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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35)화 (35/138)

35화

***

손안의 감각을 더듬어 보았다. 매끄러운 보료가 잡힌다.

낫은 어디 있지?

“······아무개 님.”

낯선 기척이 한둘이 아닌데 무기가 될 만한 것조차 없다. 거슬린다.

“그만 일어나세요.”

대신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려던 찰나, 두 뺨이 큼직한 손안에 갇혔다. 이 건방진 손목을 꺾어버리고자 덥석 붙잡은 순간.

“서방님?”

번쩍, 눈이 뜨였다.

유랑술사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개는 제 뺨을 감싼 술사의 두 손목을 붙잡은 채로. 덜 깨어난 머리를 느릿느릿 굴리느라 눈만 껌뻑였다. 그 모양을 보고 술사가 하하 웃었다.

“몇 번을 불러도 깨지 않으시더니. 서방님이 좋은가요?”

···서방님?

아무개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자칫 이마를 박을 뻔하였으나 술사는 요령 좋게 거리를 유지했다.

“다 끝났답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그제야 술사 외의 다른 잡것들이 눈에 띄었다. 석소영과 염재효는 물론 꿈장수까지. 무거운 낯으로 침묵하는 그들 사이에서 홀로 생긋생긋 미소 짓는 유랑술사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끝, 났어···?”

“네에. 아무개 님 덕분에요.”

꿈장수가 설계한 꿈에 아무개의 악몽이 끼어들었다. 꿈의 주도권을 얻은 악몽은 늘 그랬듯, 아무개의 의식을 제 안에 품고서 유유히 흘러갔다.

“몽환전주께서 꿈자리를 내어주는 대가로 함께 머물 수 있게끔 손을 썼어요. 해서 여기 모인 모두가 아무개 님의 악몽을 보았지요.”

그래서 분위기가 이따위였구나. 아무개는 선선히 수긍했다.

“제가 손님들께 보여드린 꿈은, 아버지의 기억을 토대로 만든 겁니다요.”

꿈장수가 입을 열었다.

“하니 아버지께서 알지 못하는 부분은 알 수가 없지요. 만일 손님의 악몽이 진실이라면··· 저희 어머니께선 죄책감 탓에 돌아가신 게로군요.”

아씨는 본래 몸이 약했다. 부친상의 충격으로 몸져눕고 겨우 일어나 애금을 만났으니. 심적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

“······사실이야.”

아무개는 덤덤히 긍정했다.

“내 악몽은 모두··· 과거 실제로 벌어진 일이야.”

아이를, 꿈장수를 발견한 애금은 광기에 젖은 복수를 내려놓았다. 하나 감정을 온전히 해소하고 정리한 게 아닌지라 목숨을 끊고도 남은 한이 원령으로 재탄생하고 말았다. 생전의 기억이 점차 옅어지고 분노 증오 울분 따위의 어두운 감정만이 남은. 그리하여 무분별적으로 신혼부부를 공격하는, 낫을 든 귀신.

“우선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요. 손님 덕분에 몰랐던 진상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꿈장수가 그 자세 그대로 이어 말했다.

“저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게 제 탓인 줄 알았습니다.”

그럴 만도 했다. 꿈장수는 애금을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그저 자신을 품에 안고 섧게 울던 어머니의 모습만 뇌리에 각인되었을 터.

“사실 너무 어릴 적이라 당시 기억이 또렷하질 않습니다. 주변에서 다들 내 탓이라 하니 그런가 보다 했더랬지요. 무어, 아버지는 아니라셨지만요.”

정말 내 탓일까, 아닐까. 마음 한편에 남은 의구심을 털어내고자 그는 유랑술사의 힘을 빌리려 했다. 엉뚱하게도 아무개가 그 의문을 해소해 주었지만.

아무개가 꿈장수를 향해 느릿느릿 시선을 들었다.

“······그래서··· 넌 뭐야?”

“예?”

“원산의 백운이······ 귀장군이라 불리며, 북진하던 시기는··· 연나라가 몰락한 후. ······거의 이백 년 전 즈음인데···.”

아무개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너. 뭐냐고.”

귀장군과 혼례를 피해 야반도주한 부부의 자식이 꿈장수라면, 대체 그의 나이가 어찌 된단 말인가. 어쩌면, 사대귀인 유랑술사보다 연배가 높을지도 모른다.

아무개의 지적에 나머지 세 일행도 꿈장수를 주시했다. 모두의 주목을 받은 그가 겸연쩍은 낯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웃음으로 대강 무마하려 들었다.

“에이,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손님께서는 받아 갈 것만 확실히 하면 되지 않습니까. 서로 주고받는 게 정확하면 누가 누군지, 정체가 무어 중요한가요. 그렇습죠?”

“옳은 말씀이에요.”

술사가 마찬가지로 웃으며 화답했다.

“한데 저희가 받아갈 것도 확실치는 않잖아요?”

“아이고, 술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유랑술사는 발뺌하는 꿈장수를 물끄러미 보았다. 더는 말이 필요치 않았다. 일행의 주변을 맴돌던 백지 부적이 서로 간격을 넓히며 범위를 차츰 확장했다.

부적이 그리는 원형의 결계가 거대해질수록, 안팎의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부적 밖은 이전과 같은 몽환전이었으나, 안쪽은 낡고 삭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구조에 썩은 판자를 덧댄 초라한 몰골이었다.

