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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36)화 (36/138)

36화

까랑까랑한 고성이 울려 퍼지자 수군거리던 인파가 삽시에 고요해졌다. 신랑이 힘겹게 빠져나올 적과 달리,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갈라져 한 사람을 위한 길을 터 주었다.

금가의 술사는 이 고을에서 오랜 세월 관혼상제 중 하나인 혼례를 좌지우지할 권위를 가졌더랬다. 비록 지금은 의혹을 받고 있다 하나, 그간 세월이 쌓아 온 위세가 단숨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삿갓을 썼다지? 보나 마나 유랑술사를 흉내 내는 사기꾼···!”

기선을 제압하듯 큰 소리로 엄포를 놓던 금가의 술사가 돌연 멈추었다. 재효가 금씨 술사를 삿대질하며 경악성을 터트렸다.

“너, 너어··· 금비설?!”

정적이 흐르던 고을 주민들 사이로 재차 술렁임이 퍼졌다. 이게 무슨 일이래. 분명 사기꾼일 거라지 않았나? 금씨 술사님이 사기꾼네랑 아는 눈치인데?

뒷말이 무성했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작게 문 금비설이 유랑술사 일행에게 제안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보시다시피 여긴 눈이 많아서.”

“자, 잠깐! 가기 전에 참말로 낫 귀신이 사라졌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맞수다! 우리가 그거 하나 알자고 모인 건데.”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잖소? 진정 원령이 사라진 겐지 확답만 내주면 될 테니.”

쏟아지는 아우성에 금비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본인은 티 내지 않으려는 듯하나, 꽤 난처한 모습이었다.

“제가 보기엔 원령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유랑술사가 나섰다.

“하나 이분께선 저보다 오랜 시간 이 고을을 돌보셨지요? 제가 놓친 부분을 알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희끼리 협의를 나눈 후에 확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에잉, 뭐야. 저치가 대충 한 말에 우리 모두가 휩쓸린 겐가?”

“왜 확실치도 않은 소릴 남발해서는, 바쁜 사람 오락가락하게 하는지.”

“시간만 낭비했군. 이게 무슨 난리 통인가.”

주민들이 대놓고 나서진 않았으나, 유랑술사를 향한 여론은 썩 좋지 않았다. 팔짱을 낀 아무개의 손끝이 움칫했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떨리는 손을 막기 위해 주먹을 쥐자 손톱이 살갗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즈음 염재효가 나서서 성질을 부렸다.

“선배가 언제 저자 한복판에서 원귀가 사라졌답시고 호언장담한 적이라도 있나? 당신네들이 먼저 불확실한 소문에 휩쓸려서 개미떼마냥 모여 놓고는, 어디다 대고 적반하장질이야?!”

우리야말로 바쁜데 오락가락하느라 시간 낭비했다며, 쬐끄만 놈이 바락바락 악을 쓰자 기분 상한 주민들의 낯이 점차 험악해졌다. 석소영이 거목처럼 단단한 어깨로 재효의 앞을 가리듯 막아서며 술사를 향해 제안했다.

“선배님. 이대로는 상황이 악화되기만 할 겁니다. 우선은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으음, 그래야겠네요. 잠시 다녀올까요.”

세 장의 백지 부적이 각각 석소영과 염재효, 금비설의 몸에 달라붙었다. 마지막으로 술사가 손에 쥔 부적 한 장을 아무개의 어깨에 가볍게 올려두자 다섯 인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축지술을 처음 목격한 주민들이 놀라 자지러졌다. 그 틈에 네 명의 술사와 한 명의 흉신은 마을 어귀 당산나무에 다다랐다.

“야, 금비설.”

염재효가 시비 걸듯 껄렁한 태도로 먼저 나섰다.

“낫을 든 귀신 같은 거 없지? 그치? 좋은 말로 할 때 이실직고해라?”

“······네가 그걸 어찌 확신하지? 눈도 나쁜 놈이.”

“나야 그래. 너보다 사알짝 눈이 안 좋으니까. 오래 묵고 영악한 원령이라면, 자칫 놓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선배님은 다르거든? 재효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두 손을 공손히 떠받들 듯하며 술사를 가리켰다.

“이 선배는 진짜 사대귀인! 유랑술사란 말이야. 선배가 없다면 정말 없는 거라고!”

