 위명을 떨친 술법의 비급서를 두고 목숨을 건 항전도 불사하는 게 이 바닥이거늘.
아니. ‘사용한다’고 했으니 비급보다는 법보에 가까우려나.
“지, 진짜 그래도 돼요? 우리야 좋은데, 대선배는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철회하셔도 괜찮습니다.”
도깨비왕, 마신장과 언약을 맺은 재효는 축지술과 연이 없기에 더욱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호들갑에 설레발까지 더한 후배들에게 술사는 하하 웃기만 했다.
“대단한 건 아니니 너무 기대 말아요. 제가 여러분만 한 시절에 제작한 거라, 지금 보면 많이 엉성하거든요. 그래도 후배님들 나이대에 할 법한 고민을 담아 만들었으니 도움이 되긴 할 거예요.”
백지 부적이 일행의 몸에 달라붙고 그의 장기인 축지술이 이어졌다. 갑자기 맑고 청량하면서도 싸늘한 냉기가 몰아쳐 재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야? 여긴 어디길래 이리 추운······!”
주위를 둘러보던 재효는 구름이 발아래 자욱히 깔린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사방팔방 어딜 둘러봐도 시야에 거슬리는 게 없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선 것이다.
입을 열 때마다 부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바들바들 떠는 그들에게 술사가 손짓했다.
“이리 와 보시겠어요?”
술사는 산봉우리 중심에 세워 둔 비석 옆에 서 있었다. 그의 곁으로 세 일행이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모여들었다.
“지금부터 시범을 보여드릴 건데 도우미가 한 분 필요해요. 혹시 지원할 분 계신가요?”
아무개는 누구보다 빠르게 팔을 들었다. 술사가 하하 웃으며 손을 내밀고는 아무개의 것을 겹쳐 잡았다. 산 정상의 서늘함에 차게 식은 아무개의 손을 따스한 온기가 뒤덮었다. 맞닿은 부분은 고작해야 손과 손일 뿐인데. 기이하게도 온몸에 피가 도는 듯했다.
“자아, 여기 손을 대 보세요.”
술사는 아무개의 손을 감싸 쥐고 비석 위에 나란히 포개었다. 손바닥에 차고 딱딱한 비석의 촉감과 손등에 부드럽고 따스한 감각이 상이했다.
“이제 저와 함께 영력을 흘려 넣을 거예요. 할 수 있겠어요?”
“······응.”
둘은 동시에 비석 안으로 영력을 흘려 넣었다. 마른 사막에 내린 비처럼, 순식간에 영력을 가득 빨아들인 비석에서 광휘가 뻗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