꿈장수는 기겁하며 부적을 피해 헐레벌떡 달아났다. 이윽고 백지 부적이 가게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범위를 넓히자 실상이 드러났다. 일행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폐가에서 거적을 덮고 있었다.

몽환전 자체가 환상으로 꾸며낸 장소였던 것이다.

“가게 상황을 보니 아버님 유품을 이런 곳에 두진 않았을 듯한데요.”

실상을 밝혀낸 술사가 꿈장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탁은 들어드렸습니다. 이제 전주께서 스스로 한 말을 지킬 차례지요.”

“어이쿠, 걱정 마십쇼! 물건을 떼먹는 일은 저얼대 없을 겝니다. 한데··· 이거 어쩌죠.”

꿈장수가 굽실거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그··· 짐작하신 대로 물건이 여기 없거든요.”

“이런 사기꾼이 다 있나!”

재효가 버럭 성을 내자 꿈장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려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상품은 드릴 겁니다! 당연히 드릴 건데··· 아무래도 손님들께서 직접 방문해서 수령하셔야겠습니다요.”

“물건은 어디에 있나요?”

“방문은 개뿔, 당장 여기로 가져오지 못해? 이 사기꾼아!”

술사와 재효가 동시에 말했다. 꿈장수는 둘에게 차례차례 대답해 주었다.

“아이고, 술사 나리. 물건은 대협곡 그림자 마을에 있습니다요. 작은 손님, 제가 사정상 물건을 옮겨올 수가 없습니다요.”

고양이를 마주친 쥐처럼 헐레벌떡 달음박질치던 꿈장수가 돌연 행동을 바꾸었다. 백지 부적이 만들어 낸 원형 결계를 향해 성큼 다가온 그가 부적 틈 사이로 손을 들이밀었다. 손마디부터 손목, 팔꿈치까지. 결계 범위 안으로 들어온 그의 몸이 신기루인 양 사라졌다.

“보시다시피. 저 또한 실체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아서 말입죠.”

부적이 만들어 낸 결계는 원구(圓球) 형태였다. 따라서 꿈장수가 한 걸음씩 내디딜수록 허리부터 사라지며 어깨 위 머리와 무릎 아래 발목만 남은 기괴한 형상이 되었다.

“그럼, 차후 뵙겠습니다요.”

환히 미소 짓는 꿈장수의 얼굴마저 스러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오른손이 인사하듯 좌우로 흔들렸으나, 그마저도 곧 결계 안으로 눈 녹듯 사라졌다.

기괴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모두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술사만이 멀쩡히 상황을 정리했다.

“하하. 당했네요.”

“아무도 없어요.”

네 일행은 위험천만한 절벽 앞에 섰다. 금역이라 불리는 지역에 들어왔으나 산삼을 가장한 환영도, 이를 만들어 낸 몽환의 신령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오기 전에 튄 거 아니야? 요?”

“잔흔이 남아 있지 않네요. 아주 오래전에 떠난 듯싶어요.”

사기꾼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냉큼 튀어왔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재효는 애꿎은 돌멩이만 걷어찼다.

마을로 돌아온 그들은 앞서 부탁받은, 혼례를 올리고 싶다 하소연하던 신랑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저기요, 선배님.”

“네에.”

“그 신랑인지 머시긴지 부모랑 일가친척 앞에서 ‘낫 귀신은 없다’고 말해 주기만 하면 된다지 않았어? 요?”

“그랬지요.”

재효는 좁은 마당을 가득 채우다 못해 싸리문을 지나 골목 어귀까지 인파로 넘쳐나자 기함하였다.

“여기 집성촌이었나? 신랑 쪽 부모랑 일가친척이라더니, 마을 주민이 죄다 몰려온 것 같은데?”

검은 머리가 우글거리는 형상에 아무개는 뒷걸음질 치고 싶은 걸 꾹 참고 팔짱을 꼈다.

“앗, 저기 네가 말한 술사 나리 아니냐? 삿갓을 쓰신!”

바글바글한 가운데 누군가 술사를 발견하고 외쳤다. 그러자 예의 그 신랑이 사람 틈바구니를 헤집고서 헐레벌떡 튀어나왔다.

“수, 술사님. 오셨습니까.”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고을 주민과 술사일행을 번갈아 보았다.

“일이 커져 죄송합니다. 저희 부모님과 가까운 친지에게만 말을 전하였는데, 하필 오늘 조사 차 방문하신 주단 금씨 술사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슬슬 올 때가 됐다던 금씨 가문의 술사가 마침 당도한 모양이다.

가여운 아들 내외를 위해 사재를 털어 허수아비 제작을 의뢰하러 간 모부는, 그 아들에게서 낫 귀신이 사라졌다는 얘길 듣고 당장 주문을 취소했다. 같은 이유로 금씨 술사를 찾아온 주민들 사이에 소문이 불붙듯 퍼지고 모두 의뢰를 취소하거나 보류하기에 이르렀다. 하여 참말로 낫 귀신이 사라진 건가 확인하려는 자들이 모이고 모여 이 같은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유례없는 불매 사태를 맞이한 금씨 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놈이 낫 귀신이 사라졌다 망발을 지껄인 작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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