“만에 하나 선배님께서 낫 귀신을 발견 못 하셨더라도 마찬가지다. 선배님이 못 찾을 만큼 대단한 원령이라면, 그보다 하수인 우리도 못 찾는 게 당연하다.”

소영이 거들어 주자 재효가 신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나무 그늘에 서서 두 후배가 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걸 가만히 보고 있는 술사에게. 아무개가 작은 보폭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있잖아, 술사님.”

“네에, 말씀하세요.”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법기라는 게, 원래··· 달포밖에 못 쓰는 거야?”

주단 금씨에서 제공하는 허수아비는 눈이 튀어나올 만치 값비싼데도 달포밖에 사용할 수 없어 매번 재구매해야 한다. 그게 보편적인 일인가 싶어 묻자 술사의 삿갓이 살며시 기울어졌다.

“글쎄요. 딱히 정해진 기간이 있다기보다는, 법기에 담은 영력이 소진되면 기능을 쓸 수 없게 되지요.”

한데 허수아비의 효능은 단지 눈속임일 뿐이잖아요?

“원귀를 직접 퇴치하는 것도 아니고. 결계를 쳐서 침입을 막는 것도 아닌데. 영력이 그토록 빨리 소모된다는 점이 저로선 이해하기 어렵네요.”

어느 순간, 서로 아웅다웅하던 세 후배의 언쟁이 수그러들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유랑술사의 목소리만 나직이 울렸다.

“일부러 소모성으로 만든 거라면 모를까.”

서늘한 바람이 당산나무 가지를 뒤흔들었다. 금비설이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재효가 뭐? 하고 되묻자 이번에는 녀석을 향해 금비설이 확언해 주었다.

“맞다고. 허수아비는 의도적으로 빨리 소모되게끔 제작한 법보야.”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무어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금비설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계속 돈을 쓰잖아.”

“뭐, 뭐라고?!”

“한 번 사고팔면 끝나는 단발성 수입과 정기적인 수입원. 둘 중에 후자를 고르는 게 당연하잖아?”

“······너, 너 이···!”

한참 어버버거리던 재효가 이내 소리쳤다.

“그건 사기잖아!”

“사기라니.”

금비설이 비릿하게 웃었다.

“허수아비는 제 몫을 확실히 했고, 우리는 사용기한과 효능을 미리 알려 줬어. 살 사람은 다 감안하고 샀지. 그게 왜 사기야?”

“···야, 너!”

“됐다, 재효. 더 말 섞을 필요 없다.”

재효를 만류하며 소영이 금비설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낫 귀신도 사라졌다 하니. 너희 장사도 오늘로 끝이겠지.”

“······.”

금비설이 애매하게 침묵하자, 석소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지? 왜 대답을 않는 거냐.”

“그야 그만둘 계획이 없었을 테니까요?”

술사가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낫 귀신이 사라진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닐 거예요. 저는 최소 십 년은 지났으리라 추정합니다.”

재효가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적어도 십 년 전에 사라진 원귀를 핑계로 여태 주민들을 등쳐먹은 거야?!”

와, 우와, 하고 감탄 아닌 감탄을 연발하며 재효가 삿대질했다.

“이거 제대로 쓰레기잖아?!”

쳇, 혀를 찬 금비설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경고했다.

“너희야말로. 남의 집안 장사를 망쳐놨으니 가문을 통해 정식으로 항의가 들어갈 거다.”

“너 대체 뭘 믿고 이리 당당하냐?”

“애초에 주경은 우리 금씨가 관할하는 구역일 텐데? 타 가문의 내정에 간섭하는 거로 모자라 수입원 하나를 끊어놓다니. 이 무슨 행패인지.”

“허어어?! 우리는? 우리 집안은 뭐 가만있을 것 같아?”

“그럴 것 같은데.”

금비설이 조소를 흘렸다.

“너희는 가문에서도 내놓은 자식들이잖아. 주단 금씨 직계 장손에 일부 업무까지 도맡을 정도로 신임받는 나와는 급이 다르지.”

으아아악! 염재효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선배! 뭐라고 말 좀 해 줘 봐요!”

“네?”

느닷없이 소환당한 술사가 말갛게 되묻자 재효가 억울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분명히 쟤가 나쁜 짓을 했는데! 나쁜 놈이 왜 저리 당당하고 나는 왜 이리 속이 터지냐고! 요!”

금비설이 유랑술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삿갓에 잠시간 머무르자 이를 눈치챈 염재효가 하핫 웃었다.

“봤냐? 이분은 사대귀인이신 유랑술사시다! 선배가 네 악행을 봤으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를 말아! 자, 선배! 어서 한 마디 해 줘요!”

소영과 재효를 상대로는 잘도 입을 놀리던 금비설이나, 상대가 사대귀인이라니 아무래도 긴장되는 모양이다. 침묵하는 후배에게 술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듯 낮게 침음했다.

“대충 예상하겠지만, 제가 후배님을 모셔 온 건 협의를 하고자 해서가 아니에요. 아까 그 자리에서 주단 금씨의 지난 행적이 밝혀졌다간, 필시 곤경에 처할 테니 미리 빼낸 거죠.”

금비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연차가 낮은 후배님께서 일을 계획하진 않았을 테고. 가문에서 옛날부터 행하던 업무 하나를 떠맡은 거겠죠.”

솔직하게 답해 주길 바라요.

“진정으로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적 없나요?”

술사의 물음은 재효나 소영의 공세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언성을 높이거나 화내지 않았고, 질책하지도 않았다.

한데도 그 나긋나긋한 어조가 마음에 무게를 차곡차곡 쌓는 듯했다. 그의 별호가 지닌 상징성과 더불어 금비설에게 앞서 베푼 선의가 더욱 그리되게끔 하는 모양이다.

“······밑천이 다 털렸으니 여기 장사는 접을 겁니다. 낫 귀신이 사라졌다 동네방네 떠들든 말든 맘대로 하시지요.”

금비설이 옷자락을 떨치며 돌아섰다. 아예 떠나려는 듯한 그 등에 대고 염재효가 소리쳤다.

“너 왜 이렇게 바닥이 됐어? 내가 차라리 금비환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야겠냐고!”

비록 금비환은 흉신을 봉인한 족자를 가져가려 했으나, 이후 봉인을 풀어 주려는 유랑술사와 맞서는 데 동참했다. 심지어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소영과 재효를 보내 주려고도 했었다.

“왜 이리 사람을 실망시키는데!”

목청이 터져라 외쳤으나 금비설은 점차 멀어지기만 하였다. 염재효는 분을 못 이기고 씩씩댔다.

“저거 이대로 얌전히 보내면 안 되겠어! 마을로 데려가서 욕을 처먹든 멍석말이 당하든, 자기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진정해라, 재효.”

소영이 어두운 얼굴로 만류했다.

“선배님 말씀대로. 아직 경륜이 부족한 비설이 이 일을 계획했을 리 없다. 집안 어른들이 부러 지저분한 일만 골라 넘겼겠지. 너도 알잖나, 그들이 비설을 어찌 대하는지.”

“거절하면 되잖아! 진상을 알고도 행한 시점에서 금비설은 떳떳할 수 없어!”

“그래. 그건 그렇다만··· 주변 환경을 아예 무시할 순 없다.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홀로 젖지 않을 수는 없으니.”

유랑술사를 돌아보며 소영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비설이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대체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우리가 글도 못 떼서 같이 받아쓰기나 하던 시절 일을 지금 끌고 와 봤자 무슨 소용인데?”

사람은 변해. 재효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뇌까렸다.

“금비설은 더이상 우리가 알던 벗이 아니야.”

소영도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주단 금씨는 예나 지금이나 일관성 있네요.”

술사가 운을 떼자 소영과 재효의 표정이 일변했다.

“일관성 있다니··· 무슨 뜻이에요?”

“연나라 말 무렵. 민생이 도탄에 빠진 시절에 한몫했던 게 주단 금씨지요. 매관매직에 국책업까지 많이 해 먹었어요. 민란이 벌어져도 진압할 군력이 없는 황실과 결탁해 술법을 써서 제압하기도 했고요. 한데 막상 북방에서 외침이 벌어지니 술사는 속세에 개입하지 않는다며 발을 뺐지요.”

경악에 찬 후배들을 향해 생긋 웃어 준 술사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나라가 망해도 금씨는 살아남은 걸 보면··· 역시 천벌 따윈 없는 것 같지요?”

이만 가 볼까요.

술사의 제안에 일행이 걸음을 옮겼다.